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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2일(삼위일체주일)
역대상 11:10~19
물이 피가 되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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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함께 읽은 역대상 11장에는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뛰어난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야소브암은 창을 들어 한꺼번에 적군 삼백 명을 죽였습니다(11절). 엘르아살은 보리밭을 약탈하기 위해 달려든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습니다(12절).
그러나 무엇보다 다윗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세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가장 약할 때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다윗의 용사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군사들과 전투할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 근처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군사들은 르바임 골짜기와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전장 한 가운데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17절).”
다윗은 싸움에 지쳐 있었습니다. 아무리 용맹한 용사라도 전투에서 심리적인 부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이 전투를 이끌어야 할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갈망했다는 것은 그만큼 다윗이 지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이 갈망했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이 과연 어디일까요? 그곳은 다윗의 고향이 아닙니까? 목동 시절의 다윗은 양을 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이 우물에 들렀습니다. 그는 이 우물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자기도 목마름을 해결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그 우물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고향 베들레헴 땅은 이미 적군의 손에 넘어갔고, 그곳에 적군의 본진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심코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그런데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 세 명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이 내뱉은 한 마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다윗 왕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18절). 그들은 다윗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런 헌신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습니까? 과연 다윗이 마실 물이 없어서 베들레헴 우물물을 원했던 것일까요?
물은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도 물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갈망했던 것은 단지 육신의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한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 받을 수 있는 ‘의미의 물’을 갈망하였습니다.
생사가 달린 전쟁터 한 복판에서, 어쩌면 군사들은 한가롭게 물 타령이나 하고 있던 다윗 왕을 한심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용사들은 왕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다윗 왕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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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대 초반, 세계 경매 시장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영국 소더비즈 옥션 하우스에서 ‘세계의 경매’라 불리는 경매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입생 로랑의 유품들이 경매에 올랐고, 그의 의자는 약 424억, 전등갓 하나는 약 1억 5천만 원에 입찰되었습니다. 당시 경매를 두고 신문엔 이런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왜 사람들은 유명인의 소장품에 열광하는가?”
흔히 볼 수 있는 의자이고, 전등에 씌워 놓은 갓일뿐인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가격을 주고 그것들을 가지려 할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물건의 주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흔한 의자와 전등갓이 아니라, ‘유명한 그 누군가의’ 의자, ‘유명한 그 누군가의’ 전등갓이라는 특별함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어마어마한 돈을 그것에 지불했던 것입니다.
-출처: 도강록,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서울: 예수전도단, 2017);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18년 8월호), 135에서 재인용.
우리가 보기에, 다윗의 용사들의 충성은 지나쳐 보입니다. 우리는 “그깟 우물물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거기에 목숨을 바쳐? 여기저기에 널린 게 물인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렇게도 생각하겠지요? “아니, 여기저기 널린 게 의자이고 전등갓인데, 그것 하나에 400억, 1억 5천만 원이 웬 말이야? 쓸데없는 짓을 했구먼!”
그러나 만일 그 의자가 ‘그저 그런 의자’가 아니라 ‘유명한 그 누군가의 의자’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좀 더 말씀드리자면, 그 의자가 ‘유명한 그 누군가의 의자’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의자’라면 여러분은 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다윗의 용사들이 누구를 가장 사랑했고, 누구에게 속해 있기를 원했는지를 있는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시고 있던 다윗 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렇고 그런 수많은 왕들 중에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이 세 명의 용사들에게 있어서 다윗 왕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에게 속해 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또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가장 영예로운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명의 용사들이 왜 다윗을 그토록 존경했는지 아십니까? 아마 그 다음 이어지는 다윗 왕의 행동을 보시면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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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은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이루기 위해 세 명의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은 그 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 드렸습니다(18절). 그리고 다윗은 내가 이 사람들이 피를 어찌 마실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19절).
다윗은 물을 “피”라고 불렀습니다(19절). 다윗의 눈에 비친 용사들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순교적 행동이었습니다. 때문에 용사들이 가져온 물은 물 이상의 가치, 즉 “그들의 피”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자신이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전제로 부어 드렸습니다. 숭고한 희생제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취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리더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리더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세 명의 용사들이 다윗을 위해 물을 구해 왔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제단에 그것을 부음으로 용사들의 헌신을 하나님을 위한 제사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우리 함께 그 날의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다윗이 용사들의 목숨을 대가로 떠온 물을 차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립니다. 물이 똑똑 제단 위에 떨어질 때, 다윗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낍니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충성스러운 용사들도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웁니다.
울음은 전염성을 가집니다. 여기저기서 왕과 용사들의 울음을 지켜보던 부하들도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 날, 다윗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전쟁의 두려움을 이겨낼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강력한 무기를 얻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그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과 연대의식으로 새로운 군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다윗 왕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요? 아마 모르긴 해도, 다윗 왕은 이 일을 계기로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야 될 이유를 찾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제 생각에 다윗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 명의 용사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 전투에 임했을 것입니다.
또 세 용사는 어땠을까요? 자신의 유익을 내려놓고, 부하들의 수고를 귀히 여기는 다윗 왕을 더 존경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남은 생애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던 다윗 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힘이며, 사랑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전쟁터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리더는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리더의 손끝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리더의 역할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성도를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중매쟁이입니다. 다윗은 세 용사의 피를 하나님께 부어드림으로, 그들이 헌신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런 면에서 용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자극하는 훌륭한 중매쟁이였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서로에게 충성하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다윗과 세 명의 용사들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윗 왕과 세 명의 용사들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의 모든 용사들이 세 명의 용사들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윗 왕과 세 명의 용사들 사이의 사랑과 충성은 나머지 용사들을 자극하고, 그들을 도전했을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20절 이하에 나오는 아비새는 창을 휘둘러 삼백 명을 죽였지만,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브나야도 용감하여 모압 아리엘의 두 아들들을 죽였고, 사자 한 마리를 죽였으며, 키 큰 애굽 용사를 죽여 다윗이 그를 다윗의 시위대장으로 삼았지만,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능력보다 충성스러움이 더 중요합니다. 다윗의 부하들 중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세 사람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다윗의 30명의 용사들에게 이 첫 세 사람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져서, 다윗의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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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끝으로 어느 분의 간증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나는 이 교회에 나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 장애인 학교 건물이 지어질 때 우리 아파트의 통장 일을 봤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건물을 짓는 것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러 다녔고, 데모에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이곳이 장애인들의 천국이라는, 장애인들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 가서 아들의 방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중증 뇌성마비로 단 한 번도 바깥에 나가 보지 못한 내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데리고 차마 이곳에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들의 방문을 열 때마다 무너지는 가슴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곳에 가리라! 쫓아내면 무릎 꿇고 앉아 빌어야 하리라! 나는 들어가지 못해도 내 아들만은 좀 받아달라고!’ 그리고 떨리는 걸음으로 아들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장애인 학교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내 과거를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들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어느 날이었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는 아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한 손에는 하얀 장갑이, 다른 한 손에는 얇은 봉투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들이 소리쳤습니다. “엄마! 이거 내가 만든 거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만든 장갑 하나를 들고,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일해 번 월급봉투를 들고서 말입니다.
나와 내 아들은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나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나와 내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을.
-출처: 안민, 「행복콘서트」(서울: 규장, 2006);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18년 8월호), 125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교회가 성도들의 지나간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는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였으면 합니다.
저는 성도들의 연약함을 우리교회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와 여러분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물도 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그들의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그들의 수고가 진정 가치 있고, 진정 고귀한 것임을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교회를 세워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