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중세철학의 실체논쟁
중세는 철학이 세계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최종적인 실체인 신에 대한 탐구에 집중한 시기였다.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변증(辨證)의 도구로서 출발하였다.
중세철학은 신을 내세워 우주의 본질과 만물 생성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지만, 그처럼 신이라는 최고의
일반성을 통해 세계의 모든 특수성을 설명하고자 한 철학체계의 핵심적인 문제는 실제로 그런지 증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후 근현대철학에서 중세철학의 무용성과 허무함이 집중적으로 질타 당하게 되었고,
그것이 현대철학에서 ‘명제의 검증가능성’이 철학의 중심주제로 대두된 배경이 된다.
중세 초대교회의 교부(敎父)들에 의해 기독교의 교의(敎儀)를 심도 있게 성찰하며 체계적으로 진술하는 신학
의 전통이 세워졌고, 그 과정에 그리스철학이 결합함으로써 그 깊은 흔적을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교의에 남기
게 된다.
1).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설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되는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불변하며, 감각으로 지각되는 물리적 세계 내 개개의 사물들은 완전한 이데아
의 불완전한 모사(模寫)에 지나지 않는다.
신플라톤주의는 이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더욱 세분화시켜 만물은
‘하나의 근원’에서 단계적으로 산출되고, 다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이 목적론철학의 결합의 산물이다.
플로니토스(Plotinos, 205?∼270)에 따르면 참된 실재이자 하나의 근원은 일자(一者, Hen)뿐이며, 일자의 ‘유출
(流出, Eranatio)’로 만물이 산출된다.
일자에서 지성인 누스(nous)가 유출되고, 그 다음으로 영혼인 프시케(psyche)가 유출되며, 마지막으로 물질의
세계인 현상계가 유출된다.
각 단계는 그보다 상위 단계의 모사이기 때문에 가장 상위에 있는 일자 안에서는 모든 단계가 발견된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육체에 담겨 있는 이성과 영혼을 잘 보존해야 한다.
이처럼 신플라톤주의는 '일자'와 '유출'이라는 개념으로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설명하였으며,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하였다.
'일자'와 '유출'을 ‘신’과 ‘창조’로 대체하면 기독교의 세계관과도 비슷한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교회의 초기 교부들이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만물의 본원인 ‘일자'를 중심으로 하위에
있는 것은 상위의 것을 모사 혹은 모방한다거나 상위의 단계로 나아가기위해 노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일자'와 합일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식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논리체계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혼입되는 계기가 된다.
2). 아우구스티누스
초대 그리스도교가 낳은 위대한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리스철학에서는 구약에서 가르치는 ‘무로부터의 창조론’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개념
이었다.
플라톤이 창조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근원이 되는 물질을 가상하고 신이 이에 대하여
이데아라는 형상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질료는 영원한 것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단지 형상만이 신에 의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조물주라기보다는 뛰어난 기술자요, 건축가라 하겠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신은 오직 질서와 정돈뿐만 아니라 물질까지도 창조하였
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신이 어떤 존재이고 실제로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였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그는 단지 "만일 우리가
신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신앙의 우위 속에 이성을 연결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체로 순수철학에 몰두한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제한된 범위의 순수
철학적 문제에 관한 한 놀라운 통찰을 발휘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철학에 대한 핵심적 기여는 <고백론> 11권에서 소개된 그의 ‘시간에 관한 성찰’에 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혹은 ‘만약에 구약의 창세기 1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에 의해 창조가 이루어졌다면 왜 세계는 좀 더 일찍 창조되지 않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그것은 보다 일찍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답변을 내놓
았다. 시간도 세계가 창조될 때 함께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시간과 공간을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라는 통합된 개념으로 생각하는 현대물리학의
시공간 개념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현대물리학의 시공간 개념에 의하면 우주 빅뱅으로 공간이 생겨날 때 비로소 시간도 공간과 함께 생겨난 것
이며, 따라서 빅뱅 이전에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3). 토마스 아퀴나스
한편 중세 유럽의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경험세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처럼 사물에서 질료와 형상을 구별하여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 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형상 또는 본질은 원래 신의 정신 안에 있던 이데아
로서, 흡사 “창조의 앞선 구상”으로서 존재한다.
만약에 신이 세상만물을 창조했다면 신은 어떤 사물을 창조하기에 앞서 어떤 질료에
어떤 형상을 부여할 것인지를 구상으로서 갖고 있었을 것이다.
‘보편논쟁’이란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에서 ‘보편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
적인 철학논쟁으로, 실재론(實在論:realism)이란 “사물의 참된 존재인 본질 또는 보편자는 사물에 앞서 존재
한다.”거나 “본질 혹은 보편자가 실재 안에 실체(實體)로서 존재한다.”라는 주장이고,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은 본질 혹은 보편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중세신학의 정통파들은 실재론자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실재론에 의하면,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공통된 실체에 우유성(偶有性)이 가해져서 개개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편논쟁’과 관련하여 ‘보편자는 실재이지만 사물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존재한다.’라는 ‘중용의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여, "보편은 개개 사물 이전에 존재하고(신적 이성 속에)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며(개개 사물의 보편으로서), 모든 사물 뒤에 존재한다(보편을 인지한 인간의 마음에 나타
나는 것으로서)"고 설명하였다.
즉 보편개념은 사물 이전에 신의 이성 속에 존재했다가 신의 창조행위로 인해 개개 사물의 보편으로서 사물
속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신의 정신에 관여하는 유사성"으로 인해 세계에 대해 신이 가졌던 생각을
뒤좇아 사유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보편자는 신의 정신 안에 있을 때는 아직 실재가 아니었고 신이 세상을 창조한 후에야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토마스에게 세계 내 개개의 모든 실재 영역은, 그 안에서 형상이 질료보다 훨씬 더 고상하면 할수록 더 높은
위치에 놓여 있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 나타난다.
죽은 사물은 가장 낮은 존재 단계를 의미한다. 이보다 높은 단계로는 식물이 있다.
식물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형상을 식물의 영혼으로 가지고 있다. 동물은 이보다 높은 단계이다.
동물의 영혼은 식물의 영혼에 감각적인 능력, 즉 지각까지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도 비교적 낮은 단계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도 역시 식물과 동물처럼, 그의 영혼 안에 식물적인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가지
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정신적이며 그래서 불멸적
이라는 점이라고 한다.
인간의 생명에는 영혼은 물론이고 육체와 결합된 정신적 부분도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 즉 천사는 인간보다 더 높은 단계를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천사 역시 완전하지는 못하다.
천사는 비록 순수한 정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조된 정신이다.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정신, 즉 신은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있다. 이 신은 순수한 형상으로서 어떠한 질료
적인 것과도 관계가 없기에 그러한 신은 순수한 정신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토마스가 구상한 실재의 구도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신神을 실재의 가장 고상한 형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목적론적 실재로 설명하고자 했다.
만일 전체 세계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라면,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은 어떠한 가능
태도 배제된 순수 실재일 것이다.
이러한 추구의 최종적인 완성이 신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채택한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밀착하게 됨으로써 철학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퇴색시킬 위험을 내포
한다.
왜냐하면 이제 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사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계 사건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는 아닐지라도, 신은 그를 향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그러나 그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는 최고의 원리로서 세계사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범신론적인 신 개념과 유사하게 된다.
그러나 토마스가 그러한 범신론을 받아들였다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이 절대적으로 고귀하다는 사상은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신 개념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범신론적 귀결을 피하기 위해 창조 사상으로 되돌아간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듯이 세계 안에서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추구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창조자로서 모든 사건의 시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목적론적 세계관에 따라 전체 세계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라면,
신이 그를 향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세계 안에서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으로서의 신이라면 만유는 궁극
적으로 신과의 합일에 이르게 되는 이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의 사상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그러한 모순은 자연적인 이성의 방식으로는 결코 밝혀질 수 없으며 오직 신앙의 길을
통해서만 참됨이 증명될 수 있는 하나의 전제이다.”라고 무책임하게 다시 신앙으로 도피한다.
세계 내 ‘존재의 층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전체 세계를 물질에서 식물, 동물, 인간, 신에로 이르는, 가능태
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로 간주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에는 진화론을 위한 모든 단초가 갖추
어져 있다.
그리스철학과 기독교,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철학과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중세신학에 사상과
철학의 토대를 두고 있는 서양철학과 서양인들이 독단적인 진화론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저렇게 허우적대는 근본원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체계는 전형적으로 카톨릭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결과론적인 짜맞추기에 불과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이것은 일찍이 어느 카톨릭 철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으나, 비록 그가 아리스토철학에 입각한 논리와 이성에 호소하고 있더라도 그가 목적하는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미리 주어진 어떤 결론을 위해 이론을 찾아내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라고 신랄
하게 비난했듯이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를 애써 찾는 태도는 참된 철학의 정신
이라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참신한 생명력이 없으며, 죽은 정신이 있을 뿐이다. 이성과 철학을 빙자하여 신에 대하여 좌지우지
하는 형이상학적 만용이 근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후대철학자들이 실체를 다루는 형이상학을 얕보는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형이상학적인 신 존재증명의 허무함에 대해서는 깊은 반성을 하고 있으면서도 희안하게도
서양철학의 목적론적, 진화론적 사고체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목적론적 사고체계에 진화론적 사고를 위한 모든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아퀴나스의 결과론적인 짜맞추기를 위한 열정은 이후 진화론에서, 그리고 상대주의 옹호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거의 종교적인 집착으로 그것을 위한 모든 근거를 찾아내려 하는 현대철학의 열정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4). 윌리암 오캄
전기 스콜라 철학 이래 보편의 문제는 항상 중요한 논쟁 대상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편'이란 '개별적 사물'에 대한 것으로서,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고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할 경우 소크라테스는 개별적 사물이고 인간(종),
동물(류) 등은 보편인 것이다.
전기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는 "보편은 실재성을 가지고 개별적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
라는 실재론의 주장과 "보편은 단순한 명사(사고에 의한 추상의 산물)에 불과하고
다만 개별적 사물만이 실재한다(보편은 개별적 사물 뒤에 있다)"라는 유명론의 주장이 대립했다.
중세 후기인 14세기에 오캄은 유명론을 다시 들고 나와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근세 철학에의 이행(移行)
을 준비하였다.
실재론적 입장에 대립하는 유명론적인 주장은 이단적인 사상으로서 정통파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14세기에
이르자 윌리암 오캄을 중심으로 유명론이 발전됨에 따라 스콜라 철학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유명론 부흥의 주인공 오캄은 “오로지 개별자만이 존재하고 실재적인 것은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라는 전제
위에 그의 철학을 세웠다. 개별적 사물만이 진실한 실재라는 존재론적 주장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사물에
대한 이성적ㆍ추상적인 인식의 근본에는 감성적ㆍ경험적인 인식이 있다"라는 주장으로서 이것은 근대 경험론
의 입장과 연관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 말기 영국의 유명론은 근대에 있어서 소위 '영국 경험론'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명론적인 입장에서는 경험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신의 존재나 성질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인식이
성립될 수 없고 단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까지 신앙의 합리적 기초를 추구해 온 스콜라 철학의 작업은 전부 무의미한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캄 자신이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유명론은 신학, 철학 그리고 과학에
분열을 가져오고 스콜라 철학을 내부에서 붕괴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한 교회의 이단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파리 대학에 뿌리를 내려 14ㆍ15세기에 학파가 형성
되기에 이르렀다.
파리의 오캄주의자들은 오캄이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연구에 적용한 원리를 자연과학적인 연구에 적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넘어섬으로써 근대적인 천문학과 물리학의 기초를 수립했다.
한편 이성과 경험에서 떨어져 나간 신앙철학이나, 과학과의 연결을 잃은 신학은 다시 신비적인 직관이나
계시로서의 성서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세의 ‘보편논쟁’은 애초부터 주제설정이 잘못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개별이나 보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철학에서처럼 주제가 ‘변화 속의 항존성’의 문제로 설정되었어야 했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본질을 의미했다.
‘보편’이란 개념은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흐리고 철학상의 혼선을 초래했을 뿐이다.
중세철학은 신을 내세워 우주의 본질과 만물 생성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으므로 ‘보편논쟁’에서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참된 존재인 본질이 사물에 앞서 존재하느냐, 혹은 사물 안에 실체(實體)로서 존재하느냐,
아니면 본질은 실재하는 게 아니라 단지 ‘명칭’이나 정신적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냐?”에 관한 논쟁에서 신이
사물에 본질을 부여했다는 실재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중세의 신권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중세철학에서도 세상
만물에 본질을 부여하는 존재로서 신의 위치가 점차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세철학에서 “경험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신의 존재나 성질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인식이 성립될 수 없고
단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세상 만물에 보편자를 부여하는 신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본질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중세 이후 오캄주의자들은 본질과 실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외면하면서 자연과학적인 연구에
집중하여 현대 물질문명을 뒷받침했지만, 세계의 불변하는 측면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상실은 세계관과 가치
관의 상실로 연결되었다.
“본질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라는 유명론자들의 주장에는
‘본질은 정신적 추상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지만, 인식, 지식의 경험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영국
경험론에 이르러 그나마 ‘정신적 추상물’에 불과했던 본질조차 부정되고 모든 진리의 불변성, 필연성이 의심
받게 되었다.
문제는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라며 본질을 부정한다고 해서 변화 속의 항존성, 혹은
세상 만물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공통성이나 동일성, ‘그것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그것다움’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개구리를 여전히 개구리라고 부르고 참나무를 참나무라고
부르며, 심지어 인간은 본질직관능력으로써 세상만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수많은 사물들을 ‘구분’
한다.
따라서 여전히 세상 속에 존재하는 본질과 동일성을 감안할 때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편논쟁에서
이룩한 성과인 ‘보편자는 실재이지만 사물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존재한다.’라는 ‘중용의 실재론'
을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그것이 “본질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
라는 유명론의 설명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세상 만물에 ‘그것다움’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본질의 세계를 무시하거
나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세상에서 발견되는 본질은 생명의 실체가 자신을 세상에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
나는 동일성 혹은 항존성이다.
우리는 여전히 생성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변화 속의 항존성”이라는 철학의 영원한 과제는 중세
신학에서처럼 함부로 신을 내세워 독단하는 자세가 아니라 인간이 철학과 과학, 경험을 총동원하여 성실하게
묻는 탐구의 자세로써 이해의 수준을 높여나가야 할 과제이다.
물론 중세신학의 신 존재증명이나 인간의 영혼불멸은 인간이 결코 경험으로써 증명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누가 세상 사물에 본질을 부여했는지, 혹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중세신학의 오류와
독단을 이유로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본질, 즉 항존성이나 동일성의 ‘그것다움’을 부정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세상에 본질, 즉 그것다움과 항존성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어떤 독단도 용납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세상의 신비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변화를 절대적인 진리이자 가치로 옹호할 뿐 ‘그것다움’이라는 본질이 갖는 동일성과 항존성의
토대를 상실할 때 상대주의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게 된다. 누가 세상 사물에 본질을 부여했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변화 속의 항존성”을 부정하면서 상대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현주소이자 가치 상실의 근본 원인이다.
4장 실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기본범주인 ‘실체’와 ‘본질’이 철학에서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
했듯이 본질 부정과 실체 부정을 통해 상대적 가치관을 옹호하려는 현대철학의 경향 때문이다.
칸트가 분류한 실체의 세 범주 자아, 세계, 신 중에 상대적 가치관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자아의
실체’ 여부이다. 그렇다면 ‘실체’란 무엇인가?
“실체의 사전辭典적인 정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 존재”이다.
예컨대 성질 ·크기 ·상황 등은 각각 ‘그 어떤 것’의 성질 ·크기 등으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성질이나 ·크기가 귀속(歸屬)되어 있는 바로 그 당사자(當事者)는 실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는 여러가지 술어(述語)가 따를 수 있는 제 l의 주어(主語)로서, 여러가지 속성이 귀속
되는 기체(基體)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떨어져서도 존재할 수 있는 자존존재(自存存在)이지만,
그 밖의 카테고리는 실체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의존존재(依存存在)이다.
실체는 감각이나 현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이나 현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존존재이다.”
(백과사전<“실체”>)
따라서 ‘실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할 수 있는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이 있고, 그 근저(根底)에서 그것들을 받들고 있는 기본존재가 있는데 그 기본존재가 바로 ‘실체’이다.
그에따라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을 통해 그것을 받들고 있는 기체로서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곧
현상과 실체에 대한 따로따로의 이해가 아니라 현상과 실체의 ‘통일적’ 이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질이나 크기 등등이 귀속되는 기체’가 실체이며, 성질이나 크기는 ‘실체’의 성질이나 크기로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때 여기서 실체의 핵심으로서 놓쳐서는 안되는 특성이 바로 ‘통일성’이다.
실체와 현상은 ‘통일성’에 의해 묶여있기 때문에, 기체로서의 실체에 의해 뒷받침된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의 현상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실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등은 ‘실체의 성질, 상황, 작용, 관계’ 등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는 제1의 주어이며, 성질이나 크기 등등은 그 실체의 술어로서 뒤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실체는 자존존재지만 성질이나 크기 등은 실체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의존존재이다.
끝으로 실체는 감각이나 현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감각이나 현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자존존재
이다. 실체와 감각이나 현상은 그 ‘통일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실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성립한다.
인간에게 ‘실체’의 개념을 적용할 때 여러 가지 성질이나 속성들이 ‘귀속’되는 ‘기체’가 곧 실체라고 정의
되므로,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모든 '성질'이나 ‘속성’들과 그에따른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
관계의 ‘현상’들이 귀속되는 기체가 ‘실체로서의 자아’라고 정의된다.
실제로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성질이나 속성, 그리고 그에따른 현상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자아’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성질이나 속성과 현상은 ‘자아의 지적, 정서적 ,
의지적인 성질, 속성, 현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실체’의 범주를 적용하는데 혼란에 빠져있는 이유는 다른 생물들은 성질
이나 속성과 그것의 기체인 실체와의 관계가 직접적, 본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비교적 파악하기가 쉬운
반면에, 인간의 경우는 또다른 인간의 본질인 ‘자유의지’의 속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성질, 속성, 현상들과 그
기체인 자아와의 관계가 직접적, 본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의 비밀이 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지적, 정서적, 의지적인 현상들에
대해 자아와의 긴밀한 연결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간의 실존이며, 그 긴밀한
연관을 놓치는 것이 바로 비본래적인 자아이다.
따라서 현대철학이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단순히 지각의 다발이나 의식의 흐름, 혹은 기능으로
파악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실체의 핵심적 규정으로서의 ‘통일성’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가 ‘저 사람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비록 그것이 물질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그
사람만의 개별적인 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뭔가가 그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귀면서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상을 가능케 하고 그 사람만의 주체적
이고 개별적인 현상을 통일적으로 뒷받침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실체, 혹은 그 사람의 자아를 이해하고
확신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현대철학이 ‘실체’에 대해서 위와 같이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멀리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에서부터 본질과 실체를 혼합, 혹은 혼동하여 사용함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모두 본질과 실체가 혼합된 개념이었고,
이제 막 신화적 단계를 벗어난 그리스철학자들에서 ‘현상들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에 대해서 ‘영원불변하
는 본질’을 동시에 요구한 것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 서양철학은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본질과 실체의 혼동의
역사’였다. 그들은 현상들의 근원이자 기체인 실체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영원불변성을 요구했고,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형이상학과 신학으로 귀결되었다.
그에따라 본질과 실체를 혼동한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현대철학의 ‘불변하는 것은 없다’라는 ‘본질 부정’의
경향은 자연스레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과 연결되었고, 또한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연속성이나 통일성도 담보할 수 없게 되어 자연스레 ‘이럴 때는
이런 인간, 저럴 때는 저런 인간’의 ‘상대적 가치관’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이유로 본질과 실체를 부정하는 현대철학의 경향은 뒤에서 보듯이 본질과
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입각한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중세신학에서처럼 ‘세계의 원인이 되는 실체는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어떤 불변하는 실체를 주장할 때 독단론이 성립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현대철학이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부정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
철학은 이제 ‘불변하는 실체’를 독단하는 태도를 극복하고, 현상을 통해 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이해하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자유의지로 인해 실체와 현상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을
통해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서정주라는 시인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의 시인으로서의 행적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의 일생 전체를 보고서 판단해야 하듯이, 생명의 일부분의 현상만을 보고는 실체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 생명의 전체에 걸친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가 되는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에서 생명의 현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한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리 없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나무, 혹은 동물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 나무, 혹은 동물의 실체가
뭐냐고 물었을 때 비록 실체가 물질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실체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나 나무, 동물의 일생에 걸친 행동이나 현상 하나하나에서 그 사람, 혹은 나무, 동물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행동이나 현상을 통해서 그 원인이자 기체인 실체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나무, 동물의 실체를 물었을 때 “아하!”하고 수긍하게 하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
서도 모든 현상의 원인이자 기체로서 그 사람, 혹은 나무, 동물만의 행동이나 현상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뒷
받침하는 독특한 실체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이해와도 일치한다.
(태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