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 / 차범석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제1막
[무대] 번화한 상가에 자리 잡은 최 노인의 낡은 기와집. 정면에 유리문이 달리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둘 있고 좌편으로 기역형으로 굽어서 부엌과 장독대 유리문 저쪽은 가게. 우편으로 대문을 끼고 헛간과 방 하나의 딴채가 서너 평이 못 넘는 좁 은 뜰을 에워싸고 웅크리고 앉았다. 해묵은 지붕에는 푸른 이끼며 잡초까지 자라나서 오랜 풍상을 겪어 내려온 이 집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배경으로 면목이 일신해져 가는 매끈한 고층 건물의 행렬이 엿보이고 좌우편에도 역시 삼사 층이나 되어 보 이는 최신식 건물이 들어서서 이 낡은 기와집을 거의 폐가처럼 멸시하고 있다. 좌편 건물은 아직도 건축 공사가 진척 중에 있 는지 통나무로 얽어맨 작업 보조대에 거적때기가 걸려서 건물은 반쯤 가려진 채로다. 이처럼 대척적인 주변의 장애로 말미암 아 이 낡은 집 안팎에는 온종일 햇볕이 안 드는 탓인지 한층 어둡고 습하며 음산한 공기가 찬바람처럼 풍겨 나온다. 때는 초여 름 어느 일요일 오전. 막이 오르면 질주하는 전차며 자동차의 소음이 잇따라 들려온다. 뜰가에서 경운이가 함석 통에 담겨진 빨 래를 빨고 있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이 보인다. 좌편 담 아래에 마련된 조그만 화단 앞엔 아까부터 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서 화초며 푸성귀들을 손보고 있다. 입에 물린 파이프에서 이따금 뱉어지는 담배 연기가 한가롭다. 잠 시 후 경재가 물지게를 지고 좁은 대문을 간신히 빠져나와 경운 앞에다 부려 놓는다.
경재: 어유. 오늘은 웬 사람이 그리도 많아……. 공동 수도엔 난장판인걸! (하며 항아리에다 물을 붓는다.)
경운: (여전히 빨래를 하며) 비가 개니까 집집마다 빨래하느라고 그렇겠지…….
경재: 아버지 우리도 다음엔 제발 물 흔한 집으로 옮깁시다. 물만 길다가 내년 봄엔 낙제하게 생겼는걸요! 하루 이틀이 아니구…….
최 노인: ㉠(돌아보지도 않고) 그래…….
경운: 애도 속없는 소리 잘하긴 경애 언니 닮았나 봐! 누가 이따위 골목 구석에서 살고 싶어 살고 있니?
경재: 살기 싫으면 딴 데로 옮기면 될 걸 왜 이런 게딱지 굴속에서 산다는 거요?
최 노인: (눈을 크게 부릅뜨며) 무슨 소리냐? 이 집이 어때서?
경재: 아버지나 좋아하시지 우리 식구 중에서 이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최 노인: 싫은 놈은 언제건 나가라지! 절간이 미우면 중이 나가는 법이야.
경재: (남은 물통을 비우며) 중도 없는 절을 뭣에 쓰게요? 도깨비나 날걸…….
최 노인: (약간 핏대를 올리며) 도깨비가 나건 노다지가 나건 제집 지니고 산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 이놈아!
경재: ㉡(못마땅한 낯으로) 다행으로 알 건덕지가 있어야죠.
최 노인: (휙 돌아서며) 뭐 뭐야?
경운: ㉢(재빨리 공기를 수습하려 들며) 경재야, 한 번만 더 길어 와! 물이 끊어지면 어떡하려구…….
경재: 또야? 나 시간 약속이 있는데…….
경운: (흘겨보며) 너 그러면 나와 약속한 일 국물도 없다!
경재: (짜증을 내며) 정식이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는걸……. 9시 40분까지 가야 돼요.
어머니: ㉣(설거지통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바쁘면 어서 가려무나, 설거지가 끝나면 내가 길을 테니…….
경재: (펄쩍 뛰며) 엄마가 제일야! 우리 엄마가 넘버원이지! 그 대신 내일 아침엔 식전에 다섯 지게 길을게요, 어머니!
어머니: (웃으며) 그럼 물 항아리를 더 사 놔야겠구나……. (하며 수챗구멍에다 물을 버린다.)
경재: (손을 씻으며) 항아릿값은 우리의 재무 장관인 작은누나가 치르구 핫하……. (하며 아랫방으로 퇴장)
경운: 깍쟁이! (빨래를 짜며) 어머니가 어떻게 물을 길으신다구 그러세요! 아직도 허리를 쓰시기가 거북하시 다면서……. (방 안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온다.)
어머니: 괜찮아…….
최 노인: 참 그 고약은 다 붙였어?
어머니: 예. (허리를 가볍게 치며) 이제 훨씬 부드러워졌어요.
최 노인: 뭐니 뭐니 해도 그 강 약방의 처방이 제일이야! 내 청이라면 친형제 일보다 더 알심 있게 약을 써 주거든!
어머니: 하기야 이 동리에서 옛부터 사귀어 온 집은 이제 그 강 약방하구 우리 집뿐인걸요.
최 노인: 그래,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 집에서 산 지가 꼭 사십칠 년이고 그 강 약방이 사십 년이 되니 까……. 그러고 보면 나도 무던히 오래 살았어……. 이 종로 바닥에서 자라서 장가들어 자식 낳고 길 러서 이제는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어머니: (마루 끝에 앉으며) 정말……. 근 오십 년 동안에 이웃 얼굴 바뀌고 저렇게 집이 들어서는 걸 보면 세 상 변해 가는 모양이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당신에게 시집왔을 때만 하더라도 어디 우리 이 웃에 우리 집 담을 넘어서는 집이 있었던가요?
최 노인: 사실이야! 빌어먹을 것! ㉤(좌우의 높은 집들을 쏘아보며) 무슨 집들이 저따위가 있어! 게다가 저것들 등쌀에 우린 일 년 열두 달 햇볕 구경이라곤 못하게 되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옛날에 우리 집이 어디 이랬소?
경운: (웃으며) 아버지두……. 세상이 밤낮으로 변해 가는 시대인데요…….
최 노인: 변하는 것도 좋구 둔갑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지만 글쎄 염치들이 있어야지 염치가!
경운: 왜요?
최 노인: 제깟 놈들이 돈을 벌었으면 벌었지 온 장안 사람들에게 내보라는 듯이 저따위로 층층이 쌓아 올릴 줄만 알고 이웃이 어떻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걸 모르니 말이다!
경운: 피해라뇨?
최 노인: (화단 쪽을 가리키며) 저기 심어 놓은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는단 말이야! 아까도 들여다 보니까 고추 모에서 꽃이 핀 지는 벌써 오래전인데 열매가 열리지 않잖아!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저 멋없는 것이 좌우로 탁 들어 막아서 햇볕을 가렸으니 어디 자라날 재간이 있어야지! 이러다 간 땅에서 풀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게다, 말세야 말세! (이때 경재 제복을 차려입고 책을 들고 나와서 신을 신다가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경재: 원 아버지두…….
최 노인: 이놈아, 뭐가 우스워?
경재: 지금 세상에 남의 집 고추밭을 넘어다보며 집을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 노인: 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01. 윗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소도구를 사용하여 인물의 태도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② 대사를 통해 인물 간의 의견이 대립하는 쟁점을 제시하고 있다.
③ 인물의 특정 행동을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④ 극 중 시간의 흐름을 전환하여 과거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⑤ 무대의 신속한 전환을 통해 공간이 변화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02. 윗글을 토대로 공연을 준비할 때, ㉠~㉤에서 연출자가 배우들에게 요구할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상대방의 요구에 대해 관심이 없는 태도를 드러내야 하니, 건성으로 대답하세요.
② ㉡: 상대방의 말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현해야 하니, 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말하세요.
③ ㉢: 분위기 전환을 위해 화제를 바꾸는 대목이니,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이세요.
④ ㉣: 이기적인 상대방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표현해야 하니, 빈정대는 말투로 말하세요.
⑤ ㉤: 주변의 건물에 대한 못마땅함을 드러내야 하니, 화난 기색이 부각되도록 하세요.
03. <보기>에 근거하여 윗글의 무대에 대해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불모지」의 무대는 근대화, 도시화의 흐름에서 소외된 최 노인의 낡은 기와집을 중심으로 현실 모사적인 전경을 보이는 가운데, 무대 안의 장치들끼리 충돌하고 있거나, 무대 밖 공간과 대립하고 있거나, 무대와 연결되어 있는 잠재적인 공간(명시적으로 무대에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말에 의해 구성되고 환기되는 부재의 공간)과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① 최 노인의 ‘낡은 기와집’과 이를 좌우편으로 에워싼 ‘삼사 층이나 되어 보이는 최신식 건물’은 서로 충돌하는 관계에 놓인 무대 안의 장치들로 기능하고 있다.
② 배경으로 엿보이는 ‘면목이 일신해져 가는 매끈한 고층 건물의 행렬’은 도시화가 진행된 무대 밖 공간의 성격을 보여 주면서, 무대 밖 공간이 ‘낡은 기와집’과 대립되는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③ ‘아직도 건축 공사가 진척 중’인 ‘좌편 건물’은 ‘반쯤 가려진 채’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최 노인의 고집으로 유지되는 ‘낡은 기와집’의 폐쇄성과 유사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④ ‘질주하는 전차며 자동차의 소음’은 무대와 연결되는 잠재적인 공간의 도시성을 드러내면서, 매일 물을 긷는 일상으로 채워지는 ‘낡은 기와집’이 도시 속에서 소외된 장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⑤ ‘도무지 자라질 않는’ 것으로 언급되는 ‘화초며 푸성귀들’은 ‘낡은 기와집’이 도시적 공간과의 충돌로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무대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