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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신잡을 이조 참판으로, 유희림(柳希霖)ㆍ홍진(洪進)ㆍ민준(閔濬)을 승지로 삼았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 이하 여러 장수 20여 인과 군사 1천여 인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고수하고 벽제(碧蹄) 등에 매복을 설치하여 많은 적을 죽였습니다. 이양원(李陽元)도 이일(李鎰)ㆍ신각(申恪) 이하 장수들 10여 인과 군사 5천 여 인을 거느리고 대탄(大灘)에 주둔하여 진격을 도모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니,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상하가 모두 즐거워하면서 머지 않아 임금이 환궁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 조정에서 이르기를, “백관들 중 서울을 떠날 때에 뒤떨어진 자를 전부 처벌할 수는 없지만, 도총부 위장(都摠部衛將)ㆍ금부 등의 관원은 다른 한가한 아문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모두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 각자 힘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 13일 이항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와서 발에 종기가 나고 기운이 피로하여 그 세력이 이미 꺾이었으니, 원수에게 명하시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공격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때에 여러 장관도 모두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이미 꺾였으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하므로,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어 김명원(金命元)에게 거듭 지시를 내려 적을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 태도를 책망하였다.
○ 이성임(李聖任)을 순찰부사로 삼아 강변의 토병(土兵) 중에 돌아온 자를 거느리고서, 전선으로 가서 참찬 한응인의 군무(軍務)를 돕게 하였다. 이에 앞서 이성임이 왜적의 난리를 듣고는 조정에 자청하여 몸소 영남에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조정에 한응인(韓應寅)을 도와 적을 토벌하겠다고 자청하였으므로 보낸 것이다.
○ 14일 상이 한응인에게 타이르기를, “이제 적의 세력이 꺾이었는데도 도원수 김명원이 여태껏 아무일도 하지 않으니, 경은 하루 속히 적을 토벌해야 할 것이요. 앉아서 김명원의 지시만 기다리다가 승전의 기회를 상실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이산해는 성질이 사악하고 음흉하여 궁궐과 내통하고, 김공량(金公諒)과 표리가 되어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불러들였습니다. 또 서울을 떠나던 날에도 임금께 그치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청하옵건대 외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3일 만에 윤허가 내려서 평해군(平海郡)으로 귀양갔다.
○ 삼사가 또 김공량의 죄를 논의하기를, “녹이나 축내는 천한 종의 무리로서 궁중의 세력을 빙자, 권세 있는 무리와 결탁하여 조정을 어지럽게 하고 선비들의 진퇴가 그의 수중에서 좌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원한을 사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바라건대 참수하여 온 나라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망할지언정 어찌 한 사람이라도 그릇되게 죽일 수 있겠느냐.”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 이덕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명을 받고 죽산(竹山)까지 갔다가 신립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역관만 왜적의 진영으로 들여보냈더니, 오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부득이 되돌아왔습니다.” 하였다. 또 윤두수(尹斗壽)에게 말하기를, “이제 인심이 이반되어 공공연히 위를 원망하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이런 판국에는 아무 일도 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별도로 인심을 위로하는 조치가 있어야만 다소라도 희망이 있을 것 같소.” 하니, 윤두수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이덕형은 망연히 무엇을 실수한 듯 얼굴이 붉어져 물러갔다.
○ 대사간 김찬(金瓚), 부제학 홍인상(洪麟祥), 집의 권협(權悏), 종묘영(宗廟令) 권희(權憘), 이조 정랑 박동현(朴東賢), 봉교 강수준(姜秀俊),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등이 앞뒤로 상소하기를, “부모들이 계시는 곳에 적이 들어와서 인민을 살해하였으니, 귀성(歸省)하고자 하옵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소하여 귀향을 원하는 자가 어지러이 그치지 아니하니, 조정에서는 아뢰기를, “임금과 어버이는 일체인데, 만일 모두 귀성을 하게 되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하겠습니까. 일체 승낙하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하직(下直)을 고하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이 아뢰기를, “조정의 소식이 끊어지니 모두들 임의로 거취(去就)를 하오나 신은 본성(本城)을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대가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글을 보고 한편 슬퍼하고 한편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한효순을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 정곤수(鄭崑壽)를 대사간으로, 심충겸(沈忠謙)을 부제학으로, 이정립(李廷立)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 인성부원군 정철(鄭澈)이 와서 아뢰기를, “명을 받은 뒤로 즉시 떠나려 하였더니, 부사(府使) 홍세공(洪世恭)이 의금부의 공문이 도착하지 아니하였으니, 임금님의 분부가 계시는 것만으로 갑자기 출발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여 지금에야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아뢰기를, “8도가 전쟁의 도탄에 빠져 있으므로 일일이 관원을 차출하여 보낼 수 없으니, 과거의 예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여, 드디어 각도의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 경상좌도 병사 이각(李珏)이 본도에서 이탈하여 임진강의 진중에 나타나므로,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그의 목을 베어 조리돌렸다.
○ 대가가 평양에 도착한 뒤로 조정에서, 서울을 떠날 때에 위에서 비록 죄 있는 자를 사면하라는 교서가 있었으나 확실한 명령이 없으므로 감히 시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명단을 작성하여 아뢰었더니, 역적에 연좌되어 귀양간 자도 모두 석방되었다. 그런데 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咸)ㆍ장운익(張雲翼)ㆍ유공진(柳拱辰)ㆍ이춘영(李春英) 등은 석방되지 않았다. 삭탈관직을 당한 자도 모두 탕척(蕩滌)되었으되, 박점(朴漸)만이 남아 있었다. 수일 후에는 홍성민 이하도 모두 사면되어 다시 서용받게 되었다.
○ 16일 임진강에 포진하고 있던 적이 일시에 진영을 태워버리고 철수해가는 시늉을 하는지라,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치계하기를, “이들 적은 세력이 고립되고 힘이 피곤하여 진을 태워버리고 도망가려는 형상이 현저하니,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여 추격하도록 하소서.” 하고, 조정에서도 그럴 듯하게 생각하여 마침내 한응인(韓應寅) 등에게 추격하라고 재촉하였다.
○ 17일 한응인이 전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신할(申硈)이 좌군을 거느리고 먼저 적진을 공격하니, 나무하던 적이 보고는 달아났다. 김명원(金命元) 이하가 멀리 바라보고 모두 아군이 승리하여 나아간다 하고, 검찰사 박충간(朴忠侃)과 독진관(督陣官) 홍봉상(洪鳳祥)은, 우리 군사가 반드시 이긴다 하여 환호하며 날뛰었다. 홍봉상은 즉시 강을 건너 군사를 독려하는데 잠시 후에 7ㆍ8명의 적이 알몸으로 칼을 휘두르면서 나와 아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좌ㆍ우군이 일시에 크게 무너져 신할 이하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면서 모두 강에 빠져 죽고, 홍봉상도 죽었다. 이때에 김명원과 한응인ㆍ박충간이 모두 푸른 천의 옷을 입었다. 박충간은 일이 틀린 것을 보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강 위에 있던 군사가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일시에 소리치기를, “원수가 달아난다.” 하면서, 뿔뿔히 달아났다. 김명원과 한응인은 몸소 나와 외치기를, “내가 여기에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 하니, 비로소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남은 군사는 겨우 천 명 정도였다.
○ 19일 보고를 접하자 상하가 크게 놀랐다. 재기의 가망이 없어서 드디어 강변 토병(土兵) 중에서 동원되지 않은 자를 징발하여 모두 군에 편입시켰다. 전 첨사 박석명(朴錫命)이 용맹이 있어 명령을 받고 전투에 나갈 때 조정이 적을 사로잡는 방책을 물었다. 박석명이 대답하기를, “나는 화살 한 발에 적 5ㆍ6명을 사살할 수 있으며, 화살 한 단이면 1백여 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단지 마음에 흐뭇한 일이 있은 뒤에야만 나의 용맹을 다할 수 있소.”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이 반드시 실효가 없을 줄을 알면서도 당상으로 승진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절충장군으로 뛰어올려 제수하여 보냈다.
○ 조정에서는 적의 형세를 알 길이 없을 뿐더러 또한 대응책이 없다 하여, 마침내 선전관 이호의(李好誼)ㆍ김계현(金繼賢)을 시켜 서울에 가서 염탐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각(申恪)이 주장(主將)의 명령을 어기고 불러도 오지 않는다.” 하니, 조정에서는 베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선전관을 보냈다. 오후에 신각이 해유령(蟹踰嶺)에서 싸워 70여 명의 적을 죽였다. 승전의 보고를 접하자 상은 그의 사면을 명하였다. 그러나 명령이 도착했을 때에는 머리가 이미 진 앞에 매달려 있었다.
○ 대사헌 이항복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오늘의 적은 우리 나라만의 적이 아니니, 속히 천조(天朝)에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이제 아군이 임진강을 지키고 있으니 방어를 할 수 있으며, 조정에서는 사람을 하삼도(下三道)에 보냈으니 반드시 군사가 많이 올 것이요, 북도의 병력도 오래잖아 모일 것입니다. 대군이 모이면 대책이 나올 것입니다. 하물며 천조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준다는 것도 꼭 기약할 수 없으며, 상국(上國)의 군사가 일단 우리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의 난처한 걱정거리가 이보다 만 배나 더할 것이니, 어찌 이 일을 경솔히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이항복이 물러갔다.
○ 관전보(寬奠堡)의 총병(摠兵)이 의주 목사 황진(黃璡)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적의 침범을 당하였으니 상국으로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 본인이 며칠 안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널 터이니, 당신은 그 뜻을 신속히 임금께 아뢰오.” 하니, 황진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비록 갑자기 병화를 입어 온 나라가 흔들렸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군사가 능히 적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대인(大人)에게 구원을 청하여 괴로움을 끼치게 하겠소.” 하자, 총병은 웃으며 돌아갔다.
황진은 이 일을 자세히 아뢰니, 상은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천조에서 구원병을 보내려 하는데, 황진이 무슨 군사가 있어 그런 말을 하여 저지하였단 말이냐?” 하고, 체포하여 국문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황진이 명령을 듣지 못했으니, 대관(大官) 1명을 보내 상황을 보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좌승지 유근(柳根)을 추천하므로, 상은 그를 이조 참판으로 제수하여 보냈다.
○ 남도 병사(南道兵使) 이혼(李渾)이 적병이 서울에 육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연천(漣川)으로 와서 이양원(李陽元)과 군사를 합하고, 그 곡절을 자세히 임금께 아뢰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치사하였다. 적이 변방을 침범하던 초기에 조정에서는 공문을 요동(遼東)에 보냈는데, 그 후 정신이 없어 계속 보고를 보내지 못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도착하자, 통역관만 보내 대충 긴박한 사태만을 보고하였더니, 이때에 요동대인(遼東大人 관전보 총병의 존칭)이 의주에 힐책하여 물어 왔던 것이다. 상이 또 유근(柳根)을 명하여 전후 곡절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 조정에서는 강계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쓸 만한 재질이 있다 하여 불러서 승지를 제수하였다.
○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자기 어머니가 토적(土賊)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항복으로 대체하고, 이덕형(李德馨)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 27일 적이 임진 하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로 강을 건널 듯이 하면서 아군을 시험하였다. 부원수 이빈(李薲)이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먼저 도망가서 상하 모든 군사가 일시에 크게 무너졌다. 이양원 등은 적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북도로 달아났다.
○ 29일 보고를 접하자, 상은 구사맹(具思孟)ㆍ신잡(申磼)ㆍ구성(具宬)에게 명하여 신성군(信成君)ㆍ정원군(定遠君)을 배행하여 영월군(寧越郡)으로 가게 하였다.
○ 이때에 조정에서는 임진강의 군사가 능히 적을 방어하리라 생각하여 다시 방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평안 감사 송언신(宋言愼)과 병사 이윤덕(李潤德)은 사람의 안색이 없이 모두 정신이 나가서 미투리를 신고 떠났다.
○ 조정에서는, 북도로 들어갔던 적이 양덕(陽德) 등처로 돌아 배후로 나오게 되면, 더욱 적을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홍여순(洪汝諄)을 순찰사로 삼아 양덕으로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홍여순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신을 순찰사로 삼고 한 명의 병졸도 주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는 신을 죽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일체를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이윤덕이 거느린 군사 절반을 주고, 또 대동역마(大同驛馬)를 내어주어 전쟁의 용도로 쓰게 하였다. 윤두수가 말하기를, “홍여순이 이같이 함은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 서장관 민몽룡(閔夢龍)이 조정을 하직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떠날 적에, 방물(方物)은 모두 버리고 표문(表文)만 가져왔다. 조정에서는 비록 방물은 없더라도 때에 맞추어 중국 서울로 가야 된다 하여 마침내 그들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