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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 관룡산 남서쪽 철쭉과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 (구룡산)위치,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
창녕의 금강산, 화왕산(火旺山) 관룡사(觀龍寺)는 신라때 창건되어, 원효대사가 제자 일천여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한 신라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와 경관이 수려한 사찰이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관룡사의 ‘관룡(觀龍)’은 사적기 전설에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릴 때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 숨어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목격하였다 하여 ‘용을 바라본다는’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 한다.
초창 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약사전에서 발견된 묵서에 ‘영화오년기유(永和午年己酉)’라고 기록하였으며, 절에 비장된 사기(寺記)에도 신라 349년 흘해왕 40년( 訖解王 : 신라 16대 임금)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伽倻)에 전해졌다는 남방 전래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창녕군지(昌寧郡誌) 에는 583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원효대사가 제자 일천여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사기에 근거 내용으로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보고 있다.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추담(秋潭)이 중건,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519호)과 관룡사 부도(유형문화재 제 19호) 등이 고려시대 유물로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졌 왔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 대웅전, 약사전이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이후 관룡사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17세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된다. 1617년 영운스님 대웅전 재건을 향적전을 창건하고, 금당 건립하는 등 전각과 승사를 중창하여 관룡사는 13개의 건물 및 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 되었다.
1704년(숙종 30) 여름의 대홍수로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 여러 승려가 수해로 참변을 당한 뒤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이 재건되는 중창이 따른다.
18세기 사적기에 기록된 관룡사의 중창은 대규모의 것으로, 1712년 대웅전의 중수를 시작으로 수년의 불사로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학령,홍순 스님이 1749년(영조 25)에 중창하여 옛 가람의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19세기에 가람이 쇠락하여 경내에 수많은 전각과 요사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대웅전을 중수하고 여러 건물을 중수함으로써 옛 가람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로 팔상전이 소실되고 대웅전 일부가 소실되었으 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아 지금의 가람을 유지할 수 있었 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 보물 제1730호,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신돈이 태어나고 자란 옥천사지가 있는데, 이 절터는 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신돈이 처형 후 같이 폐사하게 되었다한다. 그 당시 절의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넓은 터에는 현재도 여러 석재들이 발견되고 있다.
신돈 법명은 편조(遍照)이고 그의 아버지는 알려진 바 없고 그의 어머니는 계성현(지금의 창녕) 옥천사의 노비였다 한다. "어미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늘 산방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돈은 후에 권력을 장악한 후 고려사회 개혁작업에 착수해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양민에게 돌려주고,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 신분으로 회복시켜 준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은 공민왕 18년(1370년) 왕이 친정에 나섬으로써 실패로 끝난다.
옛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관룡사 초입에 2구 석장생, (경남민속자료 제6호)은 이곳에서부터 경내를 표시 하는 표지석, 수문장의 구실을 한다. 화강석을 거칠게 다듬어 남녀상을 각각 새겨 넣은 모습으로, 남장승은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으며,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징이다. 여장승은 얕은 상투 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 달리 관모가 없으며, 남장승에 비해 몸체가 훨씬 육중하다.
전반적으로 육중한 몸매로 인해 안정감을 주며, 수문신의 상징적 특징인 왕방울 눈과 주먹코, 아래로 뚫린 콧구멍, 방방한 턱 등 한국 장생의 독특한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사찰의 경계표시를 나타낸다. 제작연대는 1773년(영조 49)으로 추정.
입구 계곡 축대 아래 근래 세운 석종형 부도 2기가 서 있다.
관룡사로 오르는 입구 돌담길에는 석문이 하나 있다. 사실상 일주문으로 조성시기는 17세기 명부전, 칠성각과 같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 관룡산의 진산인 화왕산 산성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석문 옆에는 4기의 비가 있다. 1938년에 세워진 전현풍군수 하재명 숙부인김녕김씨 도장석축유공비(前玄風郡守河在鳴 淑夫人金寧金氏 道場石築有功碑)를 비롯하여 환몽화상유공비(幻夢和尙有功碑), 1985년과 1995년에 세워진 전기불사공덕비(電氣佛事功德碑)ㆍ진관평산포수군만호자 불사공덕비(鎭管平山浦水軍萬戶者 佛事功德碑) 등 관룡사 중창과 관련된 불사 공덕비이다.
사천왕문 오르는 돌계단을 지나 일주문의 정면에는 '화왕산 관룡사(火旺山觀龍寺)' 초입(初入)의 문으로 일주문이라 한다. 어칸 중앙의 양 측면에 기둥을 세워 대문을 달고, 어칸을 통해 출입문을 만든 모습으로, 내부에는 사천왕탱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 있다.
범종루 건물 내부에는 1995년에 노천월하(老天月下)스님, 주지 지묵항조(至?恒照) 화상이 조성한 '반야대범종(般若大梵鐘)'이 있고 옆에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높이 122㎝, 폭 78㎝의 목조 사자고대(木造獅子鼓臺)가 있다.
원음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건물로 대웅전 맞은편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1634년(인조 12)에 초창된 후 1763년(영조 39)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초창 당시 극락전과 함께 건립됬으나 현재 극락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후 1830년(순조 30)에 중수되었고, 최근 1994년 해체 보수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관룡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 지붕 건물. 금강산에 비교되는 기암절벽의 관룡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고 얼핏 보기에도 연륜이 깊어보인다. 1965년 8월 해체보수공사 때 어칸 마루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1401년(태종 원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 1617년(광해군 9)에 중창. 1749년(영조 25)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우선 주춧돌을 보면, 귀기둥 밑에는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주춧돌을 깔고 나머지는 곱게 다듬은 둥근 주춧돌을 깔았다. 기둥은 단면이 원형인 두리기둥이며,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포작을 짜올렸다. 정면은 칸마다 문을 냈고, 측면은 양쪽 모두 앞쪽 한 칸에만 문을 냈다. 정면 가운데 칸은 사분합 띠살문이며, 나머지는 이분합 격자문이다. 공포는 어칸에 둘, 퇴칸에 하나씩 놓았으며 내외 2출목 (內外二出目)으로, 다포식 형식. 「관룡사 사적기」에 따르면 숙종 38년(1712)에 중건되었다고도 한다.
대웅전 내부 중앙에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의 석가모니 불 좌우에는 설법인 수인의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이 걸려 있다. 이 삼존불은 수인(手印)만 다를 뿐 사각형의 얼굴로 머리의 육계에는 계주가 장식되어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의 주름은 형식적이면서 다소 경직되었다. 목조삼존상은 17세기 중반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불단에 조각된 음악을 연주하는 비천상, 사악한 자를 물리치고 법당을 보호한다는 귀면상이 조각. 공포는 내외부 모두 2출목이며, 출목 바로 위의 살미 첨자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는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게 한다. (공포-처마끝 무게를 받치기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쇠서 목구조 공포에서 보에 직교해 거는 소 혀모양 으로 장식된 것)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 (보물 제1730호)(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像)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崇禎)2년, 1629년(인조 7) 기사(己巳)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 다음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玄眞),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 등 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玄眞)은 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령대보살상, 구례 천은사(泉隱寺)의 목조보살상, 보은 법주사(法住寺)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 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상은 비교적 현진(玄眞)의 말년에 제작.
본존 석가여래불좌상은 높이가 150cm로 비교적 큰상에 속하며 양쪽의 불상들은 본존보다 크기가 작게 120cm정도의 크기이다.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코가 유난히 높고 크며 입과 턱 사이의 간격이 좁은 편이어서 상의 인상이 약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이다. 또한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단순하고 넓은 면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부분의 폭이 짧은 편으로 불상의 안정감과 위엄스러움이 약간 쇠퇴되었다. 조각승 현진(玄眞)의 초기불상에서 보이던 예쁘장함은 사라지고 대형의 법주사(法住寺)에서 보이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천진스러운 모습에서 현진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승 승일(勝一)과는 처음으로 같이 제작하였으며 승일(勝一)이 제작한 영광 불갑사(佛甲寺) 석가여래삼불상, 하동 쌍계사(雙磎寺) 목조석가여래삼불조상과 같은 상에서 그 양식적 계승의 특징이 보인다. 17세기 전반의 불교조각으로 불상양식이나 조각승들의 사승(師承)관계와 양식의 계보를 잘 알려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세 불상자체가 보여주는 종교적인 무게감을 느끼겠다.
칠성각은 일제때 소실, 근래 복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로 관룡사 연혁에 따르면 1882년(고종 19)에 건립된 것이다. 내부에는 불단을 가설하여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응진전 건물의 공포는 2익공 양식으로, 초익공과 이익공은 꽃새김으로 조각한 수서형이고 보머리는 봉두를 조각하여 달았다.
중앙에 모셔진 석가불좌상은 완만한 상호(相好)로 어깨까지 귀가 늘어져 있으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法衣)를 걸쳤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새겨진 관음보살과 정병이 새겨진 대세지보살이다. 불단의 좌우로는 16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건물 삼면에는 16나한도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명부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각광받기 시작, 조선시대 크게 유행하여 대중에게 인기가 높다. 명부의 세계와 관련있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인왕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이른다. 깍은 머리에 스님 모습으로 결가부좌하고 설법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좌우에는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子)와 문인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두손을 모아 합장을 하며 협시하고 있다.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하층기단은 면석 가운데 우주를 조각하고, 우주 좌우로 얇고 넓은 안상(眼象)을 새겨 넣었으며 상층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 가운데에 탱주와 우주를 조각하였다.
기단 위의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으로 석탑의 규모에 적합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으며, 옥개는 층급받침을 3단으로 간략화하고 낙수면의 끝을 반전시킨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양식과 각부의 수법은 신라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각부의 양식수법이 간략.섬약해져 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불당(小佛堂)(보물 제146호)의 조선초기 건물로 맛배 지붕에 정면 1칸, 측면 1칸, (신륵사 조사당(祖師堂)이나 송광사 약사전(松廣寺藥師殿)이 팔작지붕의 다포계 건축임에 비해, 주심포 계통의 맛배건물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전돌을 깔고 그 중앙에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약사전 석조여래좌상(보물 519호)은 절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龍船臺)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앉아 있는 대좌는 상ㆍ중ㆍ하대를 모두 갖춘 팔각대좌로, 중대에 귀갑문(龜甲紋)이 평면 처리됬고, 상대에 단판 연화문을 조각하고 있다.
불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선각(線刻)으로 나발이 표현된 큼직한 육계와 중앙계주가 있고, 비만한 얼굴에 비해 작은 입, 뚜렷한 턱의 윤곽선, 굵은 띠주름의 삼도(三道) 등 고려후기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천의를 걸친 통견으로,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의 변형된 모습으로 왼손 위에는 약기(藥器)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세부표현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과 흡사한 모습이다. (육계-부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같은 것, 지혜의 상징)
관룡사 약사전은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양식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아주 좁은 전각이지만, 내부 벽면에 벽화들이 잘 그려져 있다. 창방 위의 가로로 긴 화면에는 4면을 돌며 불좌상이 정연히 그려져 있다. 모두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고 연화좌에 앉아 합장하고 있다. 광배 옆에는 각 상마다 명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53불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측면의 벽체는 뒷면과 같은 큰 장식화를 갖고 있진 않지만 측면의 가구(架構)수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한 칸인 집 규모로 보아 3량으로도 충분할 지붕구조를 7량으로 연결해 지붕이 다소 무거워 보일 법도 한데, 나름대로의 균형감이 유지되는 데에 묘미가 있다.
53불 사상은 대승불교의 다불(多佛)사상 가운데 천불사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많이 신앙되는 것이다. "관약왕약상이보살경"에 따르면 53불을 지심으로 경례하는 사람은 사중오역(四重五逆) 등의 죄가 모두 청정해진다고 했다. 창방 위의 53불도는 세련된 필치와 채색에 명호가 기록되어 있어 사찰벽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건물 내부의 3면에 다양한 벽화가 채색되어 있는데, 세 벽면을 병풍처럼 둘러가며 묘사된 화조화(花鳥畵)는 한 벽면을 4면으로 구획하여 모두 12면에 그려져 있다. 흔히 고승들의 설화나 불보살을 그리는 여느 사찰들의 전각벽화와는 달리 조선후기 궁중의 장식화나 민화로 유행한 꽃과 새의 그림인 화조화를 그려 놓은 예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수묵 위주의 꽃과 새, 나비와 학이 노니는 정경을 그렸는데 각기 다른 주제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군자와 매화, 그리고 국화와 포도, 연꽃과 난초가 피어 있는 벽화는 다소 거친 필치와 여유있는 공간구성, 문인취향의 수묵 등이 조선후기의 화조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긴장감이 뛰어나 작지만 당당한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게 되는 조선 초기의 건축물이다. 현재 보물 제146호로 지정돼 있는데, 임진왜란과 숙종 때 내렸다는 큰비도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던 것일까. 건물이 지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웅전이 초창되었을 당시 함께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관룡사의 구시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것을 구시라 하며 관룡사 구시는 현재 대웅전 옆에 있다.(순천 송광사에 가면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배 모양의 커다란 나무 밥통이 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풍수에 의거 화왕산 용(龍)의 기염(氣焰.불을 당기는 기운)을 다스리려는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이라는 것이다. 석가여래좌상이 있는 언덕을 용선대, 이 곳에 오르면 용을 타고 반야세계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 들며, 여기서 바라보는 풍광도 역시 매우 뛰어나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1.81m이며, 1.17m의 높은 팔각연화좌대 위에 동향하여 결가부좌하고 있다. 석굴암의 본존과 흡사한 양식을 갖추었으며,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게 솟아 있고 방형(方形)에 가까운 풍만한 상호에 선명한 이목구비, 단아한 인상,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에 백호가 표현돼 있고, 지긋한 눈, 오똑한 코, 입가엔 웃음을 띄고 있으나 인간적인 온후함보다는 경직된 존엄성이 강조되고 있다. 귀는 길어 어깨까지 닿아 있으며, 삼도는 가슴께까지 내려온다. 어깨는 좁으나 안정감이 있다. 결가부좌한 무릎께에는 두툼하지만 비교적 섬세한 두 손이 놓여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은 몸에 밀착되어 사실감을 더해주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팔각의 상ㆍ중ㆍ하대를 갖춘 연화대좌로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중판의 연화문을 새겨 넣었다. 통일신라 9세기경의 불상양식으로 추정했으나 최근 조성연도가 722년경(신라 성덕왕대)으로 확인돼 세간에 알려졌다. 명문을 통해 조성연대가 확인된 불상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용선대 부처님의 법력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 현재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명문(銘文) 발견
용선대에 있는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불상의 팔각형 좌대(座臺) 한쪽 측면에서 불상 제작 연대를 나타낼 가능성이 큰 명문(銘文)이 발견되어"개원 10년(722년)..월 25일에..(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개원(開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