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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45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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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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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UWAV2Tgl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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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의 전문가 성모님>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명 설교를 펼치고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이나 유다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속보이는 설교와는 완전 비교 대조되는 예수님의 명쾌하고 감동적인 설교에 사람들은 탄복합니다.
그중에 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한참 설교를 하고 계시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칭송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토록 훌륭하신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성모님을 향한 여인의 칭송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입니다.
저 같았으면 극도의 칭찬 앞에 우쭐하며 그랬을 겁니다.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의 어머니 정말 지금 행복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 낳고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제가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을 향해 여인이 보인 존경심과 예의를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분은 다름 아닌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성모님보다 더 맑은 정신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철저하게 준수해나가던 사람들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열 달 동안 ‘말씀’을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다녔고, 30년 세월 동안 그 ‘말씀’ 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성모님보다 더 전문가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군중들 가운에 한 여인의 칭송과 찬미에 가장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공경은 덧붙인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 명확히 인증된 것입니다. 보다 지속적이고 영원한 행복, 보다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지 또 다시 고민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때로 불나방처럼, 때로 철새처럼 여기 저기 세상 속의 행복을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디 가도 우리의 끝도 없는 갈증을 완벽히 해소해주는 그런 행복,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충만히 채워주는 그런 행복은 없더군요.
다행히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참 행복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인 성경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성사입니다.
우리의 눈이 좀 더 밝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좀 더 개방되어 그 값진 행복을 알아보고, 찾고, 만끽하는
그런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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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의 3대 고통>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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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말씀이 됩니다. 이 짧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하십니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입니다.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습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장 힘들었을 때를 보면 조금 늦은 나이에 성소를 느껴 ‘신학교 가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1년은 참으로 힘들어서 겨울 바다에도 빠져보고 술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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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라고 감격에 찬 말을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였을 때, 의례히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찬사라고 하겠다. 이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께 대한 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라고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에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을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뵈올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 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다른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였다(참조: 마르 3,35).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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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신자 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소공동체 구역장, 교리 교사, 사목회 임원 등 본당에서 안 맡아 본 직책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직책이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책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고서, 수도복을 입고서,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함을 가슴에 달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가치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신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한 가지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느님 말씀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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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서 워싱턴 주 부시자로 활동하던 촉망받던 시각장애 정치인 사이러스 하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미주가톨릭평화신문 9월 13일자 보도) 하빌은 어린아이였을 때 안구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였지만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다칠 수 있으니 감시 카메라 앞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빌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을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머리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이 다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도록 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하빌은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도 정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친 적이 있지만 하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하빌은 본당 신부로부터 ‘모든 것 안에서 계신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마틴 신부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정치인으로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하빌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남은 삶을 사제로 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장애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보다는 가난을, 건강보다는 아픔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인전을 읽으면 공주였던 분이 수도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군인이었던 분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각 장애이면서 정치인이 사제가 되었던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한 하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셨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예술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치고, 하느님과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와 욕심 때문에 차별하였습니다. ‘종교, 국적, 신분, 계층, 성별, 이념, 사상, 학벌,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죄인’이라고 차별하기도 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카메라 앞에 세워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젓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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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루카 11,27-28 (참행복)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나를 낳고 기르신
어머니를 행복하다하신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힘 있다는 이들은 밀쳐내고
배웠다는 이들은 업신여기고
의롭다는 이들은 손가락질하고
경건하다는 이들은 비난할 뿐
보잘 것 없는 이들은 어울리고
갈 곳 없는 이들은 찾아오고
버림받은 이들은 좋아하고
가난한 이들은 함께 하는
나를 낳고 기르셨기에
많은 이들이 불행하다고 여길
어머니를 행복하다 할 수 있는
당신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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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최영균 그레고리오 신부님]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입니다. 말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할 뿐 아니라 어떤 실행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많은 경우 말로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그런데 만약 말하는 능력만 있고 듣는 능력이 없다면 어떨지 생각해 봅시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댈 것입니다. 거기엔 말에 대한 이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물원의 동물이 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같아질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아예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언어행위에서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말을 잘 하지만 듣는 것에는 서툽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상대방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진리를 행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진리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말은 영어로 ‘Obedienc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ob’이라는 말과 ‘audire’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즉 ‘…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순명입니다. 진리에 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나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너무 많이 하면 그만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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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은 복되도다. 오늘 복음에는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하고 찬탄하는 한 여인의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우두머리 베일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11,15)고 험담하는 군중들의 반응에 권위 있게 대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여인의 감탄사이기도 하지요.
아들의 성공이 어머니의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찬사는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예수님을 낳고 키우신 어머님에 대한 찬사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인의 찬사에 “그렇습니다. 제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희생이 얼마나 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어머니께 드립니다.”하고 한 말씀하시면 좋으련만 예수님께서는 섭섭하리 만치 그 부분에 인색하신 모습을 보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자칫 이 말씀이 성모님을 섭섭하게 해 드린 것이나 아닌지 염려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님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말씀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받을 은총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젖 먹여 기르신 이 세상에 단 한 분뿐인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의 문안을 받은 엘리사벳이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라고 감격에 가득 차서 외치셨듯이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은 유일무이한 여인입니다. 모든 여인이 성모님 같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특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품위에 감격한 나머지 당신을 낳고 키우신 어머니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드러낸 사람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은총의 계기를 만들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며, 항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은총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단언하시지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도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는 은총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영성적인 행복을 간직한 여인이기도 하지요.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일생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는 예고를 받자 성모님은 깜짝 놀라 반문하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 생각해 보십시오. 스무 살도 안 된 나이 어린 처녀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이 사건은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라는 천사의 아룀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응답하였고,아기를 낳은 후에는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2,13)하고 알려주자 즉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아들 예수를 따라 처참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던 고통의 어머니이시기도 하셨지요. 성모님의 일생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명하며 철저하게 그 뜻을 실천한 굳건한 믿음의 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심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처절한 십자가 죽음 중에서도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19,26)라고 위로하시며 제자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부탁을 하시지요.
오늘 복음을 통해 성모님의 일생을 되돌아보았을 때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낳은 특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평생 그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며 항구하게 살았던,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모 마리아의 특은을 과소평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여인이 성모님과 같은 특은을 받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한다면 그에 못지않은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 부분에 있어서 성모님은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셨던 분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우리 신자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하시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같은 특은을 모두가 받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우리에게도 못지않은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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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재혁 루가 신부님]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감동을 받은 한 여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을 낳은 여인은 참으로 행복한 분일 거라는 생각에 그 어머니를 칭찬합니다. 이 여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도 엘리사벳에게서도 은총이 가득한 분으로, 복된 분으로 칭송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성모님의 생애,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엄청 서글프고 안타까웠던 것이 성모님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것도 편안한 곳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낳으셨고, 산후 조리도 하기 전에 이집트로 피신을 해야만 했으며,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는 일도 겪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몸과 지혜가 날로 새로워지는 예수님을 보면서 대견스러워하시고 기뻐한 것도 잠시. 청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이후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예수님을 보면서 예리한 칼에 찔리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 자신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예수님, 비록 예수께서 메시아란 사실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엘리사벳을 통해서, 시므온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적인 마리아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모님은 눈물을 머금고 자기 자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또 다시 인간적인 시각을 접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모님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듣고 간직한 말씀의 실천을 위해서 지속적인 봉헌과 겸손한 자기 비움을 계속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성모님의 신앙은 날로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모님의 신앙은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제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서 행복한 여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심으로서 참된 행복에 들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참된 행복에 들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듣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바로 성모님처럼 매일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소화되고, 우리 정신 안에 각인되며, 우리 영혼 안에 살아 숨 쉬도록 해야 말씀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인간적인 욕망이나, 현세적인 유혹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매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힘들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들 오늘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성모님의 삶을 뒤따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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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성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자녀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면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보다 더 큰 칭찬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의 부모도 자녀를 키운 보람을 맛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의 부모님과 자녀들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나는 부모님께 어떤 자녀일까? 또 내 자녀들에게 어떤 부모일까? 모든 인간은 자연인 한 사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좁게는 가족, 넓게는 모든 인간과 깊이 연결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비난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지만 결코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됩니다.
신앙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철저히 내버려진 고독한 존재가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간은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넓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인간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매우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처럼 학연과 지연 등을 습관처럼 따지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첫째, 자기 스스로가 강한 소속감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결속력을 보이는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가족 관계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강한 책임감과 소속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개인사에서는 의형제 혹은 의자매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에서는 각종 단체들이 자매결연의 관계를 맺습니다.
둘째, 상대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형성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존재하는 한 아무리 장엄하고 근사한 행사를 통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기본인 부부지간에서부터 모든 관계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신뢰감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하고 개인적으로는 손가락 걸며 굳게 약속 다짐을 합니다.
셋째, 자신의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소속감도 있고 신뢰심도 있지만 추진력이 부족하여자기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한다면 이것은 마치 펑크난 타이어인 채로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상 함께 생각 해본 바와 같이 올바른 관계 형성과 유지를 위해 소속감, 신뢰감 그리고 맡은 바를 책임 있게 실천하는 것이 상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나갈 때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참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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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소설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소설 중에서도 단편보다는 장편을 훨씬 좋아하고 재미있어합니다. 단편소설은 특별한 사건도 없고 얘기를 하다가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장편소설은 이야기 중심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문득 우리의 삶도 단편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의 갈등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곤 합니다.
정말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10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삶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이끄는 장편소설 같을까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어떤 일에 새로운 사건 몇 가지만 붙었을 뿐입니다. 또 명확한 해결을 원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삶도 바로 나의 삶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의 재미는 세세한 감정들을 바라볼 수 있을 때입니다. 소소한 행복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힘들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자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단한 결말을 가져오는 행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던 성모님은 분명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작은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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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격차>
불평등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불평등은 인구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970년대 초기 연구에서부터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폭력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하고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나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국민 간의 소득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7~80년대만 해도 도둑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카페에 노트북을 놔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정직합니다.물론 지금도 소득 격차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옛날처럼 아주 잘 살고, 아주 많이 못사는 식의 격차가 아니므로 점점 범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소득 격차가 큰 나라는 강도가 많습니다. 강도의 타깃은 누구일까요? 부유하고 소위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신 주님의 모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 참사람의 길>
-말씀과의 일치-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은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도 생명의 빛으로 환합니다. 어제 벼르고 별로 생전 처음 다섯분이 멀리서 1박2일 수도원에 피정왔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매일 강론을 읽으며 삶의 지침으로 삼아 매일 말씀으로 살아 왔다는 참 아름다운 분들이라 사진에 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 절로 짧지만 울림은 참 깊습니다. 말씀 주제를 ‘한 부인의 성모 칭송’이라 일컫기도 하고, ‘참행복’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아이를 둔 모든 어머니들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한 여자와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가 흡사 선사들의 선문답처럼 짧지만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행복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둘 다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기에 복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신앙인이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참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위대함은 부여받은 은사와 특권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의 참 원천은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의 수태고지시 무조건적 “예Yes”의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슬픔중에 서 계실 때도 참으로 믿음 깊이 '예Yes'의 자세로 응답하셨고, 시종일관 끝가지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모전자전, 성모님에 그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Yes’의 응답에서는 모자분이 일치합니다.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성모님이자 예수님입니다. 한마디로 “Yes-man”(‘예’의 사람)이자 자기를 비운 ‘케노시스, 비움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도 악령들에 대한 지배나 적대자들에게 침묵중에 보인 그분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켰다는 데 있습니다. 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과 당신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 전적인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예수님은 물론 성모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참 행복한 삶을 위해 평생 끝까지 말씀사랑이 말씀들음과 말씀실천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겸손도 순종도 믿음도 이런 말씀사랑과 말씀들음과 말씀실천의 열매입니다. 저절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이와 함께 하는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이런 믿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여러분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믿음의 은총입니다. 세례은총은 물론 말씀을 통한 믿음은총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옷입게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믿음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어 온전한 평등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 날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구원의 열쇠인지 깨닫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바로 평생과제입니다. 누구나의 공통적 소망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가끔 주고 받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 진국이다!’ 참되어 거짓이 없는 사람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이런 진국의 참사람에 참행복입니다.
말씀없는 영혼은 반쪽입니다. 말씀은 빛이자 생명이자 영입니다. 말씀과 영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생명의 빛을 발하는 성령 충만한 영혼입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데 평생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응답뿐입니다. ‘예스 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받고 위로받는 영혼들이요, 희망과 기쁨, 평화와 행복을 선사받는 우리들입니다. 시편1장도 참행복이 말씀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
시편 119장은 무려 176절까지 계속되는데 아마 시편에서 가장 길것입니다. ‘말씀 찬가’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말씀을 사랑한 시편의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설레게 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불의를 저지르지 아니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시편119,1-3).
시간되면 시편119장 176절 끝가지 잘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영혼은 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영혼의 식이자 약인 주님 말씀만으로 채울 수 있는 영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혼과 육신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튼튼히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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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
“매일 열두 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 말씀하고 바로 돌아가셔.”
“뭐라고 하시는데요?”
“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 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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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한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받아서 외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께 영예를 돌림으로써 자녀인 예수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실제로 자녀의 걸출함은 고생스러움이 없지 않았던 임신과 양육의 과정을 행복과 보람으로 승화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육적 관계성에 기인한 행복을 언급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관계 안에서 주고받는 행복도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의 행복입니다.
이는 초월적이고 영적인 행복입니다. 물리적 상황이 어떻든, 인간적 처지가 어떻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는 영혼만이 누리는 행복이지요. 이 행복은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 그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으로 탁월한 위치에 있어도 태생 계급처럼 딸려 오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평히 열린 행복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지배를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갈라 3,23)
율법은 세상에 구원자가 오시기 전까지, 말하자면 "감시자 노릇"(갈라 3,24)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사람 사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주다 보니, 하느님 마음보다 인간의 해법이 더 강화되어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고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율법서의 문자는 우리의 육을 지배하기에 태도와 행위, 결과와 성취에 주안점을 둡니다. 이와 달리 성령과 하느님의 자녀됨은 영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이는 마음과 정신, 지향과 의도, 동기에 불을 지피는 힘이지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3,27)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이든,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세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옷을 입혀 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이 옷은 우리가 더 이상 육의 원리에 얽매이거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지 않고, 영으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성별, 나이, 빈부, 인종, 신분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요. 세속이 씌워준 어떠한 불평등과 고통의 굴레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이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머물고 관상하고 실천합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삶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누리는 행복은 육이 주는 다른 만족과 비교할 수 없이 충만하고 고귀합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말씀의 매력에 풍덩 빠진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도 말씀에 머물러 주님과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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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일생동안 가야 하는 길 : 넷째, 인생은 분리의 연속입니다.
아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하려면 부모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어린 나무는 서로 붙여서 심어야 바람이 불어도 서로 기대며 잘 자라지만, 다 커서도 간격이 좁으면 성장이 안 됩니다. 사람도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부모 곁을 떠나서 새로운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새로운 스승을 만나서 목표한 성장을 이루게 되면, 그 스승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정 동안의 스승은 있지만 내 생애 마지막까지의 스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찾는 시기가 끝나면, 다음에는 내가 모르는 한 수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렇듯 평생에 걸쳐 분리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에 필수는 배움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학습하는 존재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늘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야 하는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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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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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릅니다.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어딘 가에 있어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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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주님,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지키는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을 경작하게 하소서.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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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모님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행복'은, 육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 교회에 전하는 말씀인 오늘 독서는 우리의 신원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이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갈라 3,22-29 참조)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입은 우리들!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난 10월3일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간(전이) 날이고, 10월4일은 그런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큰 날이었습니다.
이 큰 날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세 번째 회칙인,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을 반포하셨습니다.
이 회칙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다 나은 세상, 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가 서로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교황님의 당부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가톨릭 뉴스로만 알게 된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들로서,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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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lpNizbMje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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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말씀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을 통해서
깨어난다.
말씀에서
행복으로
번져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말씀없이
행복할 수 없다.
흩어진 행복을
말씀으로
다시 만난다.
삶의 전부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말씀에 모든
삶을 걸으셨던
성모님과 예수님의
삶이다.
모든 관계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성장한다.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살리고
마음을 살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행복은 말씀과
함께한다.
행복은
말씀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행복만이
서로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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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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