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화가, 우성(宇城) 변시지(邊時志)
선대로부터 농지와 재산을 대물림 받은 변시지의 아버지는, 1928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돌담길을 조랑말처럼 뛰어놀던 변시지를 데리고 1931년 일본의 오사카로 이민을 갔다. 장남이 오사카에서 고무공장을 운영하여 가세가 풍족했던 시지는 힘이 장사라 초등학교 일학년 시절 교내 씨름시합에 나가 1,2,3학년생을 다 이기고 4학년생과 맞붙었다가 모래판에 박히면서 다리 관절을 다쳐 2개월 간 병원 신세를 진 결과로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전화위복인지 이 때문에 징집을 면제받고 오사카 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하였다.
형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당시에는 대가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모델을 구해 작품에 몰두한 그는 졸업 후 일본의 대표적인 공모전인 광풍회전(光風會展)에서 23세의 나이에 최고상을 수상한다. 이는 100년이 넘는 광풍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보통 입선과 특선 몇 차례를 거친 오십 줄이 들어서야 회원자격을 얻는 광풍회 회원에 그는 최연소 회원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그의 화풍이 일본인과 무언지 다르다는 비평을 받고부터 민족의식이 태동한 그는 조곡의 문화에 젖어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려 할 즈음, 서울대학교가 강의를 요청해오자, 1957년 영구 귀국하여 동양의 전통미를 소재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화단의 학맥과 인맥에 얽힌 반목과 갈등에 곧 서울대를 떠나 마포고등학교와 중앙대와 서라벌예대를 전전하다가, 마포고교 미술교사 시절에 서울대 미술대학 출신으로 동료교사인 이학숙과 결혼하여 안정을 찾았다. 그는 일본 시절의 작품이 서구미술의 흉내를 낸 것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에 한국의 화풍을 개척하고자 매일 고궁에 출근하며, 이때 함께 고궁에서 그림이 심취한 이들은 ‘비원파(秘苑派)’라 불렸다. 1960년대부터 70년 초까지의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고궁이었고, 세필로 그린 섬세한 당시의 그림은 일본의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무렵 화단에는 해외진출이 붐을 이루어 그도 해외로 발을 넓혀 볼까 했으나 마침 제주대학교가 초빙해오자 귀향하여 새 화풍에 도전하기로 하여 사십사 년 만에 낙향하여 제주와 일본과 서울을 오가던 순례를 마치고 가족을 서울에 둔 채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새로운 예술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에 그는 폭음에 빠지면서도 구도자적 자세로 화필은 놓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화풍을 버린 그는 1977년부터 장판지 색깔에 검은 먹선의 간결한 화풍의 태동을 시작으로, 제주의 빛과 의미를 발견한다.
간결한 생략법으로 검은 선으로 대상을 표현하면서 드로잉이 강화되어 대상 하나하나의 색깔은 의미를 잃었다. 일본시절과 비원시대를 거치는 몇 번의 작품의 변화를 통과하면서, 꾸부정한 허리의 사내와 조랑말이 바람 부는 언덕에 부대끼는 모습으로 그는 그만의 그림세계를 찾았다. 1980년 이탈리아의 아스트로라비아 화랑 초대전에 출품한 그는 외곽지대인 한국을 넘어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나의 그림에는 바람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것은 바람 부는 제주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며, 고독, 인내, 불안, 한과 기다림 등이 내가 자주 다루는 소재이다.’라 말한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그림은 바다는 격랑을 일으키고 소나무는 바람에 휩쓸리며, 까마귀는 바람 속을 맴돈다. 바다, 바람, 말과 인간이 주제인 그의 그림은 비애와 처절한 고독감이 녹아있으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수를 느낀다. 제주에 묻혀 작품에만 몰두하여 한 동안 국내 화단에서 멀어지기도 했으나, 이따금 매체를 통해 그의 작품을 접해온 나는 서귀포 시내의 그의 작업장소를 찾았으나 잠겨있어 기당미술관으로 차를 몰았다.

1987년 그의 외사촌으로 일본서 사업에 성공한 강구범 선생이 설립한 기당미술관은 삼매봉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 건립을 제안받자 건물은 기당이 맡고 소장 작품은 자신이 맡기로 하여 소장품을 수집하였으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개관 날 미술관을 서귀포시에 기증하고, 그는 명예관장으로 추대되었다. 소장품은 7백 여 점에 이르며 2층에는 그의 상설전시장을 마련하였다.
미술관입구에서 좌측으로 오르면 나산형의 동선을 따라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3번을 들러보며 눈의 호사를 즐기니 마음이 부자가 된다. 구차한 말이 필요 없는 것이 그림 감상이니 그의 작품 몇 점 올리는 것으로 벅찼던 감동을 대신하며, 그의 그림에서 시작한 바람은 동선을 따라 오름을 타고 세차지고 바닷가에 이르러 광풍이 된 변시지의 바람은, 2013년 6월에 귀천에도 멈추지 않고 오늘도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친다.
김영갑 갤러리
25세인 1982년부터 제주를 들락거리며 오름에 빠져들기 시작한 부여 사람 김영갑이 머리를 동여묵고 손수 물들인 갈옷 차림으로 제주에 정착한 것은 1985년. 서울을 떠나기 전의 인연을 모질게 끊고 처절할 만큼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키고 20년간 제주를 찍은 사진만 20 여만 장. ‘바라볼 때마다 구름이 매일 달랐다.’는 작가는 바다도 간혹 있지만 주로 숲과 오름을 렌즈에 담았다. 그것도 잡것을 배제한 오름 자체와 빛나는 갈대숲에는 바람이 불고 오름 한 가운데에는 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1999년에 루게릭이 발병하자, 근육이 풀어지는 것을 늦추고자 삐걱대는 몸으로 무거운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쳐 매고 오름으로 올라 광선과 기후변화에 맞추어 작품을 찍었으니 그의 사진은 기다림과 인내심의 산물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병명도 모른 채 의원을 전전하다가, 삼년 후에 확인된 불치병인 루게릭병이 그의 명을 재촉할 것이란 사실에 직면한다.

‘궁핍함에 길들여진 탓에, 바쁘고 번잡한 도회지에서는 누릴 수 없는 시간과 자유만큼은 넉넉하다.’던 그는 ‘이제 걱정, 필름 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으나,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가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필름 걱정, 끼니 걱정에 우울했던 그때를 그리워할 뿐이다. 그 때를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라고 자조하면서 ‘아직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날숨과 들숨이 자유로운 지금이 행복이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독백한다.

그를 알고 있는 지인들은 추천한 온갖 민간요법에도 의지해 보았다가 종래는 포기하고 2002년부터 폐교가 된 삼달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그의 갤러리를 준비에 전력한다.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으로 정하고 손수 정원을 조성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17회에 걸친 전시회를 갖고, 2004년에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출판 후, 2005년 5월에 사망, 화장되어 재는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드문드문 동백이 심겨져 운치 있는 약간 경사진 도로를 유턴하여 우회전 하면 주차장에 내려 갤러리로 들어가면, 양철로 만든 빨강 치마에 ‘먼 길을 찾아주어 감사합니다.’고 쓰진 치마를 걸친 소녀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멋스럽게 만든 입구의 동판으로 만든 문을 들어서면 제주 돌로 쌓아 철망을 씌운 야트막한 정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앉을 자리도 넉넉한 뜰은 한 겨울이라 대부분의 잎은 말라붙고 을씨년스런 날씨나 수국은 아직도 바이올렛과 잿빛 꽃이 시들었지만 남아있다. 허리 높이 정원 여기저기에는 그의 지인인 조각가 김숙자의 자그마한 토우(土偶)인형이 앉아 있고 하르방도 보인다. 카메라를 멘 하르방은 투병 중에도 끈임 없이 이 정원을 가꾼 김영갑 작가인 것 같다.

겨울나무 사이로 익살맞은 동상이 무리지어도 있고 때로는 혼자 명상에 잠겨있다. 김영갑의 영혼과 육체가 뿌려져 마음을 빼앗겼던 정원을 지나 그가 목숨 바쳐 필름에 담은 파노라마 제주를 보러 ‘KIM YONG GAP GALLERY DUMOAK' 써져있는 폐교의 교실 입구로 들어서면 좌측의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그의 작업실이었다가 지금은 유품전시관에는 많은 책과 카메라 뭉치가 보인다.
17번의 전시회를 하는 동안 그는 알려진 사진작가가 되었고,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카메라도 보냈다. 전시회가 열려 누가 작품 설명을 부탁하면, 그는 ‘설명할 수 있으면 글로 표현했을 것이다. 설명 할 수 없기에 사진으로 표현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새의 크기나 생김새를 설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숲에서 노래하고 지저귀는 분위기를 나는 사진으로 표현한다.’며 ‘나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사진이다.’라 주장한다.


전시실의 두 사진. 병에 지친 말년의 사진과 머리를 동여 맨 젊은 시절의 사진은 대비되어 슬프다. 크지 않은 단층 공간에 전시된 작품을 사진으로 올린다. 뒤뜰로 나가니 무인 카페도 있고 언덕으로 오르는 정원에는 조선 소나무 한 그루가 갤러리의 품위를 더하는데 방치된 것이 아쉽다. 김영갑은 저승에서도 제주의 오름을 거닐고 있는가? 바람을 맞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