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8(금) 색다른 투어 cafe의 아침편지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 쳐 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 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길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道)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에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 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참 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이야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 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 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 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 됨이나 그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壽衣)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글 : 유안진 -
유안진(柳岸津, 1941~ )
경상북도 안동출신, 문학작가, 시인으로 1998년 <세한도 가는길>로 제10회 정지용문학상, 2000년 <봄비 한 주머니>로 제35회 월탄문학상, 2009년 <성병에 걸리다>로 제7회 유심작품상, 2009년 <거짓말로 참말하기>로 제4회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1976년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달>, <위로>가 실리며 등단,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간했다. 이향아·신달자와 함께 펴낸 <지란지교를 꿈꾸며>로 큰 인기를 얻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여성의 삶을 깊이 응시하는 시, 자연의 이치를 통찰하는 시를 많이 썼다.
작품 해설(지란지교를 꿈꾸며)
수필. 이 글은 ‘친구’를 제재로, 작자의 모든 결점을 무난하게 받아 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나타낸 글이다. 작자는 자신의 흉허물을 무난하게 받아 줄 수 있고 아무 때나 찾아가도 편안한 친구, 맑은 강물과 같은 인품을 가지고 예술과 인생을 아는 친구 한두 사람과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주변에서, 가까운 곳에 늘 존재하고 있는 ‘친구’를 통해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하는 글로, 작자의 인간관과 우정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 회상(어제의 이야기)
지난밤 한울타리 회합을 마치고 야심한 밤 거하게 취해 버스로 귀가를 했기에 오늘 아침에는 일찍 시내버스로 출근을 서둘렀습니다. 출근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볐습니다. 새검정을 지나 광화문까지는 등교하는 학생들까지 겹쳐 시내버스에 내내 서있다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야 좌석에 앉을 수 있었지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내전경을 스마트폰에 담아 보았습니다. 남대문과 서울역 앞에서 엄청 차량이 밀렸고, 차창밖에 보이는 출근길 직장인들이 갑짜기 쌀쌀해진 날씨 탓으로 오버깃을 높이고 걷는 바쁜 모습이 이채로웠습니다. 서울역을 지나서야 뻥~하고 길이 뚫려 아슬 아슬하게 지각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자 마자 전화 멧세지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큰 이모님(처형)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곤, 작은 이모부와 함께 서둘러 강릉을 가기위해 일단 집으로 향했고, 평창동과 은평타운에서 집사람과 작은 이모와 함께 송추 IC를 경유하여 중부고속도를 내달렸습니다. 언니의 죽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두자매는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다함께 승용차 안에서 큰 이모님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횡성 휴게소에서 처음 잠시 쉬면서 뒤늦게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휴게소는 오전이라 비교적 한가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잘 꾸며진 휴게소의 내부를 잠시 둘러 보았습니다. 늘 고향으로 갈때면 이곳 휴게소에서 그냥 화장실만 들렸다 곧 떠나기만 했었는데, 아침식사를 겸하다보니 잠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휴게소 내부에는 횡성을 소개하는 횡상 한우, 안흥찐빵, 산더덕, 그리고 횡성 쌀을 소개하는 안내 조형물이 특이하고 이뻐서 스마트폰에 담아 보았습니다.
강릉 갈바리아병원 호스피스 병동 입구의 성모님 상 앞의 전경입니다.
강릉 갈바리에 병원에 계신 이모님을 뵙고 다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의식은 없으셨지만 다행히 절박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안도했습니다. 오늘 저녁 늦은 시각에 처형의 큰 아들이 일본에서 달려올 것이고 또 사흘 후에는 멀리 호주에 있는 둘째 아들이 달려올 것이기에 그때까지만이라도 견디어 주실 것을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이곳 갈바리아병원은 국내 최초의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는 곳으로 원장 수녀님께서는 저와는 코흘리던 어린시절부터의 친구였고, 자원봉사해 주는 사무장은 고향의 죽마고우였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처녀시절 우리 마나님께서도 이곳 병원에서 간호사로 재직한 곳이라 더욱 정감이 가는 곳이라 병원 정원뜰을 돌며 옛날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저녁 나절에는 처가집 온 식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지난 12월 5일 딸아이의 혼사에 많은 도움을 주신 처가집 가족분들을 위해 저녁만찬은 큰 처남이 자기 나우바리라며 말렸지만 내가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이모님이 아프신데 우리만 만찬을 즐기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착한 우리 처형은 오히려 온 가족이 모인것을 기뻐해 주실 것으로 믿으며 우리 가족들은 옛날의 아름다웠던 이야기 꽃을 피워보았습니다. 이모님의 병상은 멀리 호주에서 달려온 둘째 며느리가 지키고 있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 오늘의 일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