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旅情)〈1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우리들 귀에 무척 익은 말이다. 개인적으로 유년시절
이맘때쯤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가까운 유원지에서 엄마또래 동네
중년 아낙들이 힘든 보릿고개도 마다하고 치마저고리로 단장을 하고
화려한 연분홍 벚꽃나무 아래서 구성진 장고장단에 맞추어 검게 그을린
두 볼이 시뻘게지도록 목청을 높이며 부르던 ‘노래 가락 차차차’란
노래 속에 등장하는 주제 단어이기도하다.“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
늙어 지며는 못 노나니 /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 얼시구 절시구 차차차(차차차) /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차차차) / 화란춘성(花爛春盛 : 꽃이 만발한 한창 때의 봄) 만화방창
(萬化方暢 :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흐드러짐) /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 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라는 가사내용의 이 노래는
구전되어오던 우리 민요를 다듬어 1962년 아세아 레코드사에서
민요가수 황정자씨가 최초로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끊이질 않고 불리어지는 노래입니다.
산업화시절 열심히 일해야 할 시기에 놀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가사로 바꾸어 불리어지다 5공화국 시절은 금지곡으로
분류되어 우리 곁을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 노래이기도합니다.
이렇게 수난을 겪으면서도 한때는 일에 중독되어 일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에게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노래이며 어린 시절 어머님의
고된 노동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된 노래입니다. 갑자기 이 노래가
불현듯 생각난 연유는 우여곡절을 겪은 이 노래의 과거사 때문도
아니고 부모님들의 애환 때문도 아니며. 지금 이 시기 우리들 주변에서
전개되는 상황들이 이 노래가 담고 있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내용과 너무도 똑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며칠 전 화사한 벚꽃이 얄밉게도 때마침 불어 닥친 비바람에 십일홍이
(十日紅) 무색할 정도로 삼일홍(三日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말과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는데 십년을 함께하는 권력이 없다는 말처럼 한때 최고의 권력자였던
대통령이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죄인의 나락에 떨어져 있어
이구동성으로 권불십년을 이야기하며 다들 권력의 무상함을 절절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상한 권력을 바라보면서도 한쪽에선
6월에 벌어질 한판 권력다툼을 놓고 벌써부터 부산합니다.
권력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마치 아편과도 같아 그것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꼴을 당할지라도 권력 앞에서는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
정치판의 습벽과도 같은 것입니다. 권력은 또한 꽃을 닮아 필적에는
화사하고 아름답지만 떨어질 때는 악취를 풍기고 추한법입니다.
그렇다고 꽃이 지고 권력이 사라진다고 가만히 앉아 비바람을 탓하고
민심을 탓할 수만은 더더욱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권력의 속성이 이러할진대 우리조국의 정치판은
특이하다 못해 해괴하다고 해야 어울리는 표현 같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즐거움도 영원한 괴로움도 없는데 우리네 정치판은
꽃이 한번 피면 언젠가 그 꽃이 떨어져 자신의 곁을 떠나는 사실을
부정하고 마치 영원한것인양 권력을 향유하려합니다.
그래서 저승 문 앞에서도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저승에 가서도 현실정치에 끼어들까봐 후손들이 무덤
주변에 도래솔을 심어 이승을 가리고 병풍으로 영정을 가렸나 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네 정치판은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기초적 소양과 지식을 갖추도록 마치 운전면허증과 같은 자격증을
발급하여 정치 면허증을 취득한자만이 민심을 대변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한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 땅의 정치인들이 꽃의 화려함에 취해 눈이
멀고 귀가 멀어 향기를 잃어버린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러한 조바심 때문인지 나는 오늘도 한때는 교단에서 파랑새를 키우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부여안고 접시꽃 당신을 부르짖고 배롱나무 꽃이
백일동안 피어있지 않고 수없이 떨어지고 또 다른 꽃이 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린 도종환 시인이 어느 날 시(詩)가 아닌 지엄한 의관을
갖추어 입고 정치 여정에 나선 그를 바라보며 우리들의 갑장(甲長)
이라는 동료애를 떠나 꽃의 화려함에 취하지 말고 날마다 두 눈
부릅뜨고 열심히 익히면서 한편으로 매일같이 새롭게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하여 자신을 다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그렇게 하여
진정한 향기를 노래하던 지난날의 고매한 성품을 간직 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수원지 벚꽃장)
오늘도 모진 비바람에 꽃비가 내립니다.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조지훈 시인의 낙화(落花)를 읊조려봅니다. “꽃이 지기로소니 /
바람을 탓하랴 / 주렴 밖에 성긴 별이 / 하나 둘 스러지고 / 귀촉도
울음 뒤에 / 머언 산이 다가서다. / 촛불을 꺼야하리 / 꽃이 지는데 /
꽃 지는 그림자 / 뜰에 어리어 / 하얀 미닫이가 / 우련 붉어라 /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상실의 시기에 원숙한
시인의 고풍스런 시어(詩語)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꽃이 피고
또 떨어지는 대자연의 섭리(攝理)앞에 시인은 꽃이 지는 슬픔에 밤을
지새우며 미닫이 창호지 문에 어리는 마지막 꽃 그림자까지 어루만지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이치(理致)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 쌍둥이라 일컫는 베트남에
재미있는 재단사에 대한 민화(民話)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좌에 오른 사람이 양복을 맞추기 위해 양복점엘 갔는데 치수를 재던
재단사가‘ 감투를 쓰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고 묻자 질문에 의아해
하는 권력가에게 재단사가 말하기를 ‘처음 감투를 쓴 사람은 가슴을
앞으로 힘껏 내밀고 고개를 잔뜩 치켜들지요. 그래서 상의 앞쪽을 뒤쪽
보다 길게 만들어야 합니다. 얼마쯤 지나면 내밀었던 가슴이 들어가고
앞을 똑바로 보게 됩니다. 그때는 앞뒤 길이를 똑같이 만들어야 하지요.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가슴은 편안히 두고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살피게 됩니다. 그때는 상의 뒤쪽을 더 길게 만들어야 몸에 맞게
된답니다.’고 하여 권력의 속성을 잘 대변하는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권좌에 앉아있는 내내 고개를 치켜세우고 사는 것도
모자라 저승길에 까지 고개를 치켜세우고 가는 자들이 아직도 많아
베트남 보다 통일이 늦은가봅니다.
권세는 꿈과 같고 인생은 덧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는 꽃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뒤돌아서면 밝혀질 진실을 외면하고
국민들을 우롱하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들에
의해 재현되는 오욕(汚辱)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