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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오늘날의 경주가 되게 한 인물 셋을 꼽으라면 신라를 건국하여 천년 도읍지의 기틀을 마련한 박혁거세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과 무렬왕이 있을 것이다. 경순왕이 망하는 신라를 왕건에게 헌납하여 수도인 개경과 서경인 평양과 동경이라며 우대했던 경주가 고려 500년 동안 폐도가 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므로 경순왕도 오늘의 경주가 있게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신라에 이어 고려도 불교가 통치이념이었으니 1500년을 누리고 살았던 셈이다.
그러나 유교국가인 조선조에 들어와서 불교는 적폐대상이 되어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성지라는 경주남산의 숱하게 잘려나간 목없는 불상이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나 개성처럼 폐도가 될뻔한 경주가 양반의 고을로 그 명망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는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언적의 출생과 성장배경
회재 이언적은 1491년 성종 22년 경주 양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적이었으나 동시대에 출사하고 있던 동명이인이 있어 중종이 이언적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을 따라 상주 등에서 공부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약관 24세에 문과에 합격한 준재였다. 이황이 34세에 대과에 합격하고, 과거급제자의 평균연령이 35세인데 비하면 소년등과를 한 셈이다. 출사 후 교서관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25세에 경주주학교관으로 부임하여 3년을 재직하며 훗날 조선 최초의 철학학술논쟁인 태극무극논쟁을 벌였다.
이 태극논쟁은 사후 이황이 성리학의 선구적인 학설로 인정함으로 해서 일약 이언적이 조선 유교의 본류인 주자학의 태두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의 시발은 또 다른 외숙인 망재 손숙돈과 망기당 조한보의 성리학을 토론한 논쟁편지를 우연히 접한데서 시작되었다.
망재 망기당의 주장에는 불교 노장철학에 기반하여 현실에 부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여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인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나이 차이가 30이나 되는 조한보와의 논쟁은 회재가 한양으로 전근 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며 남아있는 네 차례 서신은 귀중한 주자학 학설이 되었다.
불교는 마음중심, 노장은 氣(기)중심, 유교는 理(이)중시의 철학으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나 우주만물의 이치(理)에 대한 문제를 탐구의 중심으로 삼는 공자 맹자 이후의 새로운 유학이 성리학으로 발전해 왔던 것이다.
성리학은 송나라에 들어와서 성리학의 시조라는 주돈이를 비롯한 정호 정이 등 여러 학자들이 나타나 치열한 논쟁 끝에 주희(주자)가 집대성하여 이를 주자학이라 일컽게 되었다. 이언적은 주희를 흠모하여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서 호를 회재(晦齋)라 지었다.
이언적의 관직생활
29세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람파가 대거 숙청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났으나 조부상을 당하여 요행이 화를 피하고, 31세 때부터 순탄한 관직생활이 펼쳐졌다. 홍문관 박사 세자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 병조 이조좌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34세 때 모친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원하여 인동현감을 지내다가 복귀하여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다시 어머니 봉양을 위해 밀양부사가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임명되며 비운이 시작된다.
권신 김안로와의 악연
조선시대에 사헌부와 사간원은 요즘으로 치면 검찰청과 같은 기관으로 탄핵권을 행사하는 주요기관이었다. 김안로는 약관의 나이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인물이 준수하고 외양은 전형적인 사대부상이었으나 권력욕으로 가득찬 잔인한 인물이었다. 한 때 연배가 비슷한 조광조를 따랐다가 기묘사화 때 귀향을 갔던 인물이었다. 아들 김희가 딸 바보던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됨을 기화로 동궁보호라는 구실로 복귀하려할 때 회재가 나서 김안로는 원래 인간이 사악하고 음흉하여 반드시 권신(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될 것이라며 등용을 반대하였다. 회재가 경주향교에 재직시 김안로가 경주부윤으로 있었던 적이 있어 김안로라는 인물을 익히 잘 알고 있던 참이었다. 역대 군주 중 무능함의 극치였던 중종의 묵인과 권모술수로 자신의 인맥과 대간들을 휘어잡은 김안로는 숙청정치를 휘둘러 사림(士林)들의 흑역사를 장식했다.
자기와 원한관계가 있는 인물은 무자비하게 보복했다. 정굉필 이행 이언적 등 쟁쟁한 인물들이 줄줄이 낙마했고 경빈박씨의 외아들 복성군을 음모로 몰아 죽이고 윤원형도 귀향 보냈다.
회재 나이 41세 중종 26년에 김안로의 보복으로 파직당한 이언적은 낙향하여 경치가 좋은 자옥산 계곡옆에 자그만 띠풀 초옥을 짓고 독락당이라는 당호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시나 지으며 5년을 보냈다.
좌의정까지 승승장구하며 권세를 날렸던 김안로는 7년 후 왕이 되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마져 음모로 몰아 내치려다 중종의 변심으로 제물이 되고 난 뒤 이언적은 중앙정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휘몰아 치는 광풍과 을사사화
춘추관 교리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어머니 봉양을 구실로 전주부윤으로 나갔으며 이 때 왕의 요청으로 일강십목소를 올렸다.
50세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판윤 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치고 좌참찬에 이르게 됐다. 어머니 노환이 깊어 경상도 관찰사로 나왔다가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 때 중종이 양동마을 입구 언덕에 있는 향단을 지어줬다. 55세 되던 해 회재를 지극히 아꼈던 무능한 중종이 39년 만에 죽고 인종이 즉위했다.
8개월 만에 마음씨 착한 인종이 요절하자 인종의 동생인 명종이 12살에 즉위했다. 거대한 을사사화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인종의 외척인 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대윤 소윤으로 나뉘어 대판 권력투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윤임과 윤원형은 9촌 숙질관계인 친족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왕위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문정왕후는 친정 동생인 윤원형과 합작하여 명종의 보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인종의 척신인 윤임 일파를 대거 제거한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소윤파는 윤임 유관 유인숙 권벌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양재역 벽서사건과 간신 이기(李芑)
피비린내 나는 명종 즉위년 좌찬성에다 판의금부사를 겸하고 있을 때 윤임 일파를 논죄하는 충순당 인견에 참여하여 위사공신에 기록되고 여성군에 봉해지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회재는 극구 사양했으나 훗날 율곡 이이에게 이런 처신을 문제 삼아 비난를 받게 된다. 충순당 인견이란 수렴청정하는 문정왕후의 배석하에 윤임 일파를 논죄하는 어전회의 였다.
이 날 회재가 젊은 선비들을 적극 옹호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사건이 확대되어 더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으려는 처사었다고 서애 유성룡도 옹호하였지만 이언적의 관직생활 중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일이라 할 수 있다.
을사사화가 진행중인 다음 해 양재역 벽에 대자보가 붙었다.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괴문서였던 것이다.
이는 을사사화에서 처결하지 못한 추종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자작극 빌미였다. 이 때 이언적을 비롯하여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20여명이 사약을 받거나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명종 2년 회재 나이 57세에 화려했던 관작이 삭탈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계로 귀양길에 나섰다. 윤원형 정순붕과 함께 3흉이라 불렀던 이기는 문과에 장원한 인재였으나 장인 김진이 비리를 저지른 벼슬아치라고 요직에 천거하는 이가 없었는데, 이언적이 대사헌일 때 이기를 추천하여 발탁한 일이 있었음에도 “사람됨이 흉험하다”고 매도하며 유배길에 보냈다.
이는 회재의 인품을 높이 사서 자기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위사공신으로 우대까지 해준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가차없이 내지른 결과였다.
훗날 이기의 증손자인 동악 이안눌이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여 옥산서원을 참배하며 참회의 시를 지었다. 만고의 역적 간신 후손이 진정으로 사과의 마음을 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기야 4300수에 이른다는 시인 동악임에랴.
잔잔한 시냇물 바닥까지 깨끗한데 / 溪水潺湲徹底淸
맑게 갠 옥산의 그림자 창공에 잠겨 있네 / 玉山晴影蘸空明
옛날 선현이 은거하며 공부하던 곳에 / 前賢昔日藏修地
지금 봉을 노래하니 마음 편치 못하구나 / 歌鳳如今意未平
귀양지 강계적소에서 이룬 업적
백두산 아래 첩첩산중 강계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라고 보내는 일급 귀양지였다. 회재는 영어의 몸이 되었어도 오랜 관직생활에서 못다한 학문을 집대성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도 세상을 살아보면 절박해야만 공부가 되듯이 일념으로 정진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땅에서 18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불후의 명작 목민심서를 저술하고,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길 9년 동안 후대에 길이 남을 세한도를 그리고, 추사체의 완성도를 이뤄 불세출의 위인이 되었듯이 회재는 속 대학혹문 대학장구보유 구인록 중용구경연의 등 숱한 저술을 남긴다.
특히 대학장구보유는 4서 중 대학을 중시하던 시대조류에 따라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정조는 직접 서문을 쓸 정도로 선생을 선양했다. 대학장구는 주희가 직접 쓴 저술인데 대학장구보유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고, 순서를 바꾸고 자기만의 논지를 펴며 주자가 살아와도 인정하리라 했다.
한 두세대 정도 지난 훗날 이이의 기호학파 학문을 계승한 송시열은 주자의 글을 한자만 잘 못 해석해도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임까지 불사했음에 비춰보면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회재와 퇴계, 같은점 다른점
유배생활 6년만에 중용구경연의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적소에서 아버지를 수발했던 서자 이전인은 시신을 대나무로 엮어 동지달 엄동설한에 눈썰매처럼 끌고 운구했다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석달만에 시신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이전인은 적소에서 회재가 쓴 진수팔규를 임금에게 올리고 강계에서 저술한 글과 행적을 들고 예안으로 퇴계를 찾아가서 아버지 학문을 질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퇴계는 회재보다 아홉 살 연하로 회재가 63년 생애 중 23년을 관직에 있었음에 비하여 퇴계는 70년 생애 중 10여년 남짓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같이 조우할 기회가 없이 먼발치에서 저런 분이 있는가 보다 하는 사이였다. 퇴계는 공부를 가르치고 존경했던 넷째 형 이해가 기묘사회 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할 생각보다는 학문에 몰두하여 건강까지 나빠진 상태였다. 마지못해 과거시험을 거쳐 관계에 나갔으나 기회있으면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성리학에 심취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퇴계의 학풍은 높아져 난세가 될수록 임금은 벼슬을 높여주고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종용했다. 퇴계를 흠모했던 명종은 화공을 시켜 도산서원의 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침실에 걸어둘 정도였다.
이와 비슷하게 회재는 조한보와의 논쟁에서 보듯이 28세 이전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둘 다 스승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한 셈이다. 입신양명 보다는 진리탐구에 역점을 둔 퇴계는 300명이 넘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인격완성과 진리탐구로 자아완성을 구현하려 했다.
반면 회재는 계속되는 관직생활에서 학문연마의 여유가 없어서였는지 제자가 없는 편이다.
퇴계가 회재를 인정하다.
처음 전인이 가져온 자료를 섭렵한 퇴계는 깜작 놀랐다. 자기가 그렇게 노심초사 궁구하는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서손자 이준에게 할아버지의 시문과 지문 등을 모두 가져오게 해서 면밀히 검토한 후 선생을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장문의 행장을 쓴다.
행장의 일부를 인용하면,
“불초한 나는 본래 함께 자리하여 뵌 적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탓에 이를 계기로 깊이 질문하여 발명(發明)한 바가 없었다. 십수년 이래 병으로 산속에서 지내는 동안 먼저 묻고 좀먹은 서책에서 엿본 적이 있는 듯 하였으나, 다만 의탁하여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런 뒤에야 한탄스럽게 선생의 사람됨을 떠올리며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말미에 이렇게 썼다. “병인(1566) 10월 을해에 후학(後學) 가성대부 전 공조 참판 진성(眞城) 이황은 삼가 행장을 쓴다”
후학이란 무슨 뜻인가. 선배 학자에 대하여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이라는데 후배 또는 제자라는 뜻 아닌가.
이로써 이언적은 일약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대접받으며 위대한 선현이 되었다.
옥산서원이 건립되다.
선생 사후 19년 선조 5년 경주 부윤 이제민이 향내 유림들의 건의를 받아 옥산서원이 건립된다. 이듬해 사액서원으로 지정되고, 고봉 기대승이 신도비를 짓고 영의정을 지낸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글을 쓰고 옥산서원 현판도 셨다. 양재역벽서사건에 같이 귀양 갔던 노수신은 불락문 무변루 등 당호 현판을 고쳐쓰게 했다.
1610년 동방오현에 오르고 문묘에 배향되니 이제 명실 상부한 회재 –퇴계의 영남학파의 대유가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문예의 르네상스를 주창할 때 예조로 하여금 옥산서원 도산서원에 제문을 손수 지어주며 제사를 봉행할 때도 도산서원보다 옥산서원을 앞순위 놓는 위상에 까지 달했다.
유교를 통한 이상사회를 이루고져 했던 선생의 업적이 고스란히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음은 어찌 자랑스럽지 않다 할 것인가.
<제 2편에서 스토리텔링 계속>
<참고문헌>
이언적(김교빈, 성균관대학교)
을사사화(한국인물연구원, 타오름)
조선의 2인자들(조민기,책비)
조선의 권력자들(조민기,책비)
회재선생의 생애와 사상(여강이씨대종회)
회재선생과 옥산서원(위덕대 양동문화연구소 )
노컷조선왕조실록(김남,어젠다)
역사에 길을 묻다(이덕일,이학사)
퇴계처럼(김병일,글항아리)
퇴계의 사람공부(이광호,홍익출판사)
첫댓글 유승 선배님 방급 접했습니다.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잘 일고 갑니다 마음이 찐 하네요 감사 합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