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가정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일설에 따르면, 레닌은 트로츠키(Leon Trotsky)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다. 만약 그의 뜻대로 되었더라면 이후 소련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레닌은 정치적 유서 속에서 "스탈린은 너무 냉혹하다. 서기장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라고 쓸 정도였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의 사망직후 스탈린은 유서에서 그 부분을 삭제하고, 정치국의 주요 지도자인 카메네프(Kamenev) 및 지노비예프(Zinovev)와 함께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제안한다. 결국 세 사람이 단결해 트로츠키를 숙청(肅淸)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정적 제거를 위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이 단행된다.
마이클 H. 하트는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이라는 흥미로운 저서에서 63위에 랭크된 스탈린의 인품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스탈린의 인품에 대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철저한 냉혹함이다. 약간의 애정이라든가 동정, 자비로써 그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편집광(偏執狂)에 가까우리 만큼 의심이 많은 성질의 소유자였다. 그 반면 아주 정력적이고 외고집, 예리한 통찰력, 비상한 정신력을 가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자신의 외아들 야코프의 포로교환을 거절하여 수용소에서 사망하게 만들었을까.
'강철의 사나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희대(稀代)의 독재자 스탈린. 한때 러시아 인민들의 '태양'이었던 요세프 V. 스탈린. 그것이 '위선의 태양'이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예술영화의 품격을 잃지 않은 채 사색적으로 반추해 보는 영화 한 편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물론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말이다.
니키타 미할코프(Nikita Mikhalkov) 감독의 1993년 작 <위선의 태양 Burnt by the Sun>이 바로 그것. 이 영화는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물론 스탈린의 악명 높은 전제정치와 개인숭배의 폐해를 고발한 서방세계의 영화는 부지기수다.
예컨대 기존의 영화는 의례 당시의 다큐멘터리 필름에 픽션을 절묘하게 삽입하여 희대의 독재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해 왔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할코프의 형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이너 서클 Inner Circle> (1991년)이라는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는 '크레믈린(즉 이너 서클)'에서 스탈린을 위시한 권력 핵심부들을 위해 헌신했던 한 영사기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인민들의 오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위선의 태양>은 같은 소재지만 무언가 좀 다르다. 2시간이 넘는 장편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체제의 모순과 치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마치 따사로운 초여름의 햇살아래서 천렵(川獵)을 즐기듯 쉽게 감상할 수 있는 한 편의 영상시와 같다. 요컨대 형제 감독 모두 스탈린 정권의 반민중성과 반혁명성에 염증을 느꼈지만, 형은 체제 외부(즉 할리우드)에서, 동생은 내부(러시아)에서 각각 전체주의의 폭압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행하고 있는 셈이다
때는 1936년. 무대는 스탈린의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그의 대형 초상화를 하늘에 띄울 애드벌룬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다차'라는 한적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산과 들 그리고 강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특권계층 인사들의 별장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평화롭기만 한 이 마을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온다. 훈련 중이던 한 탱크 부대가 지휘체계의 혼선으로 이 마을에 잘못 들어온 것이다. 무지막지한 탱크들의 질주에 무참히 짓밟히는 드넓은 밀밭, 그리고 꺾어진 밀대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들꽃 몇 송이는 이 영화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마침 휴가차 와있던 세르게이 대령(니키타 미할코프 감독 자신)의 설득 반 협박 반으로 군인들은 곧 철수를 하게되지만 뒤이어 찾아온 또 다른 불청객은 불가항력적 힘(권력=폭력)으로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다.
세르게이는 '혁명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권력자 스탈린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아내 마루샤(잉게보르가 답코나이떼)와 앙증맞은 딸 나디아(감독의 친딸 나디아 미할코프), 그리고 가족-친지들과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째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마루샤의 전애인 드미트리(올렉 멘치코프)가 불쑥 나타나면서 평화롭던 가정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것은 바로 검붉은 태양 빛에 타버린 위선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위선의 태양을 상징하는 두 개의 장치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절정을 이루게 될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이며, 다른 하나는 드미트리에게 따라다니는 선혈과도 같은 조그만 불덩어리다. 전자는 물론 영화의 내러티브 전개에 따른 자연스런 플롯의 일부다. 그렇지만 후자는 플롯 및 스토리의 전개와는 무관하게 감독이 관객에게만 직접 보여주는 위선의 실체에 대한 고도의 메타포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위성(衛星)의 태양' 정도가 될까. 그것은 또한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소격효과로도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드미트리의 등장으로 영화의 전반부는 세 사람간의 미묘한 삼각관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10여 년만에 재회한 드미트리와 마루샤 사이에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되살아나게 된다. 한편 세르게이는 두 사람의 과거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 여섯 살 난 어린 딸 나디아와의 뱃놀이에만 온 신경을 쓴다. 흐르는 강물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 이들의 모습은 찬연한 햇살과 은빛여울의 후광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실제의 부녀지간이 펼쳐 보이는 가슴 뭉클한 명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처럼 짧은 행복한 시간은 그것이 더 이상 되풀이 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기에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파토스를 자아내게 한다.
철모르는 나디아는 드미트리를 삼촌으로 알고 이내 그와 친해진다. 그런 나디아에게 드미트리는 자기가 젊었을 때 마루샤와 겪었던 첫사랑의 환희와 좌절담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해주며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한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그가 이처럼 느닷없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게이에게서 자신의 첫사랑의 연인을 되찾기 위해서 인가. 그리하여 그가 첫사랑만을 빼앗아 간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세르게이에게는 그래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멜로드라마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위선의 태양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드미트리는 연적(戀敵)으로서가 아니라 정적(政敵)으로 나타난 비밀경찰이었다. 딸의 배웅 속에 '이너 서클'로 압송되는 아버지. 이처럼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극에 달했던 지난 수년 동안 구소련에서는 무수한 아버지들이 혹은 어머니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사랑하는 딸 혹은 아들을 홀로 남겨둔 채로. 스탈린이 단행한 숙청의 결과 몇 사람이 살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2천만 명쯤은 될 것이라는 것이 대략적인 추산이다.
어쨌든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압살하는 체제의 폭력을 이보다 더 섬뜩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선정적인 폭력장면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말이다. 미할코프 감독은 "이 영화를 혁명의 배반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바친다"고 했다.
<출처:http://blog.naver.com/russiaclassi?Redirect=Log&logNo=130007471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