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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유족회조직배경 (제4편)▶
1.이승만정권의 붕괴와 4.19민주혁명
철옹성 (鐵甕城) 같았던 이승만정권도, 국민위에 군림하였던 독재의 화신(化身) 이승만도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4.19 민주혁명으로 벼락을맞아 이승만호는 침몰되고 말았다.
4·19 혁명(四一九革命)
1960년 4월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기붕을 부통령 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1960년2월28일 대구를 시작으로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마산 3.15의거에 참여한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4월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위는 4월18일 서울종로 4월19일 서울,부산,광주,대전,전주,청주,인천 4월20일에는 대구,광주,인천,수원,이리등 전국적으로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 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4.19혁명의 동력이되었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85세의 이승만은자유당 당적만 포기하고 대통령직을 고수하려고 발버둥쳐보았지만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사퇴압박으로 4월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12년동안 무소불위(無所不爲)의독재의 칼자루를 휘둘러댔던 이승만독재정권은 막을 내리고말았다.
이승만은 하야(下野 )성명을 발표하고도 4월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끊질기게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老)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 (許政)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자가당착(自家撞着)도 유분수(有分數)였다.
이대통령을 찾은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
4월 26일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요담 중인 모습이다. 이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 대통령은 사임했다.
한마디로 인면수심(人面獸心) 철면피(鐵面皮)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이모습이 일부 몰지각한 양반네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경종을 울려주고싶은 이승만의 추한 모습이라는것을 전하여주라.
이 위대한 민주혁명의 승리에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국회는 3ㆍ15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개헌과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 수습안을 제시하였다. 국립방송은 '해방의 노래'를 방송하며 4월혁명을 힘찬 어조로 찬양하였고, 시인들은 민주혁명의 승리를 노래했으며, 온 나라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떳다.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들과 노동조합의 어용간부, 발포 책임자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4.19시인 신동엽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申東曄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 아침 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외경을 / 알리라 // 아침 저녁 /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연민(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조심 / 마음 아모리며, // 서럽게 / 아, 엄숙한 세상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19 혁명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
4월23일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 (許政)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 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자유당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연설 발표 당일 오후 4시에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 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통령 장면이 그보다 하루 먼저 사퇴하였으므로 궐위 중인 부통령과 총리를 대신해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 강석의 아버지
한편 양주(楊州)로 도주했던 이기붕일가는 4월27일에 몰래 경무대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성난 민심은 이기붕 일가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미래의 권력자로 이승만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들과 노동조합의 어용간부, 발포 책임자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탈출하는 모습
이승만은 다음날 5월29일 아무도 몰래 비밀리에 화와이로 탈출 했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1965년 7월19일 9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로써 백만명이상의 만간인을 학살하였고 자신의 정적을 비롯하여 수많은 항일 애국자들괴 양심적인 지식인 노동자를 살륙한 희대의 독재자요 살인마였던 이승만도 저승사자의 부름을 거역할수는 없었다.
그는 죽어서도 미국잡귀(雜鬼)들과 喜喜樂樂(희희낙락)할것이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1960.4.26.김수영)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제 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1960년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켰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였으나, 결국 4월 26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나와 혜화동의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에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감동을 분노한 국민과함께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1960.4.26.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 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단체에서 ○○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가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 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 놈의 속을 창자 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 말도 다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 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衛兵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 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덴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
<1960. 4. 26. 이른 아침>
김수영은 다시 말했다. 민주주의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자유는 이제 상식이 됐다고. 그리고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고, 아무도 잡아갈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됐다고 외쳤다. 그리고 혁명이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그는 ‘가다오 나가다오’라는 시를 통해 미국과 소련에게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라고 마음껏 외쳤다.
이승만의 동상이 남산에서 철거되었다.
4,19혁명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불러일으켰다.당시 통계에 의하면 사망 333명. 부상자 1,729명이 집계되었으며 이중에서 272위의 혁명열사가 수유리 4,19기념공원에 안장되었고 오늘도 말없이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4,19혁명은 민심이고 천심이었다.한국전쟁전후를 통하여이승만살인정권으로부터 조부모형제를 잃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하였던 백만피학살자 유족들의 눈에서 참았던눈물이 피눈물이 되어 철철흘러내리고있었다.
아! 살았구나 이제 숨을 쉬어보자꾸나하는 꿈틀거림이 이곳저곳에서 울려퍼져나오고있었다.
2.제2공화국의 탄생
1960년 6월15일부터1961년 5월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6.15개헌에 의해 설립된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대통령은 윤보선, 국무총리는 장면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 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3.15부정선거의 주모자와4.19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1960년 10월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0월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31일에는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정부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였다.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장면국무총리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1960년 5월31일 국회양민학살사건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조사를 시작하면서 유족들에게 자발적으로 신청을받기 시작하였다.현재 경상남도.전라남북도를 제외한 경상북도와 제주도지역만 남아있으며 경북과 제주지역에서 신고한 7.000영장이남아있어 사라진 지역의 민간인 학살의 숫자는 상상하기도 힘들것이다.이자료는 국가기록원에 보존되어있다. 과연 신고된 민간인 학살신고서는 누구에 의해서 은폐되고 사라진 것일까?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이승만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1961년 5월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당시의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3.전국피학살자 유족회 조직배경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물러나자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유족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기를 틈타 사회불안 요소 제거 차원에서 재판도 없이 산골짜기에서 총살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한 사람은 최소 수십만 명에서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피학살자 유족들은 10여 년간 공포정치에 억눌려 피해 사실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그제서야 각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다. 4·19 직후 경상도에서 먼저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그해 10월 20일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회의실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명이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기록차원에서 선언문 전문과 사진을 여기 남겨둔다. 한자로 된 글은 한글로 옮겼다. 맞춤법도 지금에 맞춰 고쳤다.
전국피학살자 유족회 선언문
전국피학살자유족회는 이승만폭정배가 저리른바 세계 인류 사상에 일찌기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대량적 동족학살행위에
희생이 된 훤혼의 유족들로서 조직된 피의 통합체입니다. 우리들은 지난날의 이 처참한 역사적 사실을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거니와 천추일관하는
민족정기와 인류망상의 도리로도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유족회는 어떤 보복적 의도로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오직 인간세상에 기막한 한을 남겨두고 무덤도 없는 원혼이 된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 남편 처자들의 명복을 빌며 이 땅에 또다시 이러한 '검은 역사의 무덤'을 만들지 않도록 거듭
투쟁할뿐입니다.
폭악하게도 반 공개리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것은 민주조국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동족의 대량학살인만큼 네기의
살인자 '히틀러'와는 그 유를 달리하는 공전절후의 악행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그 살해방법에 이르러서는 실로 천인공노할 진저리치는
양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 도당들은 도리어 이러한 살인을 보다 더 많이 한 자일수록 더 많은 훈상을 베풀었으며 우리들 유족에게는 모욕과 감시와
억압을 더욱 더 가중하여 우리들은 그동안 십유여년을 실로 죽음의 자유만을 가질 수 있는 동물 이하의 불행과 불안 속에서 신음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4.19 학생혁명에 의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조국의 역사과정에서 우리의 사무친 원한과 분노를 가시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들은 허물어진 생활과 마음의 폐허 위에 그래도 재생의 길을 찾아보려고 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숭고한 인간의 명예를 걸고 면면한 민족의 양심에 비추어 이 처참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리하고 처리하는 것이
조국의 민주발전에 이바지하는 경종이 되는 것으로 보는 바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10월 20일에 다음 6개항을 결의하고 이것을 3부에 건의요구하였사오며 사랑하는 전국동포들에게 알뜰한 성원을 바라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결 의 사 항
1. 법을 거치지 않고 살인을 지시한 자 및 관련자를 엄중처단하라.
2. 피학살자 명단 및 집행시일 장소를
명시하라.
3. 피학살자 유족에 대한 정치경찰의 감시를 즉시 해제하라.
4. 피학살자의 호적을 조속히 정리하라.
5. 피학살자
유족에게 국가의 형사보상금을 즉시 지급하라.
6. 위령제 및 위령비 건립에 당국은 책임지라.
좌기와 같은 사항을 결의함.
단기 4293년 10월 10일
전국피학살자유족회 결성대회
전국피학살자유족회 회장 노현섭
부회장 권오규 탁복수
간사장 이두용
총무간사 김영욱
조직간사
박인열
섭외간사 윤성식
부녀간사 최영진
학생간사 조성대
사업간사 미 정
사정위원장 이원식
사정위원 김영원
이삼근
중앙위원 신석균 김봉조 문대현 하은수 김영태 한범석 권중락 이용노 황화순 김기태 오용수 백덕용 이홍근 주정실 오음전 안귀남 이과란
이성오 박우승 김하종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하리
1960년10월20일
전국피학살자 유족회 창립총회에서
(제5편에서 계속됩니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기막힌 사연들이 많군요
점점 흥미 진진 하겠으비다 ??? 감사합니다
유족회의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어있습니다.참으로 소중한 역사의한가록입니다. 유족회가 탄생하기까지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겠습니까.진실은 감추어지는게 아니라는걸 깨달았습니다. 정론직필님 좋은 역사기록 담아서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론직필 기재해주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