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의 시
새해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意識은
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忠直과 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勞動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祈禱는 나의 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生涯,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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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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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造化) 속에서
울밑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가 피어 있다.
희고 연연한 몸매에
색색의 꽃술을 달고
저마다 간드러진 태를 짓고
서로 어깨를 떠밀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며 피어 있다.
하늘엔 수박달이 높이 걸리고
이슬이 젖어드는 이슥한 밤인데
막내딸 가슴의 브로우치만큼씩한
죄그만 나비들이 찾아 들어
꽃술 위를 하늘하늘 날고 있다.
노랑,
빨강,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를 옮겨 나르는 나비들!
이른 봄부터 밤마저 새워가며
그 수도 없이 날던 나비 떼들!
알록달록 채송화의 꽃물을 들이기에
저 미물(微物)들이 여러 천년을 거듭하는
억만(億萬)의 역사(役事)를 하였겠구나.
헛간 뒤 감나무의 진무른 홍시도
입추(立秋)전까지는 입이 부르트게 떫었으며
저 뒷동산의 밤송이도
가시를 곤두세워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만
알을 익혀 하강(下降)의 기름칠을 하고는
입을 제 스스로 벌렸다.
오오, 만물은 저마다
현신(現身)과 내일의 의미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지성(至誠)으로 도와
저렇듯 어울리며 사는데
사람인 나 홀로 이 밤
울타리에 썩어가는 말뚝이듯
아무것도 모르며 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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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강
강에 눈이 내린다.
내 가슴에 한가닥 온기만 남기고
가버리는 꿈결 속의 여인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이렇듯 단명한 것인가?
어떠한 진실을 고하려고
흰 눈은 소리도 없이 내려서
순식간에 물로 변신하는가?
나의 안에서 피고 스러진
억만의 사념들은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되었을까?
멀리서 기항지 잃은
뱃고동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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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遺言)
살아서는 못 누린
호사스런 葬禮일랑
아예 마련치 말라.
가마귀 떼 우짖어
날으는 어느 아침에
내 시체를 메어다
행길 마루에 버리고
오가는 길손들이
서낭당처럼
조약돌 한 개씩만
풀매케 하라.
墓碑도
碑銘도 다 싫고
어느 실없은 입설을 빌리어
"시시후의 손주 한 마리 이 땅에 귀향 살아 할비의 苦行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죽었느니라"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간곡히 전하여
모름지기 뒷날을
경계케 하라.
具常詩 全集 / 서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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