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1. 입교 동기 - 3
21 그런데 우리는 이사를 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이웃집 사람들은 우리가 이북에서 온 사람들임을 몰랐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하여 대문에 인줄을 쳐놓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위원회에서 찾아와도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러냐며 그냥 돌아갔다. 그래서 별 탈 없이 지냈다.
22 그러다 인천 상륙을 통해 서울이 수복되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서울의 여러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갔는데 아버지는 그런 집 불을 꺼주러 지붕 위에 올라가셨다가 약한 곳을 밟아 떨어졌다. 그래서 다리를 다쳐 고통을 겪고 있었다.
23 그런데 다시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그때 우리는 마산으로 피난을 갔다. 마산으로 피난을 갈 때도 이북에서 내려올 때처럼 아버지가 먼저 내려가셨고 다음으로 어머니와 젖먹이 동생이 내려갔고, 그다음 나와 남동생이 화물차 지붕 위에 올라타고 일주일 만에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24 마산에서 부친께서는 광산업을 하였는데 참 잘 되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난민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고 자그마한 집 한 채를 구입하여 생활하였다.
25 나는 피난민 등록 학생으로 마산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 학교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17개 여고 학생들이 모여 함께 공부를 하였다.
26 그곳에서 최순실이라는 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중에 나를 통일교회로 전도한 사람이다. 최순실씨는 서울 이화여고를 다니다가 마산으로 피난을 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27 내가 부산의 이화여대에 입학을 하게 되자 부모님께서는 마산의 집을 팔고 부산으로 이사를 하셨다. 당시 이화여대는 부산 아미동 언덕에 판자로 교실을 지어놓고 수업을 하고 있었다.
28 내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지원하게 된 것은 내가 감리교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신앙이 깊어지지를 않았기때문니다. 그래서 미션스쿨인 이화여대에서 다른 것은 못 배울지라도 인생에 있어서 불변할 수 있는 신념 하나라도 배워 가지고 싶었다.
29 또 인생의 근본 문제에 있어서 여성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볼 때 가정생활을 원만히 하여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30 6·25 직후 사회 분위기가 여성들도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며 약학과를 많이 지원하기도 했지만 나는 가정학과에 입학을 했던 것이다. 입학식 때 최원복 선생을 소개하는데 내가 이북 초등학교 시절에 제일 존경했던 김원복 선생과 이름이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