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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부지역 작전
제1절 작전개요
1. 개 요
중동부지역 작전은 국군이 낙동강 연안에 방어선을 형성한 1950. 8. 1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으로 전환하기 직전인 9월 14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의 군위, 의성, 신녕, 영천 일대에서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 및 제8사단과 국군 제2군단 예하의 제6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8.13.15사단과 제17기갑여단, 그리고 제73독립연대 및 제103치안연대의 총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개한 방어작전을 말한다.
북한군은 1950년 8월 15일까지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완성한다는 전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낙동강선까지 진출한 북한군을 마지막 부산점령을 목표로 두차례의 대대적인 공세, 즉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감행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를 기도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은 '50. 8. 5일부터 개시된 8월 공세에서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여 김천 북방에서 영덕까지의 공격을 담당하여 대구와 영천, 포항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예하의 제15사단을 선산-다부동-대구방면에, 제1사단을 문경-군위-대구 방면에, 제13사단을 상주-다부동-대구 방면에, 제1사단을 문경-군위-대구 방면에 , 제8사단을 dks동-의성-대구 방면에 각각 투입하여 낙동강 도하를 시도 하였다. 그리고 낙동강을 도하한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1사단이 가산-도덕산-팔공산 선, 제8사단이 신녕 북쪽의 조림산 부근, 제12사단과 제15사단이 보현산 지구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낙동강을 연해 방어선을 형성한 후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한 미 제8군 사령관 워커중장은 장차 작전의 주도권을 탈취하여 공세전환하기 위해서 부산교두보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끊임없는 공세행동으로 적을 교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증원부대와 보급 수송을 위한 병참선을 확보하고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우세한 포병과 항공기로 계속 공격을 하면서 국군 제2군단(제1.6사단)을 왜관-의성간, 제1군단(제8.수도사단)을 의성-청송간의 낙동강 상류 산악지대에 배치 하였다.
적의 8월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완전 좌절되었다. 전투력이 60%이하로 내려가고 300여 km의 신장된 병참선에 제해권 및 제공권을 상실하여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초래하였다.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주력을 분할, 섬멸한다는 계획하에 8월 중순부터 예비 병력과 군수 물자를 총동원하여 최후의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적은 현풍에서 왜관에 이르는 낙동강 우안을 견제함과 동시에 2개의 기본 타격집단으로 서부와 중부에서 공격, 대구와 영천지구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적 제2군단은 제3공격집단(제1.3.13사단과 제17기갑여단)으로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하고, 제4집단군(제8.15사단)은 국군 제6사단 및 제8사단을 돌파하여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다는 계획하에 9월 2일 이른바 "9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한편 8월 하순 적의 총공격이 한계점에 도달하자, 미 제8군은 적을 낙동강선에 묶어놓고 인천방면으로 상륙함과 동시에 9월 16일 총공세로 이전해 당면의 적을 격파하고 신속히 미 제10군단과 연계한다는 작전방침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반격기도하에 적의 9월 공세에 직면한 국군 제2군단은 작전정면을 축소하기로 하고 제1사단을 신녕지구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제6사단의 좌측으로 이동시켜 적의 남진을 저지하여 대구의 외곾을 고수하였다. 또 제6사단은 운산동-화산간 방어정면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여 적의 대구점령 기도를 좌절시켰다. 제8사단은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방면으로 남진하던 적 제15사단을 제5연대와 함께 임포동 부근에서 섬멸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 하였다.
한편 중동부 지역은 남북으로 이어진 태백산맥과 남서로 뻗은 소백산맥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대구를 비록해 안동, 의성, 군위, 청송, 영천과 같은 주요 거점도시를 포함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중앙에 보현산과 주림산, 팔공산 같은 평균 800~900m의 산악지대로 대구분지가 있으며 북부에 향로봉, 등운산, 황학산 같은 평균 해발 300~600m의 고지군으로 둘러싸인 안동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중동부지역에서 방어작전을 전개하는 국군 제6사단의 좌측에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낙동강 중서부지역 왜관과 다부동 등지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측에는 안동-청송-안강을 통해 포항과 경주를 점령하려는 북한군 제12사단의 남진을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이 저지하고 육군본부 직할의 국군 제3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남진해 포항과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 제5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었다.
2. 북한군과 국군의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 북한군 전투편성
국군이 방어를 담당한 중동부지역(안계-의성-구수동-청송) 정면에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1사단과 제8사단, 제13사단과 제15사단이 투입되었다. 여기에 제17기갑여단과 제766유격부대, 배속부대로 제73독립연대와 제103치안연대가 있다.
북한군 사단의 포병은 보병에 배속하여 운용하는데 주공방면의 보병연대는 2개 포병대대와 2개 76밀리 자주포포대, 1개 독립전차대대를, 조공 방면의 보병연대는 1개 포병대대오 1개 76밀리 자주포대를 배속받아 운용하였다.
북한군 지휘부는 군단장에 김무정 중장(후에 최인 소장), 제1사단장에 김광협 소장, 제8사단장에 오백룡 소장, 제13사단장에 최용진 소장(여기에 참모장인 이학구가 나중에 투항함), 제15사단장에 박성철 소장(후임이 조열광 소장)이다.
(2) 공격준비태세
북한군은 연속적인 공격과 기동으로 국군과 미군을 김천-함창-안동 지역에서 포위 섬멸하고 신속하게 낙동강을 도하해 국군과 유엔군을 대구 일대에서 포위섬멸하는 한편, 마산-대구-영천-포항 계선에 진출하여 차기 작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는 것이 4차 작전방침이다.
이러한 작전개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적은 일선에 전개한 10개 보병사단 중 3개 사단을 미군의 방어정면에 투입한 반면 국군의 방어정면에는 전차로 증강된 6개 보병사단을 투입하였다.
이에 따라 주공을 대구방향으로 지향한 적 제2군단은 제15사단을 구미 부근에서 도하하여 다부동을 경유하고, 제13사단은 낙동리에서 도하하여 다부동을 경유하고, 제1사단은 제13사단의 좌익과 연계하여 대구를 공격토록 하였다. 그리고 제8사단은 영천으로 진출하여 대구 또는 경주를 공격토록 하였다.
낙동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전선 서부와 북부에서 2개의 공격집단으로 공격해 신속히 섬멸시킨다는 제5차 작전방침에을 수립한다.
북한군 제2군단은 '50. 8. 5일부터 개시된 8월 공세에서 주공을 대구로 지향하여 김천 북방에서 영덕까지의 공격을 담당하여 대구와 영천, 포항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 예하의 제15사단을 선산-다부동-대구방면에, 제1사단을 문경-군위-대구 방면에, 제13사단을 상주-다부동-대구 방면에, 제1사단을 문경-군위-대구 방면에 , 제8사단을 안동-의성-대구 방면에 각각 투입하여 낙동강 도하를 시도 하였다. 그리고 낙동강을 도하한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1사단이 가산-도덕산-팔공산 선, 제8사단이 신녕 북쪽의 조림산 부근, 제12사단과 제15사단이 보현산 지구까지 진출하였다.
적의 8월 공세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완전 좌절되었다. 전투력이 60%이하로 내려가고 300여 km의 신장된 병참선에 제해권 및 제공권을 상실하여 막대한 병력과 장비의 손시을 초래하였다.
8월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은 유엔군의 주력을 분할, 섬멸한다는 계획하에 8월 중순부터 예비 병력과 군수 물자를 총동원하여 최후의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적은 현풍에서 왜관에 이르는 낙동강 우안을 견제함과 동시에 2개의 기본 타격집단으로 서부와 중부에서 공격, 대구와 영천지구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적 제2군단은 제3공격집단(제1.3.13사단과 제17기갑여단)으로 미 제1기병사단과 국군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하고, 제4집단군(제8.15사단)은 국군 제6사단 및 제8사단을 돌파하여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다는 계획하에 9월 2일 이른바 "9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3) 전투력 수준
북한군 제2군단의 부대들은 남진과정에서 손실된 병력과 장비를 북한이나 남한의 점령지에서 징집과 조달로 보충함으로써 문경-군위-대구를 공격하는 북한군 제1사단은 약 8,000명의 병력 대부분이 의용군으로 편성되고 제5차 작전이 전개되던 9월초에는 50%이하로 3,000명에 불과하였고 포병은 처음부터 50% 이하의 수준이었다.
안동-의성 -대구방면으로 공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은 7월초 강릉에서 증편될 무렵에 10,000명선이 제5차 작전을 위해 전계 당시는 7,000명선이고 포병은 마찬가지로 50%이하 수준이었다.
상주-다부동-대구 방면을 지향한 제13사단은 12,000명을 보유했으나 80%가 군사훈련이 미흡한 남한 출신이었다. 이 부대는 제5차 작전을 전개할 당시에 3,000명선으로 줄어들고 포병은 50%이하 수준이었다.
구미-다부동-대구 방면으로 지향하는 제15사단은 12,000명의 사단 병력은 제5차 작전 전개시 4,200명으로 감소하고 포병은 50%이하였다.
하지만 작전기간 동안 유엔군의 계속되는 항공공격으로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어 전선을 이탈, 도주하는 사례가 흔히 발생하였고 충분한 식령과 휴식의 부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4) 인접부대 상황
1950년 8월초 낙동강 중동부지역의 북한 군 제2군단은 예하 사단은 우측에서부터 제15-제13--제1-제8사단 순으로 전개하였다. 작전 지역의 우정면의 제15사단으 우인접 부대는 성주-왜관을 점령한 후 대구 공격 임무를 받은 제3사단이었거, 좌정면은 제8사단은 좌인접 부대로 안동-청송-안강-포항으로 진출하는 제12사단이었다.
3. 국군 상황
가. 국군의 배치 현황
중동부지역 작전('50.8.1-9.14)
적8사 안동 적12사
국8-21연 국8-10연 수도-1연, 18연, 기갑연
적13사 국8-16연 길안 ㅣ 청송
국6-19연 구산동 경유 의성 ㅣ
6사=8사 8사=수도사 의성
1연 의성으로
국6-2연 국6-7연
용기동 국6-19연 국8-21연 국8-10연 국10-16연
의성
국8사:'50.8.13 보현산
적13-21연 국수도사: 안강
국1사=국6사 국6-2연 국6-19연 도원동 국6사 18연,기갑연 : 구산동
군위 적8사
적1사
국7연 국2연 국19연
북한군이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선까지 진출하자, 미 제8군는 '50. 7. 29일 반격을 위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를 명한다.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은 낙동강 반변천 연안의 방어선으로 철수토록 하고 육본 직할의 제3사단은 오십천 변의 영덕. 강구로 방어선을 형성토록 하였다.
이 작전명령은 각 군단과 사단이 8월 2일 부터 3일까지 낙동강 외곽선인 마산 서북쪽 서북산 일대~합천 북쪽 산제리 일대~지례 동쪽~김천~상주~예천~안동~청송~ 북쪽 홍구동~영덕을 연하는 이른바 X선에서 적을 지연토록 하는 것이다. 이와 함깨 새로운 방어선인 낙동강 방어선인 즉 Y선에 대한 정찰을 실시하고 8월 4일부터 Y선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토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에 국군은 8월 3일 야간까지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함창에서 적을 저지하던 제2군단 예하의 제1사단은 낙동리에서 도하하여 신진지를 점령하고, 우측의 제6사단은 제19연대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용기동으로 이동하였다.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은 안동에서 수도사단의 엄호아래 도하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고, 수도사단 역시 길안 방면으로 이동하여 방어편성을 완료 하였다.
이와 같이 국군은 8월 3일 야간까지 제2군단은 약 68km의 방어정면을 제1사단이 왜관~낙정리간 42km를, 제6사단이 낙정리~상아동간 26km를 담당하였다. 제1군단은 방어정면이 44km로 제8사단이 상아동~구미동간 20km 정면을, 그리고 수도사단이 구미동~청송간 24km를 담당하였다. 육본 직할의 제3사단은 영덕 정면의 16km를 점령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본은 미 제25사단이 마산으로 이동함에 따라 국군의 방어정면이 확대되고, 인접사단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8월 11일 작전명령으로 전선을 축소하여 왜관-포남동-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을 연하는 수정된 방어선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나. 전투준비태세
국군은 38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실패할 경우 남한 지역으 큰강을 이용해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강 방어선이 7월 3일 무너지고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이 돌파된 7월 17일 낙동강 방어선의 구상이 구체화 되어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한편 부산교두보를 마련해 극비로 추진중인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공세작전으로 전환하려는 국군과 유엔군은 증원병력 및 병참선을 확보하고 우세한 포병과 항공기로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사실 국군은 소총과 수류탄 만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에 국군은 신병양성에 주력해 1950년 8월 중 제1, 제3훈련소를 창설하고 9월까지 4개 훈련소를 증설한다. 이들 훈련소는 5,000~6,000명의 병력을 수용해 1~2주간의 훈련을 실시한다. 장교 충원도 매주 250명의 초급장교를 배출하였다. 또한 8월 20일 민부대와 독립 유격 제1, 2대대를 기간으로 제7사단을 재창설하고, 제11사단의 신편작업에 착수한다.
한편 학도의용군고 노무자도 이 무렵에 인원이 증가하여 특히 학도의용군은 각 지구에서 수십 명씩 군부대에 입소하여 전투와 지원업무를 수행하는데 포항지구의 제3사단을 지원해서 전투를 수행하고 영일 비행장을 경비하기도 했다.
노무자는 각 부대별로 필요에 따라 피난민이나 인근 마을 주민 중에서 모집하였으며 보급소에서 전방부대까지 지게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부상병을 후송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당시 군수지원은 90%사 미군지원이었으며 경찰 노무자 까지 '50. 9월까지 205,000명 수준의 보급품을 지원받았다.
다. 전투력 수준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될 당시에 제2군단 예하 제6사단이 약 6,570명, 제1군단 예하 제8사단과 수도사단이 각각 8,150명과 5,780명, 그리고 육본직할 제3사단이 약 6,470명이었다.
1950년 8월부터 국군의 각 전투부대는 신장비와 보급의 지원으로 공세이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를 보유하는데 3.5인치 로켓포를 확보해 대전차 공격이 가능해졌고 105밀리 신형 야포 30문을 지원 받아 10개 대대로 확대하였다.
라. 인접부대 상황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시점애 중동부지역의 국군의 배치는 정면 좌측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1군단 예하 제6사단, 우측에 제2군단 예하 8사단이 있었다.
따라서 제6사단의 좌인접 부대는 328고지~낙정리간을 방어하는 제1사단이고, 우전방 제8사단의 우측은 청송~길안지구를 담당하는 수도사단이었다.
제2절 신녕지구 전투
1. 전투 개요
신녕전투는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단행하여 국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영천 동측방으로 진출하던 '50. 8. 30일부터 9. 15일까지 영청 북방의 신녕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영천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자지시킨 방어전투이다.
1950년 8월초 중동부 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2군단장은 대구를 탈취하기 위해 4개 사단을 대구정면에 집중적으로 투입한다. 이에 적 제8사단은 안동-의성-대구 축선으로 지향하지만 아군 제8사단의 지연전에 많은 피해를 입고 의흥-신녕선으로 공격축선을 변경했다.
여기에 적 제2군단은 전차부대를 증원하여 신녕-하양을 목표로 침투계획을 전개하여 조림산-화산 선까지 진출하지만 국군 및 유엔군의 지상 작전과 공중폭격으로 많은 장비와 병력의 손실을 가져온다.
반면에 위천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국군 제6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558-637-화산을 연하는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로 한다.
9월초 인접사단의 영천 점령에 고무된 적 제8사단은 신녕을 점령한 후 영천으로 돌파구를 확대하기 위해 화산일대에 주공을 두고 주간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국군 제6사단운 포격을 집중해 적의 대열을 분산시키고 유엔 폭격기가 진지 정면의 적에 맹폭을 가힘으로써 적의 총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북한군 제8사단은 공세작전을 중단한 채 소규모 전투만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은 예하의 3개 연대와 배속된 2개 연대를 통합하여 동서간 32km의 산악정면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국군 제1사단이 좌측으로 투입되면서 제1사단은 가산-신원간 13km정면을, 제6사단은 운산동~화산간 15km를 담당하게 된다. 이와같은 전투 지경선 조정으로 배속되었던 제8사단 제10연대는 원대복귀하고 제5연대(-)와 기갑연대 또한 제7사단으로 원대 복귀한후 육군의 예비가 된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령을 거쳐 영천으로 우회공격하려던 기도가 좌절되어 영천을 점령하기 위해 투입된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지역에서 고립되어 각개 격파당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국군 및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바나격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북한군 제8사단은 8월초에 안동을 점령한 후 안동-의성방향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6사단을 의성 및 의흥일대에서 물리친 후 8월말에는 신녕 북쪽의 조림산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저항과 유엔군 공군의 폭격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9월초에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은 병력은 70%수준인 7,000명 선이고 사단장은 오백룡이었고 사단의 장비는 122밀리 곡사포 21문, 45밀리 대전차포 42문, 82밀리 및 122밀리 박격포 각각 36문과 12문을 보유하였다.
하지만 계속적인 폭격으로 많은 손실이 발생하고 남한에서 징집하여 충원되는 병력으로 숫자는 많아도 전투력은 미흡했다.
나. 국군 상황
이 당시에 국군 제6사단은 신녕 북쪽에서 강력한 방어진을 편성했다. 예하의 3개 연대(제2.7.19)와 제7사단의 제5연대(-1) 및 기갑연대(-) 등 5개 연대로 최초 동서간 32km의 산악지역에서 좌측으로 국군 제1사단이 들어오면서 운산동에서 화산에 이르는 15km 정면을 담당하였다.
한편 신녕지구전투 당시에 제6사단은 병력 6,500명에 배속된 부대를 합치면 약 8,500명 선이고 사단장은 김종오 준장을 비롯해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 제19연대장 김익렬 대령( 최초 제1사단 연대장, 전쟁 직전에는 제주지역과 여수지역 연대의 지휘관을 역임한 3대포(뻥치는 수준)의 한사람)이었다. 배속 부대장은 제5연대가 호남지역 전투에 참여한 이영규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되어 1대 연대장이었고 8.27일 이후에는 최창언 대령이, 기갑 연대장은 유흥수 대령에 이어 8. 13일부터는 백남권 대령이었다.
3. 전투 경과
가. 용기동 전투
용기동 부근 전투('50.8.2-6)
낙동강 적13-?연대 봉화산 적6-?연대
독점산 국19-2대대 오선당 국19-1대대
294 적 1개 연대
교안동
307 국6-2연대
적13-?연대 안심동 국2-2대대 삼춘동 국6-7연
8월4일 07:00시에 제7-2대대, 제19연와 임무교대차 북방으로 진출
양곡동 국6-19연
국19-2대대
위천 용기동
노연동
선돌주막 8.5일 국19-1대대
8월 6일
국19-2대대
국2-2대대
적13-21연 국2-3대대
국2-1대대 8월 6일 국2-2대대 옥연동 쌍계동 국7연
국2연 위성동 국19연 대흥동
국6사 도원동
(1)양곡동 지역 전투
'50. 8. 1일 제6사단장은 함창지역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던중 군단장으로부터 용기동 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먼저 제19연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 주요 고지로 이동, 다른 연대의 철수를 엄호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낙동강을 도하한 제19연대는 8월 2일 04시를 기해 제1대대를 오선당(352고지), 제2대대를 독점산(312고지), 제3대대를 봉화산(400고지)에 각각 뱇치하여 도하작전을 지원하게 된다.
한편 제2연대와 제7연대는 도하작전을 완료후에 8월 3일 06시 무렵 제2연대는 용기동-교안동-307고지(346고지로 판단됨)를 연하는 선에 진지를 점령한다. 제7연대는 용기동 동북쪽 13km지점으로이동해 삼촌리 363고지군으로 이동하였다.
낙동강을 도하한 적 제13연대 단대호 미상의 연대 병력이 독점산과 오선당, 또다른 연대 병력이 봉화산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연대는 용기동으로 철수하여 지연전에 들어가고 8월 4일 06시경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2연대는 제2대대를 양곡리 동북방으로, 제7연대는 제19연대의 진지를인수하러 북상하다 오선당 직후방 294고지군일대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용기동으로 철수하여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날 ,8월 4일 정오를 지나 적이 전차 5대를 앞세워 남진을 계속하자 사단지휘소는 용기동에서 도원리로 이동하였고 제2연대는 위천강 남안에서 서측방을 방호하게 한다.
다음날 8월 5일 제19연대는 방어중인 용기동-양곡동간 능선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계속되는 압력에 용기동 남쪽으로 진지를 변환하게 한다. 이에 사단은 제7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를 급파해 저지토록 하였으나 이 또한 적의 포위 공격으로 연대지휘소 부근으로 철수 한다.
한편 제2연대 제1대대 및 3대대는 적 제143사단 제21연대의 공격으로 강의 남쪽 옥연동으로 이동하여 급편방어하게 된다.
(2) 선돌주막(현재 지명?, 안계 위양리와 교촌리 위 봉화재 일대로 판단됨) 지역 전투
제19-2대대는 선돌주막 남쪽고지에서 8월 7일 철수해 외곡동 북쪽고지로, 제7-2대대를 방동 동북쪽 지역에, 제19-1대대를 방동 서측 능선에 배치되어 적과 교전한다. 적의 공격으로 일시적 진지가 피탈되었으나 다시 재공격으로 선돌주막 북쪽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28번 지방도에서 교촌리에서 안정리-화신리-쌍계리로 우회하는 14번 지방도가 있는데 바로 이 도로 좌우에 형성된 300m내외의 고지군을 따라 계속하여 동남방향으로 후퇴해 가면서 제19연대와 제7연대가 교대로 8월 8일까지지연전을 한다.
"봉화재의 전투흔적, 그리고 그 산 우물의 총"
무더운 여름날 우린 이 일대를 정밀 탐사를 하고 발굴작전을 실시한다. 마을 어르신 한분이 다가 와 봉화재와 그 주변 고지들이 우리6사단과 북한군이 전투를 했고, 전쟁 후에 산에서 소먹기도 하고 놀면서 보면 개인호가 많고 그 자리에서 탄피나 철모가 있어서 주워서 집에서 화장실 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봉화재 바러 옆에 산속에 우물이 있는데 당시에 중대장이 죽었다는 소문과 총이 있는데 그대로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용하지 않는 우물터를 찾아서 발굴작전을 개시하여 3구의 유해와 칼빈 1정을 발굴했다.
(3) 옥연동 지역 전투
비안면 용남리 북쪽에 236고지에서 국군 제6-9-2대대는 적을 격퇴하다, 8월 9일 03시에 증원된 적의 공격을 받고 후퇴를 시작하고 사단장은 제7연대를 지금의 비안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외곡리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여 저지토록 하였다. 제2연대 제2대대는 위천강 남쪽 옥연리일대 개활지를 담당하였다.
8월 10일 03시에 위천강을 도하하여 제2-2대대를, 그동안 236고지에 지향하던 적의 공격은 8월 11일 01: 20분경 사단 모든 정면에 공격을 가해와 02시 15분부터 진지가 돌파되어 통신두절 상태가 되고 제2대대는 현산리 217고지로철수하였다. 이어서 제7연대가 강요된 철수를 했다. 제2연대도 게속적인 적의 압력에 차후진지로 철수를 실시하였다.
8월 12일 22시를 기해 사단은 적과 지연전을 하면서 위천 북쪽 1~3km 지점의 감제고지를 연결하는 선에서 3개 연대를 배치하여 그 좌측 국군 제1사단과 연결된다. 우측은 국군 제8사단이 8월 13일 현재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 협조된 방어진지를 형성할 수 없었다. 이 때에 사단 사령부는 화수동에 위치하고, 제7연대는 금매동에, 중앙인 제2연대는 우보에, 우전방 제19연대는 의흥에 연대본부를 두었다.
나. 군위-의흥 부근 전투
효령 부근 피아상황('50.8.15-16)
군위 적1사=적8사
적1사(-)
적1-2연대
마정산 403 324
국7연=2연
국통산 국2-1대대
국7-3-10중대
효령
국7-3대대
위천
정나산 병수동
국7-1대대
남천 국7-1대대 매봉산
'50.8.17일 , 8월 21일 국7-3대대
웅봉산 국7-2대대
273 174 국7-2대대
392 사상천 국19-2대대 금매동 국7연 , 105mm포병
국1-11연= 국6-7연
492 신월 국7연 '50.8.17-18
국15-2대대
(1) 매봉산(488고지)지역 전투
제6사단은 오위동-현산돈-318고지에서 8월 13일 군단의 명령으로 매봉산과 산운동 일대로 철수한다. 사단 방어의 좌전방은 제7사단으로 성동-효령-신녕과 효령-매곡동-중리-대구간 도로중 적 전차 기동이 유리한 매봉산 일대에 방어 중점을 두었으며 방어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사단이었다.
8월 13일 제7연대는 제3대대로 효령 우전방 마정산(403m)을 점령토록 하였으나 적이 먼저 선점하여 공격에도 실패하고 병수동 전방 303고지 일대로 복귀한다.
다음날 적은 계속하여 제3대대 전방으로 공격을 해왔으나 강력한 화력전투에 큰 피해를 입고 마정산으로 일시 철수했다. 8월 15일 적은 이른 아침 안동을 떠나 군위에 집결한 적 제1사단이 전차 3대를 앞세워 전 정면에 공격을 가해왔다. 효령을 점령한 적은 303고지를 견제하면서 국군 제6-7-2대대가 방어중인 5번국도변의 273고지로 공격을 해와 제2대대는 4시간의 육박전끝에 5번도로를 횡단하여 금매동 북쪽 174고지로 철수 하였다.
한편 적도 많은 피해를 입고 효령-273고지선에서 일단 머물렀다.
국군 제7-2대대가 8월 15일 야간 21시를 기해 273고지를 탈환하러 수색대를 투입하였는데 진지 안에서 적이 술에 취해 잠들어 있어 적을 섬멸하고 점령하였고 국군 제1사단과의 전투지경선 경계가 상호 모호하여 제19연대 제2대대를 서측으로 보내 5번도로 우측 장기리의 무명 492고지를 점령토록 했다.
8월 16일 새벽에 적 제1사단 제14연대는 3대의 전차가 선도하여 5번도로를 따라 남진하고 국군은 강력한 저항으로 고지마다 몇번의 백병전이 벌어지고 국군 제7-1대대는병산리 남동쪽 매봉산을 끝까지 고수하게 된다.
8월 17일 제7연대장은 위천강 북쪽 303고지에 있던 제3대대를 매봉산 전방으로 이동시키고 제1대대와 연결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8월 17일 정오 무렵 적 1사단장은 저차로 증가왼 제14연대를 장군동일대로 진출시키고 일부 부대를 매봉산을 점령하지 못한채로 가산산성까지 진출시켜 제7연대및 제1사단 우측방이 위태로워진 상황이었으나 적도 그들의 자측방이 노출되어 8월 17일 오전에 일시적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매봉산의 혈투"
적은 8월 17일 오후 15시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조직적인 방어전투에 공격이 좌절되자 일부 부대를 침투식 공격으로 후방으로 침투시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들의 뒤에서 공격으로 부대들이 그만 방어중심을 잃고 부분적으로 철수를 하고, 다만 매봉산 지역은 8월 21일 고지를 빼앗겼으나 백병전으로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인접부대의 상황이 급변하자 전선의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방어진지 우단을 일부 조정하자 적이 상황을 파악하고 8월 28일 01시 20분 다시 공격을 해왔으나 백병전으로 다시 사수한다.
(2) 365고지 혈투
매봉산-365고지 전투상황도('50.8.17-18)
국통산 337
적3연
국7-3대대
정나산 352 위천 국7-7연=국7-2연
적2연
매봉산489 국7-1대대
국7-2대대
392
적14연 국19-2대대
장군동 365
국7-2대대
남천
국1사-11연 =국7-7연 492 신월 국7연
당시의 전선은 5번도로를 경계선으로 맟치 동서로 갈라진 전투지경선이 이루어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적의 기습으로 일시적 금매동으로 밀렸던 국군 제7-2대대는 8월 18일 04를 기해 365고지(금매리 남서쪽, 919지방도 옆)를 기습공격하여 17시 20분에 탈환하였다.
8월 17일부터 8월 20일까지 매일 주인이 바뀌는 공방전 속에 20일 제2대대가 점령하면서 적의 위협은 일단 제거 되었다.
육군본부는 다두봉-효령일대의 전투력을 증원하기로 하고 제7사단 제5연대와 육본 직할 기갑연대를 제6사단에, 제8사단 10연대를 제1사단에 각각 배속하였다.
8월 20일 13시를 기해 포항지구사령부에서 제6사단으로 배속된 민부대(이날부로 제5연대로 개칭됨)는 신녕에 도착하여 제6사단과 제1사단 사이의 매곡동 계곡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제5연대 및 기갑연대 증원('50.8.20-21)
국통산 337 국2-2대대
적3연
국7-3대대
정나산 352 위천 국7-7연=국7-2연
적2연
매봉산489 국7-3대대
국7-1대대
392
적14연 국19-2대대
장군동 365 국5연=국7연
국7-2대대
남천
국1사-11연 =국7-7연 492 국5-1대대 신월 국7연
국5-2대대
527 부계 국5연
국1사-11연=국기갑연
558 기갑-1대대
기갑연=국5연 애율동 기갑연
국11연=국기갑연
국1사=국6사
"용수리 558고지 혈투(기갑연대)"
적은 계속하여 제7연대 2대대가 방어중인 365고지를 공격하고, 용추동에 집결한 기갑연대 제1대대는 적이 기습 점령중인 고지를 8월 22일 공격하여 탈환하고 558고지에서 8월 24일에는 제2대대마저 투입해 8번에 걸친 공격으로 전투력이 50%이하로 내려가고 실패한다. 다음날 25일 다시 병력을 보출받아 5시간의 혈투로 18시 30분에 탈한하였다.
한편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가 일단락된 8월 26일 전차를 앞세운 적 제8사단이 의성-의흥-신녕 접근로를 따라 제19연대 방어정면을 돌파하고 화산-조림산 선까지 진출함에 따라 주저항선을 조정하게 된다.
주저항선 조정을 위해 제2연대는 8월 28일 370-상동 선에, 우측의 제19연대는 갑령일대로, 제7연대는 8월 29일 이른 새벽 217-284고지군으로 이동 하였다.
다부동 지역의 제1사단은 8월 29일 육본 명에 따라 작전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다음날 신녕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예하의 제15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하여 기갑연대와 제5연대, 제7연대의 진지를 인수하였다.
(3) 주저항선상의 전투
8월 13일 오전 사단의 선발대로 우보에 도착한 제6-2연대는 의성-우보-신녕 축선의 방어를 위해 위천 북방에 주저항선을 설정하여 2개 대대를 전방에 1개 대대를 예비로 하였다. 이에 따라 국통산에서 28번도로 좌측 청노리 좌측 야산간을 방어하고 쌍계천 금성좌측을 제19연대와 경계선으로 하였다
한편 우전방 제19연대는 금성 산운동에서 금성산(591m)간을 제1대대로 방어하고 2개 대대는 연대본부와 의흥에 집결보유하다 8월 16일에 2대대는 제7연대 배속으로 금매동으로 이동한다.
"국통산, 금성산 교전"
사단 중앙에 위치한 국통산(336m)은 위천 북쪽에 위치하며 감제고지로써 전술적 중요 지형이다. 사단 좌익의 제6-2-1대대는 저녁 북한군 공격으로 피탈당한뒤 반격으로 회복하는 등 진지 편성 순간부터 적과의 교전이 진행된다. 반면 사단 우익의 제6-19-3대대는 청노리의 구릉성 진지와 쌍계천변에 진지를 편성하고 이어서 금성산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주로 신병으로 편성된 대대는 오후에 적의 공격으로 피탈당하고 산운동 야산으로 내려와 진지강화를 했다.
(4) 주저항선의 재편성과 고지쟁탈전
주저항선의 공방전 상황('50.8.13-16)
적1사=적8사 적82연
591 금성산
적83연
탑리
산운동
국2-3대대 쌍계천 토현
청노동 3대대=1대대
324
노행동 국통산 국2-1대대 2연=19연
우보 국2연
위천
의흥 국19연
7연=2연 8.16일 제19-2대대 제7연대에 배속,
금매동으로
"국통산과, 산운리-구천리-순호리 횡격실 능선의 격전"
8월 17일 아침 적은 우보-의흥간 사단의 방어정면에 공격을 재개하였다. 산운동의 제19-1대대는 경계태만으로 적의 기습으로 구천동 일대로 물러나고 예비인 제3대대가 순호리 횡격실 능선에 배치되어 철수를 엄호 하였다.
좌익의 제2연대는 8월 18일 03시경부터 적의 공격이 주로 국통산등 고지군에서 진행 되었지만 아군 전폭기의 네이팜탄사격 등으로 격파하여 전선을 유지하였다.
제19연대 신임 연대장으로 김익렬 대령이 부임한 8월 21일 이른 새벽에 적 제8-83연대가 연대 정면을 공격해 다시 구천리일대의 진지를 피탈당하고 순호리 진지를 유지한다.
(5) 적의 기습과 제19연대의 철수작전 실패
제6사단은 8월 24일 우인접 제8사단과의 접경지대 방어태테 강화를 위해 제2연대를 순호리 좌측 324고지까지 확장하고 제19연대 병력을 빙계리 남쪽 북두산(598m)까지 배치하였다. 이러다 보니 탑리-의흥-신녕 접근로에 전투력이 약화 되었다.
8월 25일 03시에 적 8사단이 전차로 증강된 3개 연대를 제2연대 정면에 투입해 총공세를 개시하였다. 적 제8사단은 제83연대의 일부 병력으로 연대간의 간격을 이용해 후방으로 침투 아군의 측후방을 공격토록 하였다.
"제19연대의 철수작전 실패(적의 조리산 무혈입성)와 신녕의 위기"
제19연대는 적의 좌측방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대부분 신병에 지형숙지 미숙과 통제 미흡으로 오히려 의흥으로 진출한 적의 퇴로차단에 놀라서 26일 철수명령을 하달하고 연대 본부는 갑령고개 정상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통신두절과 지휘계통 마비(3대대장 중상으로 후송)로 혼란이 가중되어 조림산 북쪽을 점령토록 되었으나 화산으로 후퇴하는 등의 철수실패로 적은 조림산을 무혈입성하게 된다.
사단은 8월 26일 사단 전술지휘소를 화수동으로 이동하고 항공기의 근접지원과 화수동 봉림동에 지뢰지대를 설치하고 제7연대 제1대대를 화산으로 투입한다.
신령지구 위협을 인식한 제2군단은 이날 제1사단 제15연대 제2대대를 제6사단에 배속하게 된다.
(6) 지연전 전개와 방어진지 재편성
사단의 방어계획 수정에 따라 국군 제6-2연대는 우측으로 방어정면이 확장됨에 따라 방어력이 분산되고 반면에 적 제8-제103치안연대를 심원에, 제82연대를 국통산 북쪽에 , 전차로 증강된 제81연대를 청노리-우보 접근로에 투입 했다.
"국통산의 10여차례 백병전"
"우보역 앞 미성리 위천 넘어에 있는 바위일대(용사님들이 조개바위로 칭함)에 백병전으로 수없이 전사
8월 25일 03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축차진지상에서 적과 전투를 벌리기로 결정하고 계속죄는 적의 충격력을 흡수하기로 한다.
하지만 국통산지역은 계속적으로 10여차례의 파상공격에도 피탈되지않고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어쩔수 없이 중과부족으로 위천 남쪽으로 철수를 강요당했다. 따라서 연대는 우보일대에 무명고지상에 저지진지를 구축했다.
8월 26일 새벽에 적의 기습적인 공격은 계속되고 후방포위의 위협이 높아지고 있을 때에 연대장은 우보 28번 도로상에 밀집대형으로 접근하는 적을 06시경 돌격으로 강타하고 모든 화기로 도주하는 적 후방까지도 강타하여 적을 밀어내고 제19연대의철수작전 실패로 무주공산이 된 우보-의흥간 도로 북쪽을 견제하면서 제19연대 좌익인 화본리 상동까지 점령했다.
"사전협조없는 지뢰매설의 비극, 제5연대장 이영규 중령, 제2연대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의 전사"
밀어닥치는 적을 지연하기 위해 육본은 장애물을 신속히 설치토록 훈령을 육본에서 내려 각 지역부대장 승인하 보병, 포병, 공병장교의 공동정찰로 설치토록 했다.
그러나 일부공병 지휘관들이 협조없이 설치하면서 8월 25일과 26일 양이레 많은 사고가 발생하여 25일에는 제5연대장 이영규중령과 5명이 전사하고 공병 장병 10여 명이 중사을, 26일에는 제2연대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등 7명이 전사하고 12명이 행방불명되고 2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따라서 사단은 제2연대는 산성에 위치하며 산성 좌우측 고지군에, 제19연대는 갑령에 위치하며 배속된 제1-15-2대대와 제3대대가 320-갑령에, 제1대대가 332고지등 28번 도로 우측 고지에, 제2대대가 둔덕위 723고지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당시에 이미 화산에 단대호 미상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방어진지 재편성('50.8.28)
모산동 적82연 적83연
적81연 매성동
각석산
화수동 적1개대대
상동 적1개대대
국2-3대대 국2-1대대 조림산
국2연/2대대
7-3대대=2-3대대 국2연=국19연 국19-3대대 국15-2대대
국19-1대대 국19-2대대
봉림동 갑령 국19연 723
화산 적1개대대
화남동 용암산
신녕 국6사
다. 조림산 부근 전투(8월 30일~9월 4일)
화산탈환작전 상황('50.8.29-9.1)
각석산 방가산
화수동 적83연 적82-1개대대 15연=국8-21연
국19-2대대 화산동 국8-1 대대 구천동 국8-1대대
적1개중대- 적1개중대 -적1개중대
국7-1-1개중대 국7-1대대 국15-3-1개소대
국15-1대대 국15-3대대 국6사=국8사
558
국7-1대대 520 노고산
238
신녕 국6사
국15-1대대
신덕동 국15연
(1)828(화산)-637고지 전투
제6사단 방어지역 우측은 화산일대에 적 83연대가 침투하고 조림산이 피탈되어 신녕지구 위기감이 고조 되었다. 이에 육군본부와 제2군단은 8월 28일 제1사단 제15연대 주력을, 신편 부대인 제7사단 8연대 제1대대를 제6사단에 배속한다.
8월 29일 배속된 제7-1대대장은 사단으로부터 화산탈환 명령을 받고 용암산 558고를 탈취한데 이어 몇번의 악전고투 끝에 8월 31일 자정을 넘기며 화산 좌측을 점령하게 된다.
배속된 제1-15-1.3대대는 제7연대 제1대대 우측방에서 주봉 동쪽 봉우리-637고기로, 제8연대 제1대대는 인접 제8사단으 부대배치 간격에 형성된 공간지대를 경계하며 방가산-화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의 무명고지를 점령토록 하였다.
제15연대 각 대대들은 2개 대대 병진으로 8월 29일 정오를 기해 공격을 감행하여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병력 손실을 감수하며 9월 1일 04시 돌격으로 목표를 점령하고 좌익의 제7-1대대가 주봉을 점령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인근에 출현한 적 1개 대대를 치열한 교전끝에 섬멸하였다.
(2)조림산-갑령의 공방전
조림산 공방전 상황('50.8.28-9.1)
적82-1개대대
국2-3대대 상동 국2-1대대 조림산 적82연
국2-2대대 국19-3대대 국15-2대대
국2연=국19연
무암동
국19-1대대
봉림동 국19-2대대
국15-2대대
갑령 국19-1대대
국19-3대대 국7-3대대
화남동 국19연
무암 국2연
신녕 국7연
국1사12연대와 진지교대후대기
적은 화산일대의 중요 지형을 탈환한 다음날인 9월 2일 18시를 기해 9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적 제4집단공격집단은 주공인 제8사단에 전차 21대를 증강시켜 의흥-갑령-신녕 축선에 투입하고 조공인 제15사단에 전차 5대를 배석해 죽장-영천 축선에 공격을 해왔다.
아군 제6사단은 8월 28일 제2연대와 제19연대를 재배치한 후 화산탈환작전을 전개하였고, 조림산을 점령한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상동-갑령간 5km지역에 4개 대대를 배치해 조림산을 서쪽과 남쪽에서 포위하는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조림산(638m) 정상의 발목에 쇠줄을 달고 기관총을 쏜 어린 학도병은 북한군일까, 남한 학생일까?"
이런 가운데 제6사단은 제19연대 제3대대와 배속된 제15연대 제2대대로 조림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한다. 하지만 좌측의 제19-3대대는 적의 수류탄 공격에 돈좌되고 철수하게 되고 우측의 제15-2대대는 계속 진출하며 좌측 대대의 지역을 고수하게 된다.
추가병력을 확보한 부대는 8월 31일 다시 공격을 재개하였지만 강력한 공군 화력에도 적은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끝임없는 수류탄을 굴려내렸다. 따라서 중도에 잠시 머물며 병력 장비를 보충할 때에 9월 1일 02시를 기해 적 제82연대가 기습공격을 해왔지만 인접부대들의 지원으로 격퇴한다.
그러나 2시간여의 격전에서 결국 제19-3대대의 조림산 좌측이 피탈되어 결국 우측의 제15-2대대도 축차적으로 철수해 갑령일대의 저지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조곡지와 화곡지에 잠들은 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300고지군 일원)"
따라서 결국 28번 도로상의 종심을 끼고 병력이 배비되고 북한군은 공격기세를 몰아 갑령으로 밀어닥치는 형국에 결국 차후 북진 과정에서 미 제2사단이 군우리에서 중공군에 당한 "태형의 계곡"처럼 앞뒤에서 반격하는 국군에 침투한 적 부대들은 거의 괴멸수준으로 대패하여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파상공격하는 적의 진출에 아군은 바로 도로변 300고지군 일대에서 물러남이 없이 백병전으로 맞서고 특히 야간 기습공격에 이곳에 있는 2개의 저수지에 일부는 깜깜하고 비내리는 상황에 그만 물속으로 빠져 전사하는 숫자가 많았다 한다.
"아 갑령, 오림터널, 그리고 박살난 북한군 전차 21대"
9월 1일 다시 적은 전차 2대를 앞세우고 제19연대 1대대 지역으로 보.전 협동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왔다. 그러나 아군의 화력으로 물러나고 넌덧 마을 사람으로부터 이날 밤 적이 공격을 실시할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 갑령 고갯 마루에 설치된 대전차 지뢰지대까지 적을 유인하고 전차 특공대를 매복시켰다.
이날 밤 20시에 적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해왔고 포병의 종심깊은 포격으로 보전 분리와 대전차 특공조의 활동으로 도로상 앞뒤에서 그리고 측방에서는 3.5인치 로켓포가 작렬하였다. 도로 상에는 또한 우군기의 네이팜탄 폭격이 이어져 북한군은 모든 전차를 잃었다. 그들의 대구방향 진출은 끝났고 더이상 내려오지 못했다.
(4) 화산부근 전투(9월 5일~9월 15일)
(가) 적의 9월 공세와 방어진지의 재편성
9월 2일 저녁 북한군의 9월 공세가 개시되자 육군은 제2군단으로 제한된 반격작전으로 "Y선"회복을 명하고 9월 3일 05시에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우인접의 국군 제8사단이 적의 선공으로 방어지대 좌측방이 돌파되어 주저항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신편인 제7-8연대를 제6사단에 배속하고 제15연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제15연대는 제1사단으로 원복조치 하였다.
하지만 9월 5일 영천방면이 위급해짐에 따라 제2군단은 제6사단과 제1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차출해 영천으로 제8사단에 배속시킨다.
따라서 제6-19연대는 영천으로, 제1-11연대도 영천으로 이동하였으며 제6사단은 갑령 전방 봉림리 일대 28번 도로상 주변 고지로부터 오림터널에 이르는 구간에 종심깊게 병력을 배비하였다.
한편 육군본부는 9월5일 제1군단에 예속 되었던 제8사단을 제2군단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제3사단, 제2군단은 제1사, 제6사, 제8사로 편성되고 제7사단은 육군의 예비대로 각 사단을 증원토록 하였다.
(나) 적의 마지막 총공격
9월 6일 이른 새벽에 적 제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자, 돌파구 확대를 위해 적 제8사단은 07:30을 기해 제6사단 지역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마침 안개가 맑아지면서 구름 사이로 공군기가 출현해 28번도로 상의 북한군을 강타하고 진지상에 있는 연대 병력들은 밀려드는 적을 모두 격퇴하였다. 9월 12일 이후로 적의 공격은 끝났다.
4. 전투 결과
8월말부터 적 제8사단은 인접사단인 적 제13사단 및 제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 돌파를 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마지막 총공세를 감행했다. 하지만 국구 ㄴ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반격, 유엔 공군의 공중공격으로 결국 공격으 ㄴ실패한다.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한 적 제8사단은 조림산-화수동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한다.
한편 9월 6일 총바격계획을 완성한 미 제8군과 육군본부는 기갑부대 운용이 용이한 경부국도 축선에 미 제1군단을 투입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미 제10군단과 연결하여 낙동강 전선에 전개한 적을 포위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에 반해 국군 제2군단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동서 양측방에서 병진해 퇴각하는 적을 격멸하고 38도선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여기서 제6사다능ㄴ 신녕-도원동-함창-예천 축선으로 진격을 담당하게 된다.
9월 16일 총반격명령에 따라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을 주공으로 편성하고, 영천에 있던 제19연대를 원대복귀 시켰다. 하지만 제6사단의 진출은 조림산 일대에 있던 북한군 제2연대의 완강한 저하에 지연되게 되며, 사단은 조림산을 양익포위하고 제2연대는 양동작전으로 마침내 목표를 탈환한다.
육군은 9월 22일, 국군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 우보,구산동,기계,흥해를 탈환하자 총반격명령으로 9월 23일 북진을 개시한다.
5. 유배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안계지역 19연대-19연대의 외침
2000년도에 다부동지역에서 유해발굴중에 의성과 군위지역을 탐문하고 탐사하고 있었다. 그당시에 한분이 안계. 비안에 가면 6사단 19연대 용사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계로 달려가니 열녀각에 많이 묻혔다고 한다. 열녀각은 바로 위양리지역에 28번 도로상 위천강쪽에 있었다. 그곳에 가서 주변 가옥을 탐문하여 그당시에 내용을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찾아 현장에 모셔 제보를 들어보니 이렇다.
"내가 13살 되던해에 전쟁이 나고 이곳은 전쟁이 났는지 뭔지 모르는 가운데 군인들 일부가 비안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바로 민복차림의 또다른 군인이 나타나 모두를 잡아서 이곳에 세워놓고 총을 싸 죽였다. 그러고 얼마있어 워낙 길가라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마을에서 어른들이 동네 프락치들의 통제로 열여각 뒤로 구덩이를 파고 대충 묻었다.
그러다 보니 비가 퍼붓고 나니 발이 보이고 참 보기 역겨워 또 다른 사람들이 흙을 붓고 붓고 했는데 숫자는 10여명이 넘었다. 그 후에 50년 말에 군대에 갔다 왔는데 약간의 봉분마저 보이지 않더라. 지금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증언을 받는 도중에 안계 면대장이 와서 예비군 사무실에 가서 지역 설명을 듣고 또 한명의 제보자를 만나 정안동 석가여래입상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용수로 둑을 올라섰다.
"내가 8살 먹을 때에 전쟁이 나서 뭔지도 모르는데 군인 몇이 이곳에 왔는데 총도 없고 허름한 군복을 입고 어디 물에 빠졌다 나온 모양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혹시나 19연대 모르냐고 해서 19연대를 모른다고 하니 군인들 못봤냐고 물어 길을 가리키며 저리로 갔다고 하니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서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군인이 마구뛰어 논밑으로 굴러서 도망치는데 얼마 못가서 붙잡혀 용수로 둑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여기 저기에 어떤 군인은 도망가고 어떤 군인은 뒤쫒아 가고 나는 신기해서 지켜보았다. 그리다 군인들이 다시 몰려오더니 뭐라고 했는지 꿇어있는 군인이 19연대 19연대19연대를 연창하고 이어 탕 소리와 함께 죽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대로 이자리에 묻었다."
약간의 도톰한 흔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우리가 발굴하나 옷가지같은 유품만 있고 전투화도 없다. 누군가가 벳겨 갔단다. 뼈는 언젠가 문둥병 환자들이 곳곳에 들이닥쳐 보이는대로 다 가져갔다 한다.
나. 봉화재의 전투흔적 그리고 3구의 유해!
교촌리에 서울에서 목회자를 하시는 분이 시골 아버지집에 들렸다면서 우리 차량을 보고 차를 세워 집으로 안내했다. 집에서 올라서면 바로 봉화재다. 서북쪽에는 개천지라는 큰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에는 등산로도 닦아 놓았다. 주요 격전지로 산위래 교통호가즐비하다 하며 어려서 올라가 뼈를 들고 놀았다는 것이다.
올라가니 100여개의 호가 있고 '10년도에 3구를 발굴한다.
다. "236고지(산우물에서 나온 총의 주인?)-밭골재의 혈전"
그러면서 28번도로와 4번도로 사이로 있는 고지군은 모두가 격전지라 하며 옛날 문둥병 환자분들이 이 일대에 많이 들어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익명의 제보자는 군인은 대부분 찾아갔고 여긴 주로 북한군이나 지역 빨갱이가 죽어서 있을 수 있다는 제보도 한다. 정말 대한민국 어려운 동네다.
이 일대는 거의 1주일간 산악탐사를 다하고 '02년도 발굴을 실시하여 무려 17구, '10년도에 1구를 이곳 에서 발굴했다. 특히 235고지 바로 8부 능선에 산우물이 있는데 이곳에 국군을 4구 묻는걸 실제 목격한 분이 찾아와 발굴결과 총도 있었다는데 총이 없다. 권총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 누군가 훔쳐간 것이고 권총이라면 적어도 중대장급인데 아쉬웠다.
라. "매봉산의 혈투"
매봉산은 전사에도 혈전이 벌어졌다고 명시되어 있다. 위천 북쪽에는 마정산이 있고 남쪽에 매봉산인데 이곳은 어디든지 개인호가 널려있다.
효령 오천에서 과수원을 하는 지역 주민을 만나 혹시라도 내용을 아는지 물었더니 본인이 직접 올라서 뼈를 모아서 한곳에 가매장 했다고 한다.
"전쟁 당시는 대구로 피난을 가서 잘모르고 나중에 들어와 형들과 함께 올랐더니 산 능선이 전부 사람뼈고 여기저기 팔다리가 불에 탄 가지에 걸려있기도 하고 전투화, 총도 엄청 많아서 한지게나 지고 파출소에 갔다 주었다. 적군중에는 손에 시계를 10개나 넘게 차고 있어서 그걸 형들이 모두 가져갔다. 철모를 갔다 집 화장실에 사용도 했다."
동행을 혼쾌히 받아들여 올랐다. 특히 25번도로 보이는 능선에 개인호가 많았다. 이곳에서 '01년도에 14구, '10년도에 14구를 발굴했고 금구리의 마정산과 그 능선에서는 2구를 발굴한다.
"이 매봉산 남서쪽 자락에 불타버린 절터(대원군측에서 발화했다는 전설?)가 있고 대원군과 얽힌 묘자리관련 풍수지리 이야기가 무성하다"
마. "365고지- 492고지 혈투"
5번도로상 좌측의 무성리 적라산과 남천을 건너 365고지 일대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장군리에 가면 신기하게 소정방 사당이 있다. 3국시대 백제와 고구려를 짓밟은 장본인인데 이곳에 사당이 있다.
우린 전사에 근거하여 장군리에서 산을 올라 응봉산-구미터널 위-267-적라산으로 연결되는 남북능선과 25번도를 굽어보는 지역 일대 고지는 다 확인하였다. 나는 무려 이곳 다부동 일대에서 10여년간 산을 올랐다. 도로 동쪽도 모두 올랐다.
"개인호 숫자를 보면 10,000개도 넘는다"
나는 적라산에서 유해발굴 탐지장비를 시험평가도 했다. 원래 지뢰 탐지나 지하 동굴을 탐지하는 장비를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GPR"이란 것으로 주파수 대역의 차이를 그래프로 표시하여 주는 것인데 지하 1m까지 탐지가 가능하다. 그러나 뼈와 나뭇가지, 뿌리등의 미세한 차이는 식별이 아직 곤란한 상태라 채택은 못하고 결국 지금도 미국제나 독일제로 금속탐지 장비를 가지고 탄피나 수류탄, 파편등의 금속물질 잔류 여부를 소리로 표시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장비는 대부분 개인호에 그런 금속물질이 남아 있고 특히 등산객들이 마신 캔류나 비닐류등을 매설한 경우 반응을 하는 문제로 실질적인 도움은 어렵다. 다만 그래도 금속물질이 있다면 뭔가 행위가 있을 것이란 판단이 가능하기에 검증단계에서 사용하고 실제는 파 봐야만 아는 것이 유해발굴 이다.
마-1. "금매리 서쪽 365- 492- 324- 655로 이어지는 능선의 전투 탐사"
"배고파서 죽을 뻔한 기억, 어느 절에 들러 구걸(?), 스님이 먹을 밥을 우리가 먹고 다시 밥을 해서 드신 스님"
살다보면 이런일 저런일이 생긴다 한다. 정말 유해를 찾지위해 전국을 탐사하며 죽을 고비도 넘기도 많은 시련이 있다. 원한을 가진 지역 주민에게 멱살을 잡히어 질식해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하고 겁모르고 올라선 구례 백운산 어느 밥봉에서는 깍아지른 바위군에 올라서 더 오르지도 내려오지도 못하는 형국에 계급장이며 소지한 것을 밑으로 떨어뜨려 혹시라도 나중에 우릴 찾으려하는 수색정찰에 할용토록 하고 거꾸로 ㅏ위에 매달리며 운전하는 수환이랑 내려오던 아찔한 상황도 있다. 지뢰밭에 들어가 100m를 이동하는데 1시간 이상 거리며 살아서 빠져 나오고 그래도 유품인 반합을 찾아서 들고 나오는용기와 배짱(?)이 있었다.
이곳을 오른 것은 '01년도 3월이다. 얼마나 그 당시는 추웠는지 모른다. 그 덕분에 흘리는 땀을 적게 하고 올라서서 탐사를 하는데 이거 보이는 것은 모두 개인호다. 그러니 우린 그거에 힘이나서 계속 쫒아가다 보니 시간가는 줄도 몰랐는데 갑작스레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잠깐 올랐다 온다며 고곡리의 대곡사란 절입구로부터 시작된 탐사가 삭골재와 다시 남쪽으로 492고지를 지나는데 허기가 밀려오고 날씨는 춥고 대원 3명은 잠시 산에 올랐다 내려오려던 것이 개인호에 미쳐 탐사하다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산 밑으로 내려서기로 하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니 어느 골짜기 입구에 도달했는데 임시 건물로 되어있는 집이 보여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절이였다. 마침 점심을 하려 하고 있다가 파란 제복을 입고있는 우리를 보더니 "아니고 귀한 분들이 오셨네"라며 준비된 식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고 공양주분이 밥을 다시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이곳 일대는 '01년도에 탐사를 하여 발굴은 '09년도에 시작하여 '10년도까지 39구를 발굴했다.
바. 용수리 558고지 혈투(기갑연대)"
"저기가 시체밭이요"
앞서 제1사단의 전투전사와 관련 탐사내용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용수리는 전사에도 많은 언급이 있는 곳이다. '00년도 한 여름날 지역 탐문과정에 용수리 삼거리에서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 혹시나 하고 물어 본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지금이야 전사에 관련된 내용을 알지만 그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발로 찾아다니는 시절이라 주민의 제보가 전부였다.
"내가 군대갔다 오니 산에 나무가 없어. 그래서 올라가 보니 전부 사람 뼈가그대로 있어요. 괭이로 일부는 긁어서 묻었는데 당시에 문등병 환자분들이 저 너머에 많이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참전용사였다.
대둔사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여 서에서 동으로 능선을 따라 탐사하다 실제 뼈를 발견도 하고 주변에 셀수없는 개인호를 발견하여 '07년도에 발굴하여 57구 발굴, 이어서 바로 매곡리 고매지 저수지를 끼고 올라선 고지에서 '09년도에 13발굴했다.
사.국통산의 10여차례 백병전"
좌측은 5번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동에서 서로 위천강이 흐르고 우보에는 중앙선과 국도 28번도로가 있는 곳이 군위군이다. 이 효령과 우보는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8사단과 전투한 곳으로 어느 산에 올라가도 흔적이 있다.
국통산은 350m고지의 낮은 산이지만 이곳의 가장 양호한 횡격실 능선으로 사방이 모두 감제관측되는 지형이다. 또한 위로는 편달산 손두산으로 해서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이어진다
그러니 이곳을 확보하기 위해 8~9월 전투시 국군과 북한군은 수많은 백병전을 치뤄야 했고 결국 이곳을 북한군이 차지하면서 마지막 9월 공세의 준비를 갖추게 되는 곳이다.
전사적 사실에 올라가 주변을 탐사한 결과 개인호 숫자는 실셈이 무의미 하고 각종 탄피나 완탄들이 널려있다. 이 주변 마을에는 전쟁직 후에 불발탄을 잘못 건드려 죽거나 부상으로 불구자가 수없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04년부터 '12년까지 10여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아. 순호지의 비밀 "일병 민영학 발굴"
이곳은 북쪽에 의성군 금성면이 있고 금성산(530m)과 비봉산(672m)이 있다. 의성 봉양에서 합류되는 쌍계천이 흐르고 68번 도로와 79번 도로, 중앙선이 발달하여 이곳에서 의흥으로 해서 신녕에 이르는 양호한 지형이다.
어느날 '10년도에 서울에 현충원에 일요일에 한분이 찾아와 나를 만났다. 본인의 집이 순호리 저수지 옆에 산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하다 전쟁이 나서 피난을 고향으로 와서 빙계온천이 있는 선암산(810m)에 숨어서 지내다 몰래 집에가서 먹을 것을 구해 2개월 정도를 산속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은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만 남고 모두 대구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6사단 19연대들이 동네로 들어와 머물다 엄청 죽어서 저수지 둑에도 시신이 있고 지경재로부터 선암산 이르는 능선에 쌓여 있었다. 얼마전에 가보니 흔적도 없는데 그곳 일대를 파보면 분명 시신이 있다"
나는 바로 탐사를 시작했고 우리가 간 날에 실제 이 제보자분이 고향에 오셔서 일부구간을 함께 탐사도 했다. '10년도 14구의 유해를 발굴 했고 DNA 감식으로 "일병 민영학님"이 확인되어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
아.우보역 앞 미성리 위천 넘어에 있는 바위일대(용사님들이 조개바위로 칭함)에 백병전으로 수없이 전사
이곳 탐사에는 제6사단 참전용사 전우회에서 얼마전 운명하신 김용철님이 19연대 출신으로 참석해 주었다. 서울에서부터 출발하여 이곳 우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데 농협 옆 식당이다.
"혹시 이 동네에 나이드신 분들 없나요?" 김선배가 식사를 들고온 아주머니께 질문을 던졌다.
"저기 건너편에 할아버지가 이동네 노인회장으로 여기 토백이신데요"
우린 식사마치기를 기다려 어르신을 만났다. 용사님과 나이가 비슷한 70대 중반이다.
"혹시 전쟁때 여기에 사셨습니까, 아니면 군에 가셨습니까?"
"그 당시 20살인데 키가 워낙 작아서 군대는 안갔고 나중에 방위병으로 갔다가 왔지요"
"그럼 저기 강건너 바위있잖아요, 그곳에 군인들이 많이 죽었는데 혹시 보셨는지요?
"나는 거기는 안가보았고 조림산에 가서 군화도 벗겨오고 총도 몇자루 주어다 파출소에 준적은 있어요"
"그럼 이동네는 어디에 시신이 있었는지 아시나요?" 나의 지룬이다.
"어디라 할 것없이 그 당시는 산이고 논이고 밭이고 여기저기 시체가 뒹굴어 다녔으니, 그러다 몇번 수해가 나면서 모두 씰려간는지 언제부터는 보이지 않아요"
용사님의 증언이 아무리 전쟁중이고 한순간에 생사가 왔다갔다 하지만 그 나이에 바라보는 그 바위가 하도 기이해서 이곳에서 전투한 분들은 대다수가 다 기억한다고 한다. "0알 바위라고 하면은"
특히 공격해 오면 북한군이 이 바위를 올라서야 우보일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국군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이 일대에서 육박전 대낮에도 벌어져 적군이 죽으면 바위에서 굴려버린다고 한다.
자. 사전협조없는 지뢰매설의 비극, 제5연대장 이영규 중령, 제2연대 제3대대장 이운산 소령의 전사"
계속적인 북한군의 압력으로 의흥-신녕축선의 위협이 증가하자 각 지역 공병대와 전투부대간의 협조하에 지뢰를 매설토록 당시에 통제가 되자 활발하게 장애물 설치가 이뤄지는 과정에 발생한 비극으로 주요 지휘관뿐만 아니라 인접한 보병과 공병도 큰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에 이를 목격한 산성의 한 지역주민의 이야기는 말로 표현이 어려웠다.
" 총맞고 죽은 것은 죽은 것도 아니야. 비행기 폭탄에 맞아 죽는거같이 사람이 붕 떠서 찢어져 죽는거야. 차량도 어떻게 붕 날라 올라 떨어져. 한두명이 아니고 몇십명이 죽고 이 일대는 완전히 살점과 피비린내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끔직한 모습이었지"
차. 화산 제3사관학교 유격훈련장 조성간 노출된 성벽의 유해들의 진혼곡(전 유재열 제3군사령관의 증언)"
어느날 현충원에 전 3군사령관을 역임한 예비역 육군 대장이신 유재열 장군님이 '09년도에 오셨다. 장군님은 내가 대대장을 보직받을 때에 제5군장으로 중령 진급신고를 했던 분이다.
"어이 영천 3사관학교 유격장 아나?"
"네 제가 그곳 출신으로 16기 생입니다. 유격훈련과 공수 훈련을 그곳에서 받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 학교 만들때에 공사 책임자인데 도쟈로 땅을 미는데 전수 사람뼈야. 그래서 모아서 거기가면 성터가 있는데 그 위치로 많이 옮겨 놓았거든. 거기서 무슨 전투가 있었나?"
"네 그것에서 우리 제6사단에 배속된 제7사단 제8연대병력, 제1사단 제15연대 병력이 북한군 제8사단과 '50년 8월 말부터 9월중순까지 전투 했습니다."
"어 너는 전사를 잘 아네. 그래 그렇게 전사를 꿰고 있어야 되지"
나는 그 해 가을날 이곳을 탐사했다. 차로 꼭대기까지진출이 가능하다. 포장길로 지금도 유격훈련장이 위치하고 있다. 그 짜릿하고 어처구니없이 기막힌 훈련모습이 뇌리에 가득하게 안고 오르는 길에 한소나무에 산머루가 열렸는데 정말 미치도록 열렸다. 소나무 한그루를 완전히 통채로 휘감고 있어 어키고설키게 열렸던 그 머루를 실커 따서 먹기도 하고 가져와 약술을 담긷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무론 이곳은 '01년도부터 오르며 던넉이나 옛 갑령길과 그 국민학교(폐교) 자리등을 찾아 다니먀 자료를 축적하고 있었고 한광사란 절에 들어가 지역관련 제보도 들었다. 이곳 신녕 예비군 지휘관이 14기 선배로 권대위님이었다고 기억된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권응수 장군(임진왜란시 장군)의 후손이었다.
산성을 끼고 개인호가 있고 그 드넓은 정상이 대부분 훈련장이고 지금은 많은 부분이 민간이 들어와 경작을 하는데 그래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 일대서 '01년도에 1구, '03년도에 1구, '10년도에 17구의 유해발굴 했다.
카. 조림산(638m) 정상의 발목에 쇠줄을 달고 기관총을 쏜 어린 학도병은 북한군일까, 남한 학생일까?"
전사에 이 조림산은 적군이 먼저 무혈입성하여 우리가 서남쪽에서 공격해 올라가며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산성 화본리와 화전리 가면 피밭골이 있다. 나는 이 지명에 솔깃해서 주변에 대한 탐문을 '00년도부터 자주했다.
그런 어느날' 고로면 예비군 중대장님이 당시에 예비역 대위인 삼사 7기생이었다. 이 분이 나를 불러서 갔더니 고로교가 있는 삼거리 음식점에서 식사를 사주시고 지역관련 제보를 해 주었다. 물론 화산도 포함하여 말이다. 옥녀봉에도 함께 오르고 조림산을 북에서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개인호가 벌집처럼 구축되었는데 나무들이 자라지도 않는다. 제보에 의하면 이곳에 얼마전까지도 발목을 묶은 쇠고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병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고 남쪽에서 오르는 아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게 강제한 현장이다. 이런 곳은 충북 미원에서도 있었는데 또 보았다.
어느날에는 남쪽에서 올랐다. 이른 봄날인데 한참을 오르는데 웬 땅파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느릅나무를 캐고 있다.
"할아버지 이걸 뭐하려고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오셔서 캐세요?"
"응- 아들이 집에 오면 주려고"
"아들이 어디 아프세요?"
"위가 안좋아. 서울에 있는데 여름날 올거야. 그럼 껍질을 말려서 주려고"
우린 어울려서 할아버지를 도와드렸다. 시간이 점심시간이라 우리는 김밥으로 할아버지는 도시락(벤또?)을 갔고 계시다 와 오랜만에 보는 도시락인데 량이 엄청나다. 밥 밑에는 계란이 깔려있는 멋진 점심이다. 그걸 다 드신다.
우리가 서로 나눠 메고 하산을 서둘러 집에 왔다. 할머니가 있는데 젊어보인다. 혼자 살다보니 동네에서 착한 분을 들였다 한다. 내외만 사는 쓸쓸한 집이다.
그리고 함께 탐사를 갔다. 산판길을 걸어서 어르신이 직접 묻었다는 곳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50년 세월에 몇번의 산불이 나고 수해가 나고 찾기란 힘들다.
우린 조림산 일대에서 '01년도에 13구등 지금까지 20여구, 동쪽 옥녀봉일대에서 '04년도에 12구 많은 유해를 발굴했다.
타. 조곡지와 화곡지에 잠들은 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300고지군 일원)"
"아니 저 저수지를 발굴하세요. 많은 분이 뛰어들어 죽었다는데?"
아마도 이곳 다부동과 갑령일대는 '00년부터 '10년까지는 1년에 거의 한달은 이곳에서 살았다. 이지역 모든 산을 높거나 낮거나 다 올랐다고 보면 된다. 마을마다 노인정은 모두 찾아 다녔다. 그만큼 초기전투에서 이곳이 갖는 중요성이 높다는 것이다.
'00년도 봄에 제6사단 참전용사님인 정규태님이 충북 음성의 동락전투 현장과 이곳 탐사에 동행했다. 제19연대에서 정훈 담당 업무를 했다고 한다. 음성에 가면 동락지구 참전 기념비가 왜 둘인지의 의문점과 동락국민학교 김여교사의 제보로 적의 진출을 알고 기습작전으로 승리했는지의 소설같은 이야기의 실체를 나누며 이곳 갑령에 다다랐다.
그런데 마침 지역주민이 이곳 28번도로를 경운기를 몰고 가다 갑령휴게소에 머물렀다. 연세가 들어보여 나가서서 대하를 나눠보니 이곳 사람이고 전쟁기간중에도 나이가 어려서 피난도 안가고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머물렀다고 한다.
"그럼 이 일대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모습을 보았겠네요?"
"그럼요, 저기 산에 있는 호마다 한명씩은 있을걸요. 우리 어려서 올라가 탄피뿐만 아니라 호주머니에서 돈도 꺼내서 형들이 가져갔어요. 그리고 저기 보이는 저수지에 그렇게 많이 군인들이 들어가 죽었다는데 왜 발굴하지 않는가요?"
'01년도에 28번도로를 끼고 300고지군 일대의 개인호는 다 발굴 하여 28구의 유해를 찾았다.
"일본 주화를 많이 갔고 있던 유해도 있었다. 일본 제일교포 학도의용군인지도 모른다"
"어느날에는 충북대 발굴팀의 여자중 한명이 밤에 꿈을 꾸다 여군에게 뺨을 맞는 꿈을 꾸었다는데 우리는 그날 여자로 판단되는 유해도 발굴 했다."
그리고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한 것은 어느 참나무 뿌리를 안고 있는 유해였다. 나무가 참나무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움크린 유해의 가운데로 참나무가 자라나 정말 묘한 기분을 우리에게 던졌다.
"그 모진 세월 참나무는 알고 있겠지...!"
나중에 한 노인으로부터 북진한 이후 전쟁기간중에 저 저수지 둘다 물을 빼고 정말 죽어있는 시신을 건져내는 작업이 있었다는 제보를 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북한군 여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많았다 한다.
파. 아 갑령, 오림터널, 그리고 박살난 북한군 전차 21대"
우린 28번도로를 따라 종으로 웬만한 곳은 다 발굴했다. 이런 과정에 오림터널 위에서도 백병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지역주민으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물론 이곳에서 북한군 탱크가 박살났다는 것은 전사책에 있다. 또한 미군의 네이팜탄 사격으로 북한군이 끝장났다는 것도 있다.
"북한군 장군 포제 계급장의 진실?"
하지만 실제 '02년도에 올라가 본 나는 놀랐다. 정말 옹기종기 유해가 모여서 죽어갔다. 그리고 '03년도에 16구의 유해가 발굴되는데 이곳에서 북한군 별이 달린 포제 유품도 찾았는데 햇빛이 보이는 순간 흐물흐물 해져서 보관이 안되고 사진으로도 남겨지지 못했다. 지금 그들의 계급장과는 다른데 의문점은 남고... .
5. 소련군 군사 고문관 라조바예프의 보고서 검토
이 보고서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이렇게 대량으로 그들의 전차가 파괴된 사실도 없고 피상적인 내용에 아군이 퇴각할 때를 기다리는 등의 결정적이지 못한 행동과 결국 북한군 제8사단은 아군의 강력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북쪽 방면으로 9월 22일 부터 무질서하게 철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제1권 222페이지)
제 3절 의성- 보현산지역 전투
1. 전투 개요
의성- 보현산지역 전투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과 수도사단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4일까지 의성-신녕-영천을 점령하고 대구를 공격하기 위해 남진하던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8사단 및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안동-의성간 축선과 보현산 일대에서 수행한 작전을 일컫는다.
'50. 7. 31일 19시에 제1군단 명령으로 안동일대에서 낙동강을 도하한 제8사단은 낙동강 남안에 약 20km의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다 다시 전선을 조정하여 의성 북방 10km지점의 향로봉과 그 일대로 방어진지를 유지한다.
한편 안동을 점령한 북한군 제8사단은 중동부 전선에 전개한 적 제2군단 예하 2개 공격제대 중 주공으로 대구를 최종목표로 안동-의성-신녕-대구 축선을 따라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8월 4일 14시부터 적 제8사단과 교전을 개시한 국군 제8사단은 향로봉 일대의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8월 12일까지 의성을 고수하였다. 이에 따라 대구를 조기에 점령하려던 적들의 계획은 차질을 가져왔고 국군은 서측방에서 후퇴하는 제6사단이 주저항선을 구축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13일 제1군단의 전선 재조정에 따라 "Y"선, 즉 매봉-노고령-보현산-홍화봉을 연결하는 선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
그러나 좌인접의 국군 제6사단이 화산-갑령-370고지 선으로 철수한데 이오 우측의 수도사단마저 적 제12사단의 기습공격으로 다시 기계를 피탈당하고 안강으로 철수함으로써 방어지역의 좌우측방이 노출되었다.
한편 적 제15사단은 운주산과 봉화봉 사이에 형성된 공백지대를 이용하여 죽장-자양-영천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시켜 9월 2일 저녁 공격을 개시하여 이틀만에 자양을 점령하고 영천을 위협한다.
이와같이 불리한 상황에서 제8사단은 배속된 제5연대와 제3-1대대를 기룡산과 자양에 투입하여 적을 지연하고 분산 철수하는 제16연대 병력을 수습하였으나 강력한 기세로 남진하는 적에게 결국 일시적으로 영천을 피탈당하게 된다.
하지만 대구점령을 목표로 남진하는 적은 보급거리의 신장과 계속되는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남진속도가 둔화 되면서 8월 1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우리는 재반격의 기회를 갖게 된다.
2. 북한군과 아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안동 철수 작전의 실패로 낙동강-반변천 연변에 방어선 형성이 어렵게 된 국군의 취약점을 간파한 북한군 제2군단은 '50. 8월 2일부터 예하의 제8사단을 안동-의성 축선에 투입하여 최종목표인 대구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또한 적 제15사단은 보현산 일대의 공백지대를 통해 죽장-자양-영천 축선에 전투력을 집중시켜 돌파구를 형성하고 영천을 위협하였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의 제8, 제15사단은 약 24,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제8사단장이 ㅇ백룡 소장이고, 제15사단장은 박성철 소장이고 독립 유격부대인 제766부대장은 오진우 총좌였다.
이들이 보유한 무기 및 장비는 전차 5대, 장갑차 3대, 122밀리 고고사포 18문, 76밀리 곡사포 30문, 45밀리 대전차포 39문, 82밀리 및 120밀리 박격포 60문 등이다.
북한군은 남침 초기에 비해 전투력이 50~60%수준으로 격감하였고 남한에서 병력의 강제 동원과 물자를 보충하는 등 공세작전을 펼치기에는 무리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 국군 상황
국군 제8사단은 의성지구 전투를 종료하고 보현산 일대로 이동해 '50. 8월 16일을 기해 매봉-노고령-보현산-봉화봉을 연결하는 선에 주저항선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좌측방의 제6사단과 우측방의 수도사단이 철수함으로써 좌우측이 노출되는 불안한 상황에 처하였다.
한편 의성-보현산지구 전투에 참여한 제8사단은 배속된 제18연대를 포함하여 8,1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이성가 대령(8.2일 이후는 최덕신)이고 제10연대장이 고근홍 중령, 제16연대장이 김동수 중령(8.11이후 유의준, 여기에 제1대대장에 8.8일부터 채명신 대위가 일시 보직된다)이다. 육본직할 부대장으로 제17연대장 김희준 중령,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 제1유격대대, 제2유격대대, 건설공병대대가 있었다. 장비는 107밀리 유탄포 18문, 57밀리 대전차포 4문, 2.36인치 로켓포 201문, 60밀리 박격포 27문 등이다.
3. 전투 경과
가. 의성지구 전투
(1) 국군 제8사단의 주저항선 편성
국군 제8사단의 방어진지 편성('50.8.3)
낙동강 안동 적12사
풍산 적8사(-)
낙동강 낙동강 낙동강 반변천
낙동강 정하동 국10연 정상동
낙동강 검안동 수하동 낙동강
인금동 적8-83연 국21-2대 국21연(-) 국21연=국10연 적1개중대
미천
국8-16연 수상동
무릉동
원호동
국10-2대 구천동 갈마산
국21-3대(-) 망호동
삼거리 국21-3-11중 국21=국10연 구미동
국10-1대 426 국10-3대
국10-1대
따우재 향로봉 261 555 국10-2대
국21-1대 후평동
송내동 국10연(전)
거무골 국21-2대 바람골
366 국21-3대 포토산 242
장림동 국21연 단촌 국8-16연
우두동 국8사
사단은 8월 1일 02시를 기해 낙동강 남안으로 이동해 안동 남쪽 12km지점의 운산에 사단지휘소를 설치하고 적의 낙동강 도하에 대비하였다. 제21연대를 좌측에, 제10연대를 우측에 강변에 배치하여 적의 도하를 차단하고 도하과정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은 제16연대는 신기동에서 부대를 수습한 후에 예비가 되었다.
한편 7월 29일 안동 서방 10km 지점의 하리와 안동 북방 12km 지역의 옹천동으로부터 공격을 재개한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1일 새벽에 안동을 점령하고 신덕동 지역의 반변천 남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안동사단"이란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도하정찰만을 시도할 뿐 대체로 평온한 전선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예천을 침공한 적 제8사단 제83연대는 풍산지역에서 야간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아군의 공백지대로 침투하여 인금동부근까지 진출함으로써 국군은 어쩔 수 없이 다음 진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군단은 8월 2일 20시에 군단은 현 방어선을 포기하고 향로봉-길안-청송을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토록 하여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사단 전술지휘소를 의성 북쪽 우두동에 두고 좌전방에 제21연대로 366고지-향로봉 일대를, 제10연대는 우측방으로 망호동-등운산 간 8km를, 예비인 제16연대는 단촌에 집결 대기토록 한다.
하지만 인접 부대인 좌측의 국군 제6사단은 의성에서 20km 떨어진 안계지역에 주저항선을, 우측의 수도사단은 약 5km에 달하는 병력배치 간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2) 향로봉 전투와 주저항선의 붕괴
북한군 제8사단은 예천 지역으로부터 의성 방면에 투입되어 8월 4일경 안동 서쪽의 마애동과 계평동 일대에서 은밀도하를 개시하여 제83연대를 의성 방면으로 철수하는 수도사단 제1연대를 추격하면서 진출하고 있었다
.
적 제8사단은 05시를 기해 국군 제8사단 일반전초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군단은 8월 4일 오후에 사단장을 이성가 대령에서 최덕신 대령으로 교체하였다.
사단은 8월 5일 02시경에 새로운 주저항선으로 이동을 개시하였으나 적 제83연대의 공격으로 좌측의 366고지와 중앙 향로봉지역이 돌파되면서 연대 주저항선이 돌파 된다. 5번국도를 중앙으로 좌측의 제21연대와 우측의 제10연대는 지대내 중앙으로 들어오는 예비인 제16연대와 새로운 저항선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3) 259고지 기습전과 아군의 파쇄공격
국군 제8사단의 파쇄공격 상황('50.8.10)
적83-1개 대대 적 1개 대대
따우재 향로봉 261
후평동
벼랑골 은행동 송내동
적1개 대대 진출한게선 적1개 대대
포토산 242 안정동 396
하화터널 적1개 대대
장림동 적1개 대대 단촌
216
매봉산 우두동
적1개 대대 국수도-18연 국8-10연 국 8-16연
창갈동 바곡동 석탑동 행촌
국8-21연(-) 괴산동 철파동 국8사(전)
의성 국수도사(전)
제8사단장은 의성 방어에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향로봉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8월 7일 08시에 제21연대(-)를 좌일선에 제16연대(-)를 우일선으로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섰다.
당시 아군은 길안-청송-지구를 방어하던 수도사단이 8월 6일 의성으로 철수함에 따라 제1군단의 중동부 전선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육군본부는 의성의 고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라 제8사단은 역습을 제16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제21연대 제1대대가 8월 8일 여명을 기해 공격을 했으나 실패로 돌아서고 적의 역습으로 오히려 의성이 피탈될 위기에 처한다.
이 무렵 제10연대 제1대대가 지금의 단촌면 소재지 하화터널부근에서 259고지일대에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진격을 중지하고 단촌 북방으로 철수한다.
한편 반변천을 도하한 적 제12사단은 안동-길안-청송 지구를 방어하던 수도사단이 의성으로 철수하면서 그 공백을 이용하여 8월 9일 기계를 점령한다. 이는 경주가 위협받는 위급상황이었다.
이에 군단에서는 재랫재에 형성된 방어선을 단촌 북방으로 밀어올려야 한다고 판단하고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제8사단에 배속하였다.
그리고 8월 10일 18시를 기해 좌전방 제21연대는 매봉(응봉)을 향해, 5번국도 우두동일대의 주공은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좌익으로 장림동 방향으로 중앙의 제8-10연대가 하화터널 방향으로 단촌에, 우익의 제8-16연대가 행촌에서 후평동 방향(건마산)으로 공격을 개시 하였다.
따라서 벼랑골에서 단촌-후평동-송내리 남쪽 건마산까지 진출했으나 8월 13일부터 적의 대규모 반격으로 각 연대는 통신두절상태에서 의성 동남방으로 철수하여 구산동- 도평동선에 2개 연대, 보현산 일대에 투입하게 된다
나. 보현산지구 전투
(1) 도평동 쟁탈전
1950. 7월 중순 국립경찰 강원도경찰 비상경비사령부 예하의 전투경찰 제3대대와 제6대대는 청송과 도평동 일대에서 청송-기계 및 의성-기계로 통하는 도로 교차점인 도평동을 점령하고 아군 전방부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북한군 제766부대와 격전을 전개하여 승리하면서 은신한 잔적소탕에 돌입하자 잔적 중 일부가 보현산에 거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증원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청송 방면으로 침입한 적 제12사단의 일부 병력이 제766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도평(현동)을 거쳐 입암으로 남하하여 8월 7일 보현산 유격대와 합류한다.
제18연대 및 기갑연대 기동축선('50.8.14)
기갑연대 국18-2대 도평동 국18-3대
국18-1대
475 361 569
자초산
적1개 중대
663 503
월매동
571 520
882
487
484
875
배틀봉 566 545
민봉산 673 538 국18-3대
두마리 죽장 침곡동
보현산 적1개 대대
수석봉 650 봉화봉 국18-2대
광천리
441
기갑연(-)
한편 국군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보현산 일대의 소탕작전은 경찰병력만으로는 적 제766부대를 소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7월 26일 군단에 배속된 제1201건설공병단을 구산동에, 29일에는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를 보현산에 투입한다. 이 부대는 원래 동해안의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속 되었으나 거리가 너무멀고 통신관계로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국군의 제1유격대대는 8월 6일 공격을 개시하여 보현산을 점령하게 되고 밀려난 적은 도평동에서 죽장을 경유 기계로 연결되는 도로 양쪽 중요 지형을 점령하고 다음날인 8월 7일 도평동에 진출한 적 제12사단과 합류한다.
이런 과정에 적의 일부가 먼저 기계에 진입하고 이어서 국군이 그 뒤를 따라 진입하는 신기한 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남동쪽에서 아군이 진출하고 북쪽에서 내려오고 중간에 적은 서로 연결작전을 진행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진 이곳 보현산 우측 도평(현동)과 죽장(입암)사이에 주요 고지마다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적이 이미 31번도로상 주요 감제고지인 죽장 입암의 수석봉과 봉화봉을 점령하고 있음으로서 기계에 배치된 해군육전대와 제1201건설공병단의 진출이 어려움을 격게 되었다.
따라서 자천에 머물고 있던 제1유격대는 8월 9일 지동에서 영천방향으로 남하하는 적 1개연대를 기룡산 동남방 자양의 일견 일대에 매복으로 일망 타진하게 되고 적은 충효동으로 물러나면서 제1유격대대는 입암의 봉화봉-수석봉에 배치된 적을 공격하여 2일간의 격전끝에 8월 11일 탈환하고 12일에는 아군기의 오폭으로 피아간에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봉화봉도 탈환하였다.
하지만 8월 13일 적 2개 대대의 공격으로 각 고지에서 밀려나게 된다.
(2) 주저항선 편성과 입암 점령
입암에 진출한 적 제12사단이 기계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자 국군 제1군단장은 8월 9일 의성에서 재편중인 기갑연대를 구산동으로 진출시켜 적정을 수색하는 등 상황에 대비토록 한다. 또한 8월 12일에는 배속이 해제된 제18연대를 도평동에 투입해 지역을 확보하면서 기갑연대를 지원토록 하였다.
이 무렵 피아의 상황은 적 제5사단이 포항을 점령한데 이어 영덕에서 철수를 시작한 제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고 있었다. 또한 적 제12사단의 주력이 기계에 진입해 국군 제17연대 및 수도사단 제1연대와 기계-안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보현산지구 방어임무를 제8사단에 부여한 제1군단은 기계로 진출한 적 제12사단을 남북에서 협공한다는 계획에 따라 8월 14일 제18연대(31번도로 좌우측 도로 고지를 따라 죽장-침곡산 방향)와 기갑연대(현동-882-안봉산-두마리-수석봉-지동)는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일 입암과 봉화봉을 점령하여 제1,2유격대대와도 연결작전이 가능해졌다. 적은 기계방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기계-포항지구는 아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적이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전황이 호전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1군단은 8월 17일 제8사단의 10연대와 작전통제를 받고있는 유격제1,2대대를 기계전투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부대가 기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17연대가 먼저 점령한 이후였다.
8월 18일 우측의 수도사단이 육본 명령으로 비학산을 공격하면서 제8사단 예하의 제16연대는 수석봉-광천동간 방어진지를 점령한다. 한편 남하를 시도하던 적 제8사단 예하 1개 연대는 구산동(청송 현서면)에서 우회, 제21연대 제3대대가 점령중인 633고지를 공격하였으나 격퇴당한다.
8월 19일 적의 남하에 대비하여 주저항선에서 진지를 강화하면서 구지동 일대에서 수색작전을 병행하고 운주산을공격하던 제1유격대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서 제8사단으로 배속되고 다음날 제2유격대대와 대구로 이동한다.
(3) 고모산과 봉화봉 공방전
8월 22일 이른 아침 제8사단 방어정면에 단대호 미상의 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포항지구전투사령관에서 다시 제8사단으로 부임한 이성가 대령은 정면의 적을 격퇴하기 위해 예하 연대에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지역은 청송 현서의 구산리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두봉-문봉산-어봉산에 이르는 능선과 35번 지방도 우측의 현서면 백자리 모래실-569-고모산-대정산에 이르는 능선에서 산두봉-569고지선을 확보하는 것이였다.
제21연대는 569고지에서 물러난 적이 다시 모래실에서 남하 고모산을 점령하여 배후를 차단하려 함으로써 다시 남쪽에서 고모산을 공격토록하여 8월 23일 백병전으로 고모산을 점령하여 8월 27일까지 확보한다.
한편 제16연대는 8월 21일부터 입암 북쪽 방흥리 610고지에 적 1개 대대규모가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개양재-수석봉간 능선 접근로에 있는 610고지를 8월 23일 09:30분에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한편 제1군단은 '50. 8. 25일을 기해 제8사단과 수도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침곡동-감곡동-점말-428고지를 연하는 선으로 하고 봉화봉에 대한 방어는 제8사단이 , 운주산의 방어는 수도사단이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제8사단의 정면이 약 3km 확대됨에 따라 방어배치 정면을 조정하여 좌전방 제21연대는 동평동-838고지간, 우전방 제16연대는 838-봉화봉간으로 하고 경찰은 제16연대에 배속하였다.
이와 같이 제8사단이 방어지역 재편성간에 청송 방면에서 남하한 적 제15사단이 부근의 적과 함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15사단의 투입은 기계방면의 제12사단과 동해안의 제5사단의 상호 협공작전으로 영천 방면으로 돌파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군단은 8월 25일 강원도 경찰(제3대대.5대대)을 전선 중앙에 배치하고 공군이 적에 대한 폭격으로 아군을 지원하는가운데 적 제15사단이 국군 제8-16연대의 방어정면인 보현산-입암간 일대로 침투활동을 전개하였다.
적 제15사단은 8월 26일 05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왔으며 결국 몇번의 고지쟁탈전이 벌어진 가운데 8월 29일 완전히 적이 봉화봉을 장악하게 된다.
(4) 수석봉 공방전과 주저항선의 붕괴
8월 26일 새벽부터 제16연대 방어정면에서 시작된 공방전은 봉화봉에 이어 수석봉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고 여기에 지원하는 전폭기의 네이팜탄 폭격이 오폭으로 쌍방간에 대규모 피해가 같이 발생하기도 하면서 보현산 선에서 다음의 기룡산 선으로 축차 철수하게 된다.
한편 적 제15사단은 9월 2일 18시에 제50연대로 하여금 수석봉과 428고지 일대에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으로 포문을 열고 밀어붙여 수석봉에서 운주산까지 약 8km의 돌파구가 형성된다.
따라서 육본에서는 제7사단 제5연대(-)를 9월 3일부로 제8사단에 배속하는 한편 우발사태시 제8사단을 지휘할 수 있도록 제2군단에 명령하였다.
제16연대는 사단의 진지전환명령에 따라 9월 3일 오후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지정된 방어지역으로 진지편성을 하게 되는 과정에 이미 아군 깊숙히 침투한 적에게 측방이 노출되어 부대가 와해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격으며 자호천을 따라 자양동으로 빠져 나가는 과정에 사단의 우측방에 돌파구가 형성된 것이다.
(5) 제5연대의 증원과 적의 최후공세
제6사단에 배속되어 운용되던 제5연대는 9월 2일 명에 따라 제8사단에 배속되어 제16연대 지역으로 이동해 왔다. 자양 용산리 우측 333고지 일대에 방어지역을 편성한 부대는 9월 3일부터 적의 공격을 받아 저항할 겨를도 없이 분산되어 철수를 강요받게 된다. 이에 제5연대장은 한때는 역습도 했으나 적의 강력한 반격으로 자호천을 넘어 철수하게 된다.
한편 제8사단장은 818고지에서 후퇴한 제3연대 제1대대에게 9월 3일부로 기룡산을 점령토록 한다. 그러나 이미 적이 선점하여 고지 중턱에서 교전을 하게 되고 기룡산 우단의 741-충효동 333고지간의 제16연대는 적에게 포위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삼매리 남방 평천동으로 철수했다.
한편 인구동(현재 수몰됨)북쪽 405고지(기룡산 남쪽 일대 ?)에 있던 제3연대 제1대대는 포위되어 육박전 등 모든 대원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탈출했으나 영천 망정삼거리에 재집결하여 병력을 점검결과 1,800명이 800명에 불과 했다.
한편 노고령과 보현산 일대를 방어하던 제21연대는 제16연대의 철수에 따라 보현산에 배치된 전투경찰대대를 9월 3일 자천으로 철수시키고 연대도 결국 보현산에서 자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결국 제8사단은 보현산, 기룡산 지역을 적에게 내주고 영천 북쪽에서 적 제15사단을 맞이하게 된다.
4. 전투 결과
국군 제8사단은 낙동강 도하로부터 의성 철수시까지 13일간 병력 및 장비의 절대적 열세를 그그복하고 지연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한다. 이때 국구 ㄴ제8사다능ㄴ 안동ㅇ-의성간 주보급로를 중심으로 축차적인 바어진지를 형성, 방어와 공격을 병행하여 적 제8사단의 남진을 저지하고 지연시킨다.
이 전투로 적은 동부전선의 진출이 지연되어 왜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적 제15사단을 청송지역으로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하게 하는 한편 목표로한 8월 15일까지 대구점령을 실패함으로써 전쟁 목표 달성에 차질을 가져온다.
반면에 아군은 부대를 재편하고 정리하여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획득하였다.
한편 보현산 일대로 이동해 주저항선을 형성한 제8사단은 22일간 우세한 전력의 적 제8사단과 제766부대를 억류하고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신편으로 이한 훈련부족과 병력 및 장비의 열세로 결국 기룡산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8월 15일 이후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하여 팔공산 전방의, 국군 제1사단과 대치중인 제15사단을 투입함으로서 국군 제8사단은 강원경찰대대, 유격 대대, 독립 제1대대 등이 9월 4일을 기해 연결 작전을 위해 진지를 이동하여 영천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하게 된다.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회암철교(향로봉 동쪽) 밑에 묻힌 아군의 실체?"
영주에서 안동에 이르는 국도변에는 많은 국군이 전사를 한다. 길을 잘 모르니 부대가 기습으로 무너지면 많은 인원이 길이나 철로를 따라 이동하다 죽게 된다.
이곳 향로봉도 워낙 전투가 치열하여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이 알고 있는 곳이다. 5번도로에 중앙선이 지나는 곳이다. 산에 올라서니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능선 전부가 개인호다. 우리는 그 더웠던 '00년 7월에 이곳을 탐사하고 지역주민을 만났다. 향로봉을 탐사하고 망진리라는 곳으로 내려오는데 조그만 개천이 흐르고 있다.
논에서 벼를 놀보는 농부를 만나 혹시나 물었더니 회암철교 밑에 본인이 직접 묻는 것을 본 장소가 있다고 한다.
"그걸 어떻게 기억하세요?"
"동네 어른들이 부역으로 가서 여기저기 묻는데 저 산도 다 묻었어.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다녔지요. 그래서 알아. 옛날에는 그런 곳만 골라서 나주에 다시 파가지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꺼내서 가져가기도 했어요."
"그럼 혹시 같이 한번 가 주시겠어요?"
"그럽시다. 그런데 홍수가 몇번이나 일어나서 현장이 옛날에는 다리 기동 옆에 볼록하게 나타났는데 지금은 안보여요."
"혹시 국군인지 모르시나요?"
"그때는 누가 누군지 몰라요. 묻으라고 하니 묻는건데 한 장소에 7명쯤 묻었을 거요"
하지만 우리가 강 밑으로 제보자와 같이 내려가 보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곤란했다. 대략적인 위치를 정하고 '02년도에 발굴을 했는데 어떤 유품도 발굴하지 못했다. 향로봉 일대에서 '02년도에 6구등 지금까지 10여구를 발굴했다.
회암철교 밑의 유해는 흐르는 강물따라 먼곳으로 간 것이다.
나. 좌측 366고지보다 창길리 응봉산에 더 많은 유해발굴
예천이나 안동에서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퇴하는 국군 제6사단이나 제8사단, 그리고 수도사단의 일부가 이곳 아ㅏㄴ동의 일직면이나 풍천면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고 전사에 나온다.
특히 낙동강 남쪽 독점산, 오선봉, 봉화산, 마늘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능선들은 그리 높지도 않고 접근하기에 용이하였다. 평발리의 366고지나 그 좌측 계량골의 산들은 거의 평지처럼 되어 있는데 올라서니 개인호 밭이다.
하령에서 보건소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우리 복장을 보고 식당주인이 매봉산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니 바로 뒷산이 매봉산이라 한다.
"아니 지도에는 응봉산이라 되어 있는데요?"
"매봉산이라고도 하는데 저산에 어렸을 때에 올라가면 탄피가 쌓여 있고 사람뼈도 발로 차고 놀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우린 대충 밥을 먹고 사늘 올랐고 하루종일 일대의 야산은 다 오랐다. 응봉산은 390m나 되는데 올라서니 정상은 분지처럼 평탄하고 이동하는데 아주 수월하다. 여기서 안동박실로 해서 장림리 두곡까지 전수 탐사를 했다.
그리고 '02년도에 응봉에서 14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366고지군에서는 '08~'11년 어간에 10여구의 유해를 찾았다.
다. 병방리 큰등산 아래 방황하는 국군"
단촌 병방리는 79번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길 북쪽에 천년고찰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했다는 고은사가 있다. ㅜ따라서 이 고은사는 전쟁 당시에 북한군 연대 지휘소 역활을 했다고 한다.
이 고장은 동네 요소요소에 작은 저수지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안정으로 들어가면 송곡이란 작은 저수지가 나오고 올라서면 평고개-큰등산(350고지군)으로 간다. 건마산에서 평고개-너등재-의성읍 상리 한티재로 연결되는 능선이 남북으로 발달했다.
79번도로 북쪽은 점곡면 사촌리란 곳인데 320고지 매봉산이 있다.
지역 주민의 안내로 송곡 저수지를 지나 큰등산에 오르게 되었다.
본인들이 어려서 나무를 하러 올라가면 보이는 것이 모두 뼈라고 한다. 동네 분들 이야기가 전쟁통에 밤에 군인들이 잘못들어와 북한군과 서로 엉키게 되어 피해가 나고 일부는 저수지에 들어가 죽기도 했다는 것인데 밤새 전투를 하는데 총알이 날아가는 모습이 장관이였다고 한다.
"빙빙 도는 국군과 북한군~!" 결국 후퇴하는 국군이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는데 한명이 본인 집에 숨어들어 은신했는데 북한군이 낮에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시 밤에 도망쳤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이곳에 올라 빙빙 돌았다. 우린 '02년도에 사촌리 매봉산에서 4구, '10년도에 정밀 타사를 통해 너등재와 윤암리 354고지 일대에서 10여구를 발굴했다.
라. 보현산의 두개골을 찾아라
보현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천문대가 있다. 1,126m라하지만 산 정상까지 차가 곧장 올라간다. 산의 좌측은 600m고지군의 노귀재 터널로 연결되고 산의 동쪽은 800고지군의 작은 보현산능선에서 수석봉까지 연결되는 산중의 산이다. 북쪽으로는 거의 같은 높이의 만봉산을 깃점으로 좌측으로는 800m 고지군이 현동면가지 연결되고 우측으로는 곰내재-베틀봉을 거쳐 꼭도방재-자초산으로 연결되는 산속의 산이다.
보현리에서 탐문중에 직접 북한군 유격대와 함께 있었다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본인은 당시 14살에 아무것도 모르고 먹을 것을 주니 좋다고 따라다녔는데 전쟁이 나기전에 이미 군인들이 왔는데 북한군이지도 모르고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차량으로 정상에 올라가니 산불감시원 초소가 우리를 기다렸다. 오르는 도중에 보니 조그만 분화구같은 것이 많이도 보였다. 포탄이나 비행기 폭격으로 생긴 상처임에 틀림없다.
"우리집은 방각산 밑에 원사촌에 살아요. 어려서 자주 올라왔지요. 형들따라 탄피주어다 엿바꿔 먹으려고"
"그럼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혹시 사람뼈같은 것 없었나요?"
"우리가 한 12살쯤이니 한 50년은 되었네요. 그 당시는 여기저기 뼈들이 널려있었지요. 발로 공차듯 차고 다녔는데 군에 갔다가 와서 70년 초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이 깨긋하던데... ."
작은 보현산에도 올랐다. 개인호 천지다. 그런데 보이질 않고 탐지기를 활용해도 반응이 별로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전투의 진실은 무얼까?
혹시나 천문대 공사간 모두 훼손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어떻게 방법이 없다. 우리 '10년도에 안봉산에서 2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마. 운주산에 올라가 살았다
충남대 명예교수인 분이 요도를 작성하여 들고 나를 찾아왔다. 영천 자양호 북쪽 삼귀리 352고지에 대한 요도를 작성하여 본인의 동기들이 수없이 죽어갔다며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현장을 가기로 하고 어느날 신방리 골안지역 자양초교 분교(지금은 폐교)에서 만났다. 마침 운주산 밑 상신에 사는 분이 있어 사연을 들으니 본인이 운주산에 숨어서 6.25전쟁을 보냈다고 한다. 동네로 함께가서 몇분의 어른을 더 만났다.
"군인들이 와서 다 가져가고 빨치산이 와서 다 가져가고 동네에 아무것도 남는게 없었어요"
"그럼 혹시 산에 올라가 보셨는지요?"
"거 올라가 보면 호구덩이가 많아요. 그곳에 전쟁중인데 빨치산을 따라 올라가 보니 우리 경찰이 붙잡혀 와서 무릎꿇고 있고 한쪽에는 몇이 죽어서 나란히 있기도 했지... ."
"최근에는 언제쯤 올라가셨습니까?"
"여기 예비군 훈련으로 많이도 올라갔어요. 보현산도 가고 수석봉도 가고 기룡산, 꼬깔산도 가고... ."
"그럼 죽어있는 사람은 못받습니까?"
70년 중반까지는 올라가 보면 흔적이 남아 있고 유품도 많았다 한다. 그러나 그후로는 올라가질 않아서 지금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운주산을 올랐다. 이산은 돌파구가 형성된 곳으로 피아간에 확보하려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전사에도 있다. 올라가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린 이곳에서 약식으로 개토제를 올리고 '07년도에 11구, '11년도에 3구의 유해를 찾았다.
바. "삼귀리 352고지"에 학도병이 수 없이 죽어 묻혀있다?
우린 김교수와 삼귀리로 향했다. 중귀미에서 걸어서 산을 올랐다. 김교수께서 전쟁중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대구에서 대충 교육받고 이곳으로 들어와 강건너 어딘지 모르지만 산에 올랐는데 포위되어 죽기 살기로 도망친다는 것이 여러 명이 강을 건너 이곳에 온 것 같다는 제보내용 이었다.
"내가 동기들의 얼굴을 몰라요. 밤에 걸어서 들어왔다가 다 죽고 몇명만 살아서 또 어디로 갔어요. 내가 전쟁 후에 한번 와서 동네분들에게 물었더니 산에 무덤이 학도병 무덤이라고 해서 실제 답사도 했어요. 한번 같이 가 보고 판단해 주세요?"
우린 산으로 들어갔고 어렵지않게 그 무덤군을 발견했다. 산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몇군데의 크나 큰 무덤군이 있다. 과거 부족국가 시대의 무덤이라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요즘 형태도 아니다. 지역 묘지실태와도 다르다.
그럼 정말 우리 학도병 무덤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증거를 필요로 했다. 동네분들께 이런 사실을 말하니 의견이 엇갈렸다. 어느 분은 주변에 있는 여러가지 유품들을 모아서 묻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지역빨갱이를 잡아다 죽이고 묻었다는 말도 있고... .
결국 우린 개인호만 발굴하여 '09년도에 1구를 발굴하였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명확하지 않은데 삽을 댈 수가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제보가 있으면 다시 연락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린 삼귀리 북방 충효리에서 지역주민 김병달(''11. 73)님의 제보로 1구의 유해를 찾았다. 이 지역 도로 확장시 나온 유해를 재매장한 곳에서다.
신방리에서도 지역주민이 본인 밭 뽕나무밑에 몇구가 있다고 하여 하룻동안 발구했으나 찾지 못했고 신천교 바로 옆에 흙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유해가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발굴했으나 찾지 못했다.
사. 수석봉에 나란히 묻혀 있는 군인은 누구인가?"
죽장 지동리 일대의 고지군은 모두 발굴을 했다. 봉화봉이니 수석봉이니 몇번씩 올라다니며 개인호를 찾고 지역 주민을 탐문했다. 그런 어느날 '09년도에 발굴 팀장 백상사가 중요한 제보내용을 가지고 왔다. 본인 밭 언저리에 유해 4구를 묻었다는 내용과 수석봉에 올라가면 교통호가 있는데 본인이 한 1개소대는 나란하게 죽었어써 갈잎으로 덮어주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직접 그 내용을 파악하고자 현장에 갔고 백팀장은 발굴팀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
"나란히 누워서 죽어간 어린뼈의 실체는 누국인지?"
너무 오래되어 교통호의 흔적이 잘 보이지는 않아도 경험이 많은 백팀장 눈에는 훤하게 들여다 보인다. 또한 함께 오른 지역 제보자가 나뭇가지를 꺽어서 대략적인 위치를 그렸다. 탐지기의 소리가 나는 곳을 중심으로 발굴지역을 도식하고 발굴을 개시했다. 탐지기의 소리도 요란하게 들린다.
"과장님, 여기 12구 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얄팍한 전사지식으로 운주산처럼 지역 프락치 등이 묻혀 있는 줄로 오판했다. 전사책을 세밀히 분석해 보니 엄청난 전투가 '50.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 정규군이 백병전을 한 곳이고 우리 8사단 제16연대, 지원나온 제7사단 3연대나 5연대, 아니면 수도사단 제18연대 등이 북한군 제15사단 정규군과 전투를 벌인곳이다.
우린 이곳에서 지금까지 '09년도 12구를 포함하여 50여구를 발굴 했다.
아. "봉화봉(638m)에 들꽃"
봉화봉은 69번도로를 가운데로 지동리 좌측은 수석봉 우측은 입암리 봉화봉이다. 여기는 자체 탐사팀이 현장을 올라가 실태를 조사해서 발굴 작전이 진행된 곳이다.
이곳 입암은 먼저 이곳으로 진입한 단대호 미상의 북한군을 밀어내기 위하여 포항에 있는 해병대와 해군이 실제 투입되어 국군 제8사단이나 수도사단이 도착전에 전투를 한 곳이다.
따라서 남북에서 북한군을 협공도 했던 보현산-봉화봉지역은 산이란 것은 올라가면 다 흔적이 있다.
처음 탐사를 위해 올랐을 때는 그렇게 개인호가 식별되지 않아서 몇번의 백병전이 이루어졌다는 전투사실에 신뢰성이 의문시 되었다. 하지만 얼마되지않아 이곳에서 시신을 매장했다는 제보자를 찾았다. 경찰의 통제로 올라가서 보이는대로 개인호에 묻었다는 것이다. 홍천 말고개에서도 이런 제보로 유해를 발굴했는데 이곳도 그렇다.
그래서 능선의 산길을 중심으로 발굴 작전이 진행되고 2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자. 인구리 북쪽 405고지(기룡산 남쪽으로 판단됨)일대에 유해를 찾아라...!"
'14년도에 충효리에서제보가 왔다. 본인이 직접 바위틈에서 사람뼈를 봤다는 내용이다. 기룡산 우단으로 740고지군이 되는데 내검단에서 오르는 것은 어렵지않았다. 전문 탐사팀이 꾸려지고 우리는 과거 발굴기록과 전사 등을 참고하여 탐사에 들어가고 실제로 제보자 동행없이 우리가 뼈를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전사에는 이곳 하단부 용산리 일견지역에서 '50. 8월 말~ 9월 초 전투시 국군, 특히 제3연대 1대대는 1,800명이 800명으로 무려 1,000명의 인명피해가 이곳 일대에서 발생했다고 하는데 유해가 없다.
국군 제5연대 1,2대대도 이곳 일대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다음 영천지구 전투에서 언급할 노항리 진격산(전투산)에서 300여구를 발굴했다. 꼬깔산같은 곳에도 여기저기 있었다는 유해는 없고 유품은 다량 찾아냈다.
5.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보고서 : 특별내용 없음
6. 참전용사 증언 : "진격산(전투산의 비밀?)은 알고 있다."
이곳 전투에 대해 속 시원한 참전용사의 증언은 듣지 못했다.
보현산에서 수석봉, 그리고 봉화봉에 이르는 능선에서 기룡산 좌우를 연하는 능선과 바로 737m꼬깔산을 좌우로 연하는 선에도 우린 많은 탐사를 하였지만 어떤 큰 징후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전사에는 일견의 405고지군이나 그 우측의 332고지군, 그리고 삼매리 전방의 고지군이나 죽곡리 일대 고지군에서 유해발굴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전혀 에상치 못한 해평지역 제1사단 전투지역을 탐사하던 중에 마을에서 한 참전용사를 만났다.
"나 5사단, 영천에서 녹았어?"
"혹시 연대는 모르시나요?"
"아휴 지금 나보다도 몰라요. 5사단만 기억해요" 할머니의 답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영천 자양으로 들어가 20번도로상 영천 휴게소에 이르러 바로 그 위의 산이 용사님이 대구 하양에서 비내리는데 밤새 걸어서 올랐던 산이고 500고지에서 1개 중대원이 전투도 못해보고 죽었다는 증언을 청취하였다.
하지만 우리 전사에 제5사단 예하 연대가 참가한 기록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또한 우린 그동안 이곳 전투산에서 '09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2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렇다면 자양호 서쪽편 기룡산 능선에서 전투 했다는 제16연대나 제7-3-1대대의 기록은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이지... .
제 4절 영천지역 전투
1. 전투 개요
영천지역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9월 공세로 보현산 방어선까지 진출해 영천을 점령을 기도한 북한군 제15사단을 '50. 9. 5일부터 13일까지 의 공방전을 통해 격퇴하고 영천을 확보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군단은 기룡산 저지선에서 철수한 예하의 제8사단을 영천 동남쪽의 금호강변에 배치해 적 제15사단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였다. 그리고 제7사단 및 증원된 2개 연대를 투입해 3일동안의 전투끝에 영천을 탈환하고 영천 동북방의 자천과 372고지까지 진출한다.
반면 적 제2군단은 8월 공세에서 구미-다부동-대구 축선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8월 20일 다부동 정면에 투입했던 제15사단을 의성을 거쳐 영천 동북방 입암리로 진출시켜 영천을점령한 후 대구 혹은 경주로 진격하려는 목표아래 3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 국군 제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리 선에서 9월 2일까지 적을 저지하고, 9월 4일 기룡산 일대로 철수해 좌로부터 제21연대, 제16연대, 제7사단 제5연대를 배치하고 제21연대와 제16연대 사이에제7사단 제3연대 1대대를 배치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영천에 대한 잠령전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에 걸쳐 3회의 공방전이 전개된다. 영천 북방의 제21연대는 적의 공격을 견제하고 제6-19연대는 적의 후방부대 보급로를 차단한다. 또한 영천 남쪽에는 제7-5연대와 제8-10연대가 적 제15사단을 압박하였다.
9월 10일 영천-경주간 도로 남쪽에서 반격을 개시한 국군은 9월 13일 구전동-자천동-삼매동 북방-인구동으로 연결되는 9월 공세 이전의 제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2. 북한군과 국군 상황
(가) 북한군 상황
1950. 9. 1일 북한군 제2군단은 예하의 제15사단을 수도사단 정면에 투입하여 최후의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들은 영천을 점령한 후에 대구나 경주로 진출하려 하였다.
영천지역 전투에는 북한군 제15사단과 배속된 제73독립연대 및 제103치안연대가 참여하였다. 사단장은 박성철 소장이다.
병력은 15,000명 인가 병력중 8월 말에는 4,200명 수준이고 장비는 50%이하로 감소하였다.
(나) 국군 상황
영천 정면의 국군 제8사단은 '50. 9. 4일 2개 연대 그리고 제7사단 제5연대, 제3-1대대가 기룡산 좌우 능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제8사단의 왼쪽에는 제6사단이 우측에는 수도사단 제18연대가 경계를 이루었으나 제18연대가 운주산에서 9월 5일 적의 공격으로 기계로 철수하여 14km의 간격이 발생한다.
영천지역 전투 참여부대는 제8사단은 사단장 이성가 대령,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 제16연대장 김동수 중령('50. 8. 11이후는 유의준 중령), 제21연대장 김용배 중령이었다.
제7사단은 사단장 신상철 대령, 제3-1대대장 정진 소령, 제5연대장 최창언 대령, 제8연대장 박승일 대령(승일교와 관련있음)이고 배속 부대장으로 제1-11연대장이 김동빈 대령, 제6-19연대장이 김익렬 대령, 제26연대 3대대장이 신건선 소령이었다.
병력 수준은 70%수준을 유지하였고 탄약의 보급도 대체로 원활하였다.
3. 전투 경과
가. 영천 북방 기룡산 방어선 전투
(1) 기룡산 방어선 전투
보현산 지구를 방어하던 제8사단은 9월 2일 적 제15사단의 공격을 받아, 우익인 제16연대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영천 북방의 기룡산 일대로 철수한다. 그리고 9월 4일 오후에 횡격실 능선을 중심으로 좌일선에 제21연대, 중앙에제16연대와 제3연대 제1대대, 우일선에 전날 배속된 제7사단 제5연대를 배치하고 제7-8연대를 예비로 하였다.
한편 적 제15사단장은 제12사단의 안강돌파에 따른 질책을 받고 9월 5일 01시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입암과 영천 사이의 도로를 따라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사단의 중앙인 제16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해 공격하는 적에 밀리어 4km 후방인 대환동- 평천동 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따라서 우일선인 제7-5연대는 적중에 고립되어 육박전을 펼치는 등의 진퇴양란속에 분산 철수 한다. 사단의 좌 일선인 제21연대는 우측방이 노출되어 선천동-대환동 선으로 철수하였다.
9월 5일 용천동 일대에서 일시 공격을 멈춘 적은 08시 15분에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제8사단은 영천외곾선으로 철수를 하게 되고 군단은 10시 30분을 기해 제8사단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배속을 전환하고 제8사단장은 시가전을 작정하게 된다.
이 무렵 적 제48연대와 제50연대(모두 동락-무극 전투와 화령장 전투에서 혼난 부대임)가 대구-영천간 도로를 통해 영천 동쪽 1km까지 접근하였다.
제8사단 제16연대의 384-372방어상황('50.9.4)
적73-1개 대대 629 736
274 국21-1대(-)
279 국21-1-2중
상죽실
188 적50연, 전차
국16-2대
죽곡동 384 372 국5연(-) 적50-1개대대
국16-1대 국16=국5연
국16-3대
218 208
국16-1대 적 166 국5-2대
신호동 대환동
국3연-1대
적
조교동
영천 국8사 국7-8연
(2) 군단장의 방어작전과 고수 의지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는 안강이 피탈되고 제8-16연대가 영천 동쪽 1km까지 밀리게 되자 본부를 부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9월 5일 오전에 대구를 떠나 부산 동래로 가고, 전방 지휘소는 대구에 남기로 했다.
영천이 피탈되면 대구뿐만 아니라 부산까지도 위태롭기 때문에 군단장은 제1사단과 제8사단에서 1개 연대씩 전환하고 미군측에도 전차지원을 요청하여 9월 6일 미 제1기병사단에서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하게 된다.
나. 영천지구 공방전
(1) 영천 피탈과 아군의 반격
9월 6일 적의 강력한 공격으로 제8사단 제16연대, 제7-8연대, 그리고 제7-3-1대대와 대전차 대대는 금호강 남안으로 철수한다. 좌일선 제21연대는 계속하여 현 진지를 유지하고 우일선 제5연대는 통신두절로 상황파악이 어렵고 당일 07시경 영천이 적에게 떨어졌다.
한편 영천이 함락된 후에 오수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군단장이 위치하여 전황을 살피고 있을 때에 지원하는 미군 탱크 1개소대 5대가 들어왔다. 사단은 공병대대에 영천시가지를 공격토록 하였으며 영천시가지를 탈환하였다.
적의 중앙돌파로 고립되었던 제7-5-1.2대대는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건천 방향으로 철수했다.
(2) 218고지~208고지 공방전
한편 9월 5일 아침 제21연대는 중앙의 제16연대가 철수함에 따라 우측방이 노출되어 지금 화남면 선천에서 화복면 자천에 이르는 35번도로를 따라 주로 우측 고지군에 병력을 배비하였다. 특히 죽곡리의 218고지는 적이 확보시 제21연대의 퇴로가 차단되는 중요지형으로 9월 7일 제21-2대대가 점령하였다.
바로 이곳으로 적 제73연대 2개 대대가 접근하다 전멸하고 여세를 몰아 상죽실에 있던 본부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또한 적 103치안연대도 주력이 거의 전멸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곳 전투는 계속하여 35번도로 우측 신기동 북방 181고지- 도림동 208고지- 죽곡리 218고지를 연하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능선에서 제21연대의 기습 공격이 성공하여 적 제15사단의2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로 아군을 포위 섬멸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게 되었다.
(3) 제2차 영천 공방전과 아군의 반격
한편 제8사단에 배속된 제6-19연대는 9월 6일 18시에 영천시가지 서쪽으로 진입하여 28번도로 남방 오미동의 176고지로부터 야사동에 진지를 편성한다. 이때 조교동 방면에서 보급품 수송대열이 접근하는 것을 식별하여 30여 대의 적 보급차량을 파괴하여 적 제15사단의 작전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불러왔다.
9월 7일 제19연대는 181고지와 176고지의 적을 격멸하고 14시경에 영천을 탈환한다. 적은 지휘소를 대의동에 설치하였다.
9월 8일 적 제15-45연대는 주력을 대의동-완산동으로 진출시키고, 조공은 언동에서 망정동으로 접근해 왔으나 아군의 포격에 노출되어 많은 병력 피해를 입고 일시적으로 영천을 점령했으나 제19연대의 역습으로 금호강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에 사단장은 사단지지휘소를 금호로 옮기고 9월 8일 총공격을 15시에 감행하였다.
제21연대는 계속하여 대천동에 위치하여 사단의 좌익을 방호하고, 제6-19연대는 오수동에 지휘소를 두고 조교동-단포동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제1-11연대는 지휘소를 봉죽동에 두고 188고지로 진출 영천-임포를 양단한다. 제 16연대는 지휘소를 신월동에 두고 금호강변 방어진지를 확보하다 작산동-완산동으로 진출한다.제7-8연대는 지휘소를 대창동에 두고 채약산에 출현한 적을 격멸하고 유하동~304고지선으로 진출한다. 제7-5연대는 제26연대와 교대하며 임포 동쪽으로 진출토록 하였다.
(4) 155고지(영천 탄약창 안) 전투와 적의 역습
제1-11연대(-1)는 9월 6일 배속명령을 받고 금호리로 이동, 주력으로 봉죽리 금호강변 배치하였다. 9월 7일 금노동 후방에서 남진하고 있는 적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완산동 155고지(영천 탄약창 안)에서 저항하는 적을 격멸하였다.
적이 다시 9월 8일 06시에 영천을 향해 공격을 개시, 1개 대대는 대의동에서, 1개 대대는 남쪽에서 제11연대를 포위 공격해 왔다. 이에 제11연대는 도남동 일대와 동쪽으로 경주 방면으로 분산 철수를 감행하여 많은 피해를 입고 9월 9일 08시 30분 역습으로 105고지와 구암동 163고지의 적을 격파하고 계속하여 작산 우측 유하동과 채신동 일대를 점령한다.
(5) 적의 남하와 제7사단의 저지
9월 6일 국군 제7-3-1대대는 미군 전차소대의 지원아래 영천시가지를 점령한다. 한편 군단 예비인 제7-8연대(-)는 9월 8일 임포부근에서 적의 경주진출을 저지하자 적은 대창 동쪽 채약산으로 침투하여 대구와 경주 양방향으로 아군의 양분을 기도하였다.
이에 제8연대는 북쪽의 제21연대와 적 제15사단을 압박하였다. 9월 9일 제8연대는 제1-11연대와 협력하여 채약산에서 진격을 개시하여 괴연동에서 유상동으로 진출, 영천-경주간 님쪽 도로에 침입한 적을 물리쳤다.
한편 제7-5연대장은 9월 6일 9월 4일 통신두절된 제1,2대대를 9월 7일 건천방면으로 남하중 식별되어 아화동에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육군본부는 적이 임포까지 진출하여 경주 좌측방이 노출되자 안강 방면에서 전투중인 제26-3대대를 9월 7일 아화 서북쪽 295고지로 급파하고 적이 임포일대에서 정비중인 것을 발견해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제5-1,2대대와 진지를 교대했다.
9월 9일 아침 제5-1대대는 방산(327m)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제5-2대대는 임포터널 인근에서 보병없이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제15사단 포병연대를 공격하여 120밀리 곡사포와 76밀리 곡사포 16문, 차량 59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6) 제10연대의 복귀와 139고지 전투
제1군단 제3사단에 배속되어 8월 30일부터 포항지구 전투를 전개한 제8-10연대는 9월 6일 영천 함락 소식을 듣고 제3사단장에게 건의 하여 9월 8일 이동하여 9월 9일 임포 동남방 도계리에서 재편성 하였다.
원대복귀한 제10연대는 제26-3대대로부터 아화에서 적을 저지하는 임무를 받고 적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임포 방면으로 적을 추격하고 제26-3대대는 군단 예비로 경주로 이동하였다.
한편 제16연대는 원제동 일대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9. 6일 영천 동북쪽의 고지들을 점령한 후에 적이 제21연대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대비하였다. 그리고 9. 7일 적을 단포동으로 밀어내고 지역을 제19연대에 인계하고 9. 9일에 금호강을 건너 작산동의 139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추격하여 대의동까지 한때 진출했으나 완산동의 155고지가 적에게 다시 피탈되어 철수하게 된다.
다. 영천지구의 반격전(9월 10~13일)
(1) 아군의 반격계획과 제8사단의 포위 작전
자천 탈환 작전('50.912-13)
방가산 적73연
적1개 대대
국1개 소대 269 옥계동
국21-2대 시루봉
321 282 자천 적73-1개대대
346 국21-1대
7연=21연 공격선 국21-2대대
196 오동 274 공덕동 국1개소대 21연=10연
278 280
국10-2대
268 251 공격선
선천동 죽곡동
218 246
대천동 국21연, 국21-3대 212
신호동
국10-2대
국10-1대
국군 제8사단의 중앙을 돌파한 후 영천~경주간 도로를 따라 진격하던 적 제15사단은 아화 북쪽에서 제5연대에 의해 진출이 저지되고, 영천 북쪽에서는 제21연대와 제19연대에 후방 보급로가 차단됨으로써 괴멸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적 제2군단장은 제15사단장을 9월 5일부로 군단포병 부군단장인 조광열 소장으로 경질하였다.
영천~경주간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적을 포착 섬멸하기 위해 9월 10일을 기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를 위해 제8사단과 제7사단은 9월 10일 영천과 임포 일원으로 진출한 적 제15사단을 격퇴하고 자천-372고지-금대동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출하여 총반격작전 준비를 한다.
반격작전의 주공인 제8사단은 배속된 제11연대와 제19연대를 포함한 5개 연대로 완산동~대의동일대를 3면에서 포위해 적의 모든 화포와 전차 및 기동장비를 파괴했다.
조공으로 임포와 304고지에서 적의 우측방을 공격한 제7사단(-)은 공격개시 2일만에 영천~안강 도로에 도달하고 영천 전투가 종료된 9월 13일 경주로 이동해 군 예비로 전환한다.
(2) 제10연대의 증원과 제21연대의 반격
9월 9일 10시경 제11연대와 제16연대가 완산동과 옥포동 일대로 진격, 영천~경주간 도로가 소통됨에 따라 제2군단은 제7사단의 통제하에 임포지구에서 작전중인 제10연대를 원대복귀 조치한다.
제8사단장은 좀더 강력하게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제10연대를 제21연대와 제19연 사이에 투입하였다. 9월 11일 제10연대가 신기동 일대의 적을 경격하자 적은 저항을 포기한 채로 후퇴하였다. 계속하여 진격해서 평천동에서 용화동 북쪽고지까지 진출하며 고지일대에서 백병전을 수행하였다.
한편 사단의 좌일선 제21연대는 9월 10일 군단의 반격작전에 따라 약수탕-자천동-대환동까지 진출하며 우측의 제10연대와 연계된 작전을수행했다.
(3) 제19연대의 반격과 적 사단 사령부 공격
9월 10일 제19연대는 금호강변으로 진출하여 영천역과 완산터널에 2개 대대를 투입하였으나 금호강을 이용해 저항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남쪽에서 진격한 제11연대와 제16연대가 4번 도로를 횡단한 이후부터 적의 저항은 감소되었다.
9월 10일 밤 대의동 입구 과수원에 있는 적의 지휘사령부를 제19-2대대가 공격하여 지휘체계가 무너져 철수하게 되고 제 19연대는 사단으로 복귀한다.
(4) 제7사단의 반격과 후방보급로 탈환
제7사단은 9월 8일부로 제2군단으로 배속 변경 되었고 예하 3-1대대와 제5연대, 제8연대가 9월 10일부로 제8사단에서 원대복귀한다. 이어 제8-10연대를 지휘하여 임포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한다.
임포를 탈환하여 영천~경주간 보급로를 소통시키고 계속 북진하여 7번도로를 중심으로 관산~지금 영천 호국원이 있는 28번도로 남쪽 무학산(440m)을 탈환한데 이어 주변 고지군을 확보하여 영천~기계 보급로를 소통시킨다.
4. 전투 결과
6.25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영천지구 전투는 '50.9.5일부터 13일가지 9일간 서로 증강된 2개 사단이 첨예하게 대립한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은 5개 연대 12,000명으로 추산되는 병력과 전차 12대, 그리고 76mm 곡사포 38문과 122밀리 곡사포 18문을 투입하였다. 국군은 7개연대 15,000명과 105밀리 곡사포 26문, 57밀리 대전차포 6문이었다.
보현산 일대에 대한 아군의 방어태세가 취약한 점을 간파하여 적 제2군단은 죽장-영천 축선에서 적 제15사단을 투입해 기습적으로 영천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아군은 데이비드선으로 철수를 거론하고, 육본과 미 제8군이 부산으로 이동하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반면에 적도 8월 공세에서 과도하게 전투력을 소모한 북한군은 제공권과 해상 통제권의 상실로 지상군 작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아군이 반격작전 준비를 하는 동안 북한군은 9월 공세를 전개해 초기 단계에 낙동강 돌출부,왜관-다부동, 영천, 안강-포항 등에서 돌파구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확대할 후속 전투력이 부족하고 보급이 미진해 최종 목표인 부산으로 진격을 실패했다.
영천을 점령한 후 경주 방면으로 진출한 적 제15사단은 목표가 불과 20km 남겨놓은 임포에서 진격을 중단하였는데 , 이는 보급의 추진과 병력의 증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북한군은 영천을 점령한 적 제15사단이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여 적 제12사단과 합세할 경우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 전선은 와해될 수 있엇고, 공격 방향을 대구로 전환할 경우에는 대구 북방의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물론 미군 전선에도 위급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적 3,799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전차 5대와 각종 화포 14문 및 소화기 2,327정 차량 85대를 노획한다. 반면 아군은 전사 29명과 부상 148명, 실종 48며의 인명피해가 발생한다.(5권 464p)
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삼매리 매곡에 남겨진 유해, 그리고 수없이 죽어간 전사자는 자양호 물에 잠겼다
이곳 영천 동북방의 유해발굴을 위한 탐사는 주로 보현산-수석봉-봉화봉 지역의 능선이었다. 기룡산의 산세는 사실 올라가지 않은 사람은 쉽게 말하면 좀 곤란하다. 능선이 일정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불규칙하게 이어져 조금 탐사가 힘들다.
그런 이곳에 대한 탐사와중에 삼매리 지역에서 한 아저씨가 우라를 보고 다가 왔다.
"뭐하시는데 그렇게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네, 이곳이 6.25전쟁터러 그 당시에 전사한 군이나 경찰 학도병을 찾고 있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금도 군번줄이 남아 있나요?"
"아, 군번줄은 거의 없어요. 당시에 주질 못했거든요. 처음에는 있었는데 한강을 철수하면서 대부분 달고 오질 못했고 그후로는 군번줄을 못주었고 '51년도 4월정도가 되어야 줍니다. 그런데 그걸 왜 물으세요?"
"아 사실 우리 밭둑에 사람뼈가 있어요. 할아버지 묘 옆에서 발굴하여 옮긴겁니다"
"네? 그럼 같이 가봐요. 우리가 보면 알 수 있어요"
이렇게 해서 아저씨를 따라 매곡지역으로 들어갔고 아저씨가 말하는 곳에 갔다. 할아버지 묘가 밭 언저리에 있고 유해를 ㅂ발굴했다는 일대를 다시 발굴해보니 뼈는 안보이고 일부 유품은 있었다.
"묻으신 곳이 어디예요?"
"여기인데 누가 판 흔적이 있어 지금 주변을 다시 보는 중입니다"
"아니 누가 판 흔적이 있다면 우리 발굴팀은 아닌데 뭘까?"
아저씨 이야기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 어느날 묘소에 와보니 옆에 조그만 묘가 생겼다는 것이다. 밤새 바로 매곡지 위 우측 산능선에서 전투가 심하게 있었고 국군은 영천 방향으로 가고 북한군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다가 북한군이 다 물러가고 가을에 그걸 파보니 군인이 있고 총도 있어서 총는 집에 갔고 있다 파출소에 갔다 주었는데 산에 총이 엄청나게 있었다 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곳 산에는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람뼈를 찾아갔고 일부는 동네에서 돈을 주고 사 가기도 했다고 하며 지금 영천호(자양호)가 만들어 지기전에는 강이였고 주변에 마을과 조그만 야산들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많아서 놀러가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럼 결국 이 유해는 그 당시를 앍 있는 누군가가 소문을 듣고 있다가 최근에 몰래와서 이 뼈를 발굴해 갔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우린 다시한번 할아버지 묘소 주변을 탐지기를 이용해 찾았지만 발신음을 듣지 못했다.
나. 오수동 대나무밭에 남겨진 화장유해의 진혼곡
영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그 곳에 한 동네 분이 찾아왔는데 유해 묻힌 곳을 안다고 하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땀고개를 넘어서 바로 공터가 보이고 남쪽으로 대나무 밭이 있는 곳으로 가니 한 할아버지가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 하세요, 저희가 유해발굴단입니다"
"화장해 묻은 것도 파보면 아시나요?"
"네? 화장을 했다면 좀 확인이 어렵습니다."
"여기는 바로 화장터야. 전쟁 중에 어디서 죽었는지 트럭들이 시체를 실고 와서 여기에 내려놓아요."
우린 할아버지를 따라 바로 옆에 도로공사를 위해 자재를 쌓아놓은 곳으로 이동했다. 당시에 본인의 밭인데 군대 지휘소도 있었고 지게부대들이 몰려있었다 한다.
시체가 매일 밀려오는데 차량에 피가 흘러내리는 상태로 오고 그걸 노무자들이 내려서 바로 지금 대밭이 있는 곳으로 옮긴다.
구덩이는 노무자들이 몇군데를 파놓고 나뭇가지를 해와 주변에 쌓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군인이 뭐라고 하면 불을 질러 태운 뒤에 나무상자에 뭘 넣고 하얀 천으로 싸서 가져간다고 한다.
몇명을 화장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화장이 끝나면 잠깐 쉬기도 하는데 참 볼성사운 것이 뭔가를 발로 차서 인버에 있는 작은 구덩이같은 곳으로 집어넣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두개골이란 것이다.
"두개골을 찾아라!"
우린 몇군데를 탐지하고 실제 굴토를 하며 한구의 유해 흔적이라도 찾을려고 노력했으나 탄피나 신발조각은 찾았어도 뼈는 못찾았다. 화장재라도 찾으려 했으나 그것마저 쉽지않았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하늘에서만 가려질판이다. 나는 눈시울을 적시며 일행을 통제하여 묵념으로 눈을 감았다.
다. 논 속에 숨져간 전사자
지금 영천은 옛날 영천이 아니다. 시가지의 전쟁터는 모두 주택지나 공공 시설물이 들어서 당시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그 중간 중간에 일부 땅이 그당시 그대로 있어서 우린 몇군데를 제보받아 정밀 탐사를 하고 발굴도 해서 한구를 망정동에서 발굴 했다.
"닭장에서 나온 용사님"
본인 집 울타리에 닭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우리를 찾았다. 망정에 사시는 정일표('07, 당시 67세)의 제보다
"경주로 피난을 집안 식구 모두가 떠났다. 9월 중순에 들어왔는데 바로 집 옆 밭에 포탄이 떨어져 큰 구멍이 나있고 옆에 군인이 죽어 있어 아버지가 그 속에 밀어넣고 묻어버렸다"
"그 뒤로 혹시 누가 파갔거나 없어지진 않했나요?"
"내가 그 뒤로 한 10년 뒤에 군에 갔다 왔는데 그대로이고 닭장을 지어서 누가 파갈리도 없다."
우린 그곳에서 판쵸우의와 칼빈탄등 28저믜 유품도 함께 발굴 했다.
"아이고 그대로 있네, 말 마이소. 그때 이 일대가 논이였는데 벼속에 사람이 죽어있어서 경찰이 통제하여 마을에서 나가 다 거둬 군인에게 넘겼는데 그래도 어쩌다 벼 베는데 해골이나 다리뼈가 나왔다고 난리났었지... ."
우린 영천시내에서 몇군데를 더 발굴했고 어느 집 밭에 콩이 심어졌는데 그 밭이 전수 시체를 묻었다하여 가을날 몇군데를 표본조사 발굴했으나 찾지 못해 철수하기도 했다.
라. 신기동, 도림동, 죽곡리에서 죽은 북한군 시신의 행방은?
영천 서북방지역의 전투지역은 우리가 3~4회 탐사결과 유해를 단 한구도 찾지 못했다. 우리 제21연대와 제16연대, 그리고 제19연대 등이 북한군을 격멸했던 곳이라 비록 아군은 아니라도 북한군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찾지못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동북방보다 고지들이 살아 있어 발굴이 되리라 믿었는데 없었다. 지역 주민들의 반응도 북한군을 별로 보지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규명을 위해 전사를 보고 또한 소련군 군사고문관의 기록을 봐도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전사가 조금 우측지역 내용이 크게 부각 된 것인지... .
마. 작산동 탄약창 안의 무덤군, 총을 거꾸로 꽂고 철모를 올리고 명복을 빌었던 곳!
영천 제2탄약창 자리는 모두가 전투 지역이다. 이곳에서 능선을 ㅌ타고 오르면 대창 채약산에 오르게 되어 북한군이 확보시 대구를 측방에서 위협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곳이고 바로 영천역이 인접하고 금호강이 남북으로 흘러 도하시는 바로 금호르 거쳐 경산-대구로 직행인 곳이다.
우린 전사 사실에 따라 이곳 제2탄약창 안의 소구릉을 전수 탐사했다. 그러는 와중에 기초굴토 과정에 유해가 나와 발굴 결과 칼빈완탄, 팔찌, 시계등 40여 점의 유품이 발굴되었다.
그래서 흔적이 조금만 있어도 모두 발굴하고 주변을 탐문하던 중에 안복기('07, 74세)어르신을 만났다.
"너무 늦게 왔어요. 탄약창 지으면서 그 흔적이 대부분 다 묻혔어요."
"그럼 지금 탄약창 건물이나 탄동을 지으면서 많이 묻혀버렸다는 것인지요?"
"경주로 피난 갔다 오니까 저기 야산에 풀 한포기 없는데 총을 거꾸로 세우고 철모가 씌워있는 것이 군데군데 많았지"
"아 영화에 나오는 그런 장면인요?"
"그렇지요. 참 많았어요. 이 일대가 옹기를 굽는 곳인데 그 곳에도 엄청 죽어 있었는데 누군지는 몰라요"
"그럼 그 유해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그해 겨울에 방위군으로 들어가 예천일대에서 공비토벌하고 오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말에 의하면 경찰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 다 거둬서 묻어버렸는데 그분들이 한명도 안살아 있어요"
우리가 너무 늦게 발굴작전을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ㅏ 그 사정이야 역사에 맡기고 열심히 찾아야 하는데 결국 '07년도에 3구를 발굴하는데 그쳤다.
사. 임포일대(임포 터널, 방산, 유상리 303고지 등)의 피아간 전투사실의 진실은?
임포는 작산동과 영천 만불사가 있는 곳의 중간지점이다. 1.35번 국도와 경부선 철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다.
이곳이 무너지면 바로 경주가 무너지고 부산이 위태로워지기에 피아간에 서로 확보하여 했다.
전사에는 국군 제7사단 연대들이, 그리고 이어서 제8사단 예하 제10연대와 국군 제1사단 예하 제11연대가 일시적으로 참여하여 북한 군 제15사단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곳이다. 그리거 반격간에는 만불산이 있는 능선을 따라 북항하여 295고지, 관산(394m) 이어서 지금 영천 호국원이 있는 28번도로 남쪽 무학산(434m)으로 진출 모든 병참선을 소통시키게 되는 중요지역이다.
따라서 임포역 주변의 방산(327m), 남쪽의 303m 등에서도 전투가 벌어져 북한군을 괴멸(임포 터널에 포병 완전 무력화)시키다 시피 한 곳이라 전사에 소개 되는데 사실 우리는 큰 발굴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아니 북한군 관련 제보도 없다.
"우리 형님이 국군 3구를 뒤골에 묻었어요"
지역 주민 박성영('011, 74)님이 지역부대에 제보를 했다. '50. 8월 말~9월 초에 야간 전투시 국군이 전사하여 형님이 묻었는데 알고 있다"는 내용으로 발굴결과 유해 2구와 전투화, 군장고리등 200여점의 유품이 발굴 되었다.
하지만 전사에는 이 일대 전투에서 북한군 제15사단 예하 연대가 괴멸(포병은 완전 무력화)되어 북으로 올라가고 반격으로 전환한 곳이라는데 국군도 북한군도 사실 아는 분들이 별로 없다. 능선에 굴토된 개인호도 많이 있질 않았다.
아. "영천 진격산의 전투는 제5사단이 아니고 제7-5연대가 했다" 참전용사님이 5연대를 5사단으로 기억(반격간 5사단)
이미 언급한대로 이곳 진격산, 일명 전투산에서 200여구가 발굴되었고 이 지역 전투는 해평의 한 참전용사가 현장 증언으로 알려준 사실에 입각하여 발굴하였던 곳이다.
실제 전사에는 이곳이 주요 격전지란 내용이 없다. 축차 진지로 도식만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분들의 이야기는 대단한 전투가 있었고 이 산을 넘어서 소를 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한다.
"사람을 밟지않는 영특한 소"
이 내용은 춘천 남쪽 대룡산지역에 가도 있다. 노항리 귀전에 살고 있는 분이 어렸을 때에 소를 몰고 산에 올라 풀을 먹이는데 묘지근처에 아예 전부 군인이 죽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묘한 것이 황소는 절대 사람을 밟지않고 간다는 것이다. 껑충 뛰어서 넘어간다는 말에 고개가 숙여졌다. "사람보다 낫다"
우린 죽어있는 사람을 재수없다고 버리거나 길 모퉁이로 밀쳐버리고 때로는 약을 한다고 태워서 먹었던 시절이 있다.
자. 피해 현황의 허와 진실, "엉터리 전과 비교"
"이 전투에서 국군은 적 3,799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전차 5대와 각종 화포 14문 및 소화기 2,327정 차량 85대를 노획한다. 반면 아군은 전사 29명과 부상 148명, 실종 4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다".(5권 464p)
나는 전투사실의 허와 실을 검증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이유는 용사님들의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피해현황을 보다 보면 너무 기록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당장 앞에 가져온 전사책의 전과 비교에서 적 4000명대 아군 100명의 피해 구조다.
40 : 1의 비율로 국군이 적군을 압도 했다는 것인데 탐문 결과에 언급했듯이 이곳 전투산(진격산)에서 500고지(510)에서 실제 전투를 하고 살아남은 용사님을 해평에서 만나게 되어 들어본 증언은 본인이 대구 방직공장에서 1주일 훈련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비내리는날 걸어서 영천 자양으로 해서 산을 올랐다가 1개 중대가 다 전사했고 몇 명만 살았다는데 아니 영천지구 전투 전사자가 전사 29명, 실종 48명이라니 이건 너무한 기록의 차이라고 본다.
6. 소련군 군사 고문관 라조바예프의 보고서 내용
1권 219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은, 9월 12일까지 반 포위상태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자주포 100%, 포병 및 박격포 85%, 병력 50%를 상실하였으며 9월 12일 철수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