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박영보 | 날짜 : 09-11-27 17:27 조회 : 1640 |
| | | 현해탄의 구름다리
박 영 보
덧니를 내놓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세라 복 차림의 이 여학생을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해외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영어 선생님이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해외학생들과의 펜팔을 권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편지를 통해서라도 같은 또래의 해외 학생들과 교류를 한다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이 구해온 외국학생들의 주소록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골라 편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백 여명이 넘는 주소록에서 나는 세 명을 골랐다. 미국, 일본, 스위스였는데 모두가 여학생들이었다. 편지는 물론 영어로 써야 했다. 영어에 특별한 실력이나 재질도 없는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내 편지를 읽게 하려면 다른 대책도 없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나누어준 예문 편지 몇 가지 중에서 짜깁기를 해가며 그럭저럭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일 것 같았다.
어렵사리 편지 하나가 완성되면 똑 같은 내용의 편지에 수신자 이름과 주소만 각각 따로 준비하여 세 곳으로 나누어 보내면 됐었다. 그들로부터 답장도 같은 또래이기 때문이었는지 거의 비슷한 내용의 글들이었다. 다시 답을 쓸 때도 각자마다 약간씩 다른 내용에 대한 문장의 답을 작성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라는 말로 시작된 편지가 왔다. 그녀와의 편지가 시작 된지 약 일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의 편지는 모두 영어로만 써왔었는데 이번에는 본문까지도 일본어로 썼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글로 “안녕히 계시요. 전촌왜자로 부터”라고 마무리되어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즈오까(靜岡)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어 한국어공부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편지를 할 때도 가급적이면 한국어로 시도를 할 터이니 틀린 부분을 고쳐달라고도 했었다.
약간은 놀라우면서도 반갑고 고맙기도 했다. “안녕히 계시요”가 아니라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과 그녀의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한글로 표기를 할 때도 본래의 발음대로 타무라시즈꼬(田村倭子)라고 쓰라는 말도 해주었다. 그녀가 한국어 공부에 얼마나 열정을 쏟았는지에 대하여는 1960년대 후반에 한국에 와서 살면서 KBS 라디오의 국제방송 프로인 대일 방송에서 한국어로 하는 아나운서로 일을 하게 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나도 일본어를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 준비에도 모자랄 시간에 일본어 책을 사놓고 독학으로 히라가나와 가다가나를 외우는 일부터 시작을 했다. 일본어의 문법은 한국어와 거의 비슷해 동사와 형용사의 변화만 터득 하고 단어만 알아도 간단한 문장을 만드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일한사전과 한일사전만 있어도 편지 정도는 대충대충 쓸 수가 있었다. 이제 겨우 일본어의 50음도를 외우기 시작한 주제에도 영어로 쓰는 것보다도 쉬울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나의 일본어 편지에 대하여 기뻐했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기도 했었다. 역시 독학이었지만 일본어 공부는 대학에 가서도 계속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잊어버렸지만 간단한 회화도 가능해졌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도 일본측 거래선들과도 사석에서는 간간히 일본어로 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펜팔을 시작한 지 일년쯤 지나서였다. 당시 한국과 일본간에는 매년 고등학교의 친선 농구시합이 있었다. 한국의 전국대회 우승팀을 파견하는데 그때는 서울의 경복고등학교 팀이 파견되었다.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 경기를 관람하게 되어 팬의 입장에서 이XX선수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사진도 찍고 주소도 나누게 되어 또 하나의 한국인 펜팔 친구를 만들게 되었다며 좋아했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까지도 그녀와의 편지는 계속 되었고 종종 이 선수에 관한 이야기들도 들려주곤 했었다.
이 선수는 후에 XX은행의 주전 선수로서 국가대표가 되어 18회 동경올핌픽의 주전으로 나가기도 했었다. 결국 그들은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예쁜 딸까지 두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금슬이 좋은 부부였나 에 대하여는 신문을 통하여 시즈꼬가 죽었다는 내용의 특종 기사와 함께 실린 내용과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KBS라디오의 연속극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제목은 ‘현해탄의 구름다리’였는데 작가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한운사 선생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라는 드라마도 있었는데 같은 작가였는지는 모르겠다. 1960년대 초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었지만 그 영화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이다.
그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남편의 퇴근시간이 되면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가는 것이 하루 일과중의 가장 중요하고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소낙비가 몹시 심하게 내리는 저녁이었다고 한다. 그날도 예외 없이 우산을 가지고 남편 마중을 나가는 길이었다. 비가 오기 때문에 아이는 집에 맡기고 혼자 나갔다고 했다. 이것이 생과 사의 마지막 갈림길이 될 줄이야. 심한 폭풍우를 이기지 못해 그 길을 가로지르고 있던 고압선이 끊어져 길가에 패인 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끊어진 고압선의 끝이 그 웅덩이 물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대로 발을 디뎠던 것이었다. 한 순간에 한 여인의 꿈과 사랑, 목숨과 육신까지도 숯검정처럼 태워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적시고 있다. 비록 제비 뽑기 식으로 골라든 주소 한 장으로 시작된 그녀와의 나눔이었지만 수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떠오르는 일들. 세라 복 차림의 십대 소녀. 발랄했던 모습, 덧니를 내놓고 웃고 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이제는 사십 대에 접어들었을 딸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고 있을 이 선수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생전, 서울에 있을 때 한번쯤 만나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저녁식사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아쉬움도 남아있다.
<참조> 스포츠가 맺어준 부부. 「선데이 서울 69년 11/9 제2권 45호 통권 제 59호」기사중 일부 발췌.
우리나라의 국가대표「스포츠」선수로서 일본인 아내를 얻은 사람은 韓銀에 근무하는 李秉求씨가 있다. 李씨도 국가대표 농구선수로서 일본에 원정가서 알게된 일본인 여성 타무라 시스꼬(田村倭子)씨와 오랜「펜팔」끝에 맺어졌고 田村倭子씨는 현재 서울에서 딸 하나를 낳았고 KBS의 대일방송에서「아나운서」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여성은 한국의「스포츠맨」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
| 임재문 | 09-11-28 01:02 | | 고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라는 글을 떠올리게 합니다. 팬팔이 맺어준 인연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간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처럼 새록새록 떠오르는 생각들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감사합니다. | |
| | 박영보 | 09-11-28 12:41 | | 같은 서울, 그것도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으면서도 직접 만나본적도 없었습니다. 사망에 대한 기사를 통해 그녀가 지척인 불광동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로 일본 여학생과의 대화를 통하여 비슷한 연배로서의 공통성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분의 가족과 함께 자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 |
| | 정동호 | 09-11-28 06:23 | | 한 편의 드라마를 읽었습니다. 실화가 드라마보다 더 재미 있음은 진솔한 이야기라 그럴까요. 그 여인의 딸에게 이 글을 보내면 반갑다 할 것 같군요. | |
| | 박영보 | 09-11-28 16:02 | | 그분의 남편과 따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아픈 추억을 불러 일으켜드릴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 |
| | 정진철 | 09-11-28 08:47 | | 저도 중학교때 미국에 사는 슬로빈스키 재크린이라는 여학생과 펜팔을 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
| | 박영보 | 09-11-28 16:15 | |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 살고 있던 여고생 Pam Wolf와도 펜팔을 했었는데 1975년 처음 도미했을 때 전화국을 통해 그 이름을 찾으려 해봤지만 List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60대 중반이 돼 있을 펜팔 친구를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터인데요. 감사합니다. | |
| | 최복희 | 09-11-28 12:06 | |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문학을 하시기에 그 아름다운 추억을 이렇게 되살리게 되지요. 좋은 또 읽게 해 주십시오. | |
| | 박영보 | 09-11-28 16:24 | | 삶 속에서의 기억들중에서도 가끔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척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직접적으로는 단 한번의 만남도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세라복에 덧이를 내놓고 미소짓고 있던 모습의 타무라 시스꼬와 그의 남편과 딸까지도 마음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박원명화 | 09-11-29 11:57 | | 지나간 추억을 가지고 이렇게 멋진 작품을 그릴 수 있음이 바로 수필가의 행복이 아닐까요! 박영보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지나간 삶의 편린들을 떠 올려 봅니다. 허구적인 '소설', 상상으로 꼬아 지은 '시' 보다도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수필'의 멋이 제대로 살아 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 |
| | 박영보 | 09-11-29 17:23 | | 아직도 이삼십대의 조카녀석들이나 거래처의 젊은이들, 또는 자식들이나 그들의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마음이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걸 가지고 저 자신이 아직 젊고 그들과 차이가 별로 없을 것 같은 청춘을 간직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파묻혀 있을때도 많으니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 수록 현실 감각을 잃고 있을 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또는 내일의 일보다도 지난 날들의 일들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35년 넘게 살고 있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고국에서의 지난 날들 생각이 많아집니다. 아직도 새파란 색깔을 좋아하고는 있지만 나이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09-12-01 08:31 | | 박영보선생님이 펜팔이야기를 하니, 저도 추억이 새롭습니다. 우리 작가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c누나와 펜팔을 시작했지요.
나의 문장실력은 한 8할이 그때 연마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은 오랜 외국생활을 하고 계시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글솜씨를 지니고 계시니 놀랍습니다.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임이 분명합니다. | |
| | 박영보 | 14-08-05 07:46 | | 사실 편지는 진솔한 속마음을 나누기에 다주 좋은 도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말로 직접 전할 수 없는 내용도 마음을 가다듬어 가며 정리를 해 나가다 보면 상대방이 나의 마음속까지도 알 수 있게 하는데 더 많은 설득력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이희순 | 09-12-02 09:22 | | 선생님의 아주 특별한 경험이 우리 인생의 함축으로 다가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고교시절 그룹 펜팔과 만남의 추억이 새삼스러워 그 여학교를 찾았더니 20여년 전에 폐교되었다는 소식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추억은 환상, 한여름 밤의 꿈이 되었습니다. | |
| | 박영보 | 09-12-02 12:41 | | 학교는 없어졌지만 추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환상일 지언정, 한 여름밤의 꿍이었을 지언정 그 추억은 영원히 남아 꽃을 피우고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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