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종교와 식물
구약성서에 의하면, 신이 대홍수를 일으키기 전에 노아의 방주에 태울 생물들을 일일이 지정해주었다고 한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노아가 신의 명령에 따라 정결한 짐승과 새는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방주에 넣은 덕분에 대홍수가 끝난 후 종족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식물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구약성서의 기자는 식물을 동물과 대등하게 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했던 것 같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식물들은 홍수에 파괴되거나 다른 무생물들과 같이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가 대부분 죽고 극히 일부만이 용케 살아남았을 것이다. 식물은 너무 하찮은 존재라서 굳이 돌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식물에 대한 궁금증은 구약성서를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금세 해결된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방주가 서서히 땅 위에 내려앉자 노아는 비둘기를 한 마리 날려보내 세상 소식을 가져오게 한다. 바깥 세상은 모두 메말라 있었을까? 근처에 연못이나 호수는 없었을까? 사람과 동물이 살 만했을까? 비둘기는 부리에 올리브 가지 하나를 물고 돌아왔는데, 이는 물 위로 땅이 일부 드러나 생명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노아는 지구상에 식물이 없으면 생명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잠시 후 방주가 아라랏 산에 상륙하면서 비둘기가 가져온 소식은 사실로 밝혀진다. 노아는 방주에서 내려 동물들을 풀어주고 나서는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임무를 완수한 노아가 다음으로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놀랍게도 포도나무를 심는다. 그렇다면 포도나무 묘목은 어디서 구한 것일까?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노아는 포도나무의 유용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에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독자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렇듯 구약성서 전반에는 '식물은 살아 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창세기의 기자는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생명과 부활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식물의 전반적인 중요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통틀어 아브라함 종교라고 부르는데, 이 세 가지 종교들은 모두 은연중에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나 기타 살아 있는 피조물을 묘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이슬람 예술에서는 식물과 꽃을 열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꽃문양은 이슬람 예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을 정도다. 이는 이슬람교가 은연중에 '식물은 생물이 아니라는' 믿음을 지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만약 식물을 생물로 인정한다면 식물이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을 읽어보면 그 어디에서도 '동물을 묘사하지 말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동물의 묘사를 금하는 관행은 하디스에서 유래한다. (하디스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언행이 기록된 책으로, 이슬람법 해석의 기준으로 간주된다. 하디스에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모든 것은 알라에게서 나오고 모든 것이 곧 알라다"라고 씌어 있는데, 여기서 '모든 것'에 식물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과 식물 간의 관계에 대한 아브라함 종교의 태도는 매우 헷갈린다. 예컨대 유대교의 경우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필요한 벌채를 금하고 나무 심는 절기 튜비슈밧을 지킨다. 이와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양면성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식물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이 지구상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이율배반적인 심리 말이다.
모든 종교가 식물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은 식물을 영물로 여겨 부족의 의식에 사용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식물 또는 그 일부분을 신성시하는 데 반해, 어떤 종교에서는 혐오하거나 심지어 악마로 여기기까지 한다. 예컨대 15~17세기의 가톨릭 종교재판에서는 '마법'에 사용된다는 이유로 마늘, 파슬리, 회향과 같은 식물들이 마녀재판의 증거물로 채택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향정신성 효과를 갖는 식물들은 재배가 금지되거나 특별한 규제를 받는다.
매혹하는 식물의 뇌 중에서
스테파노 만쿠소•알레산드라 비올라 지음
양병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