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사슴 일기
이용헌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나자 사슴이 돌아왔다.
사슴은 가슴에 흰점을 지우며 점점 자라났다.
비가 그치고 마음이 슴슴한 날 사슴의 이마에 손을 얹자 뿔이 돋아났다.
뿔은 풀의 발음을 닮았다는 이유로 위로만 솟구치기 시작했다.
청명이 다가오자 잇몸이 간지럽다고 우는 이웃집 아이가 있었다.
웬일인지 사슴은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었다.
동리의 아이들은 사슴의 울음을 흉내 내지 못했으나
어른들은 울지 않는 사슴의 소리를 흉내 내지 못하는 건 응당한 이치이며
하물며 흉내 내지 못하는 소리를 글자로 적는다는 건
선비 아닌 나비의 필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삐뚤빼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날이었다.
뿔이 갑자기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니 뿔이 아니라 풀이 떨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에 의하면 풀은 언젠간 꽃을 피우고 뽑히지만
뿔은 쥐도 새도 모르게 뽑힐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로만 자랄 줄 아는 뿔과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풀은 처음부터 다른 것인데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이 자음 하나 차이라며 사슴에게 꿈을 심어준 탓이었다.
입하가 멀어지고 망종도 지날 즈음
드디어 길고 긴 뿔이 담장 너머로까지 솟아올랐다.
잇몸이 간지럽다고 울던 아이가 손을 흔들며 하얗게 웃고 있었다.
앳되고 아름다웠던 점이 사라진 사슴의 가슴에는 점점이 새겨진 붉은 핏자국,
굳세게 자란 뿔은 풀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부러지고야 마는 속성이 있다는 걸
풀만 먹고 자란 아이들은 아직 몰랐다.
이봐요, 뿔이 아름다운 왕관을 닮았다고요?
왕관이 뿔을 닮은 거라니까.
뿔이란 놈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무시무시한 무기로 바뀔 수도 있어요.
머리가 바스러지도록 상대를 향해 딱딱 부딪치다가 유유히 사라지는 저놈을 보세요.
권좌는 짧고 발정기는 더 짧아요.
하지가 다가올수록 사슴 가죽을 쓴 사람들은 제각기 뿔이 나서 겨루다가
제풀에 쓰러지는 일도 많았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있었다.
뚝뚝 부러진 뿔을 주워들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풀이 무성한 무덤가에서 어른들은
멀고 먼 사슴의 신화를 지우느라 길고 긴 낮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시로여는 세상』 2022 년 봄호
첫댓글 신화는 지워지고 누군가(뿔) 다시 쓰고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