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eLISAbeth, 죽기로 결심하다
내가 정말로 마음이 아팠던 건, 리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리반이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만의 세상을 걷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랑을 하고, 속상해 하고, 체념을 하고, 그리고 새끼고양이를 껴안았던 리반,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날은 리반과 내가 수족관을 가기로 한 하루 전이었다. 그날, 리사와 나는 극장에 가서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을 보고 리사의 시집 담당자가 추천한 한식당에서 한정식을 먹었다.
“같이 산다는 친구는 요즘 어때?”
나는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내 지갑 속에 있는 두 장의 수족관 티켓 덕분이었다. 우리는 차 안에 있었고, 눈앞에는 이 나라를 이등분한다는 거대한 강이 해가 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요즘엔 생선에 빠져있어요.”
“생선?”
“그래요. 물고기라고도 하죠.”
리사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언젠가 쟝을 따라 무형 문화재 축제에 갔다가 ‘세계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리사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 쟝과 함께 들었던 그 소리를 어김없이 떠올린다. 은으로 만들어진 쟁반에, 고운 옥구슬이 구르던, 어쩐지 비현실적이던 소리.
얼마 전엔 사자를 좋아하지 않았나? 아니, 미어캣이던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치켜뜨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속에서부터 비린 냄새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평소에 그녀에게 리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지만, 이렇게 말문이 트이면 어쩔 방도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일몰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고 했지만,
“빨리 당신을 안고 싶어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자 정말로 기쁘게 웃었다. 잔뜩 신이 난 그녀는 내가 조금도 흥미를 가질 수 없는 허무한 것들―자베르 역 배우의 키가 너무 작아서 위압감이 덜했다는 둥, 생선구이가 비렸다는 둥, 한식당 사장에게 해준 사인은 사실 오타가 있었다는 둥, 내 의사 친구가 자꾸만 떠올라 장발장의 대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는 둥―에 대해 한참을 조잘거렸었지만, 나는 아무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 않았다―가 더 적절할 것이다. 그녀가 동그라미를 겉도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숨을 돌리며 그녀의 변덕에 상황을 정비할 시간을 잠시나마 벌 테니까. 그녀가 또 다시 속을 파고들어오기 전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수월히 총알을 맞받을 수 있게.
“그나저나 궁금해.”
그러니까 이러기 전에,
“뭐가요?”
총알을 침착하게 받아낼 수 있게.
“리반.”
―이라는 아이. 하고 리사는 덧붙여 말했다. 또 다시 비린 냄새가 났다.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감히 그 천한 입술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놓고 내 것을 함부로 언급한 저속한 행위에 대한 형벌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나는 그녀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에 앉아있는 리사에게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가녀린 목선을 진득이 잡아 물었다.
유진? 하고 그녀가 불렀다.
“리사, 지금 바로 안아도 되요?”
―리반을 생각하지 마.
“뭐?”
“지금 당장 당신을 안고 싶어.”
―정말로 숨통을 끊어버릴지도 몰라.
작게 속삭이고 원하던 대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숨결을 빨아들이고 내 속에서부터 찔끔찔끔 새어나오던 역한 냄새를 쏟아주었다.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면서도 나는 여체에 대한 육욕보다는 지갑 속의 티켓, 그 쉬운 종이 두 장이 다음 날 리반에게 가져다 줄 기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의 정사는 평소보다 더욱 격렬했고, 나는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지껄였다. 내가 사정을 끝내고, 리사는 포만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밑바닥을 긁던 자신의 성적 갈증이 차고 넘치도록 달아올라서 꼭 배부른 돼지 같은 표정을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나는 또 다시 상상을 했다. 그 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 책, 읽지 않는 게 좋아요.”
그녀 말대로 그 책을 내려놓았더라면,
“뭐라고요?”
“그 작가가 오늘 죽을 예정이라더군요. 기분 나쁘지 않아요?”
그녀를 정신 나간 관심종자로 치부했더라면,
“헤르만 헤세나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당신은 몹시 기분이 나빴나 보군요.”
“… 뭐, 아님 말구요.”
싱긋 웃는 그 말에 그저 돌아서 왔더라면. 이제 와서는 난 잘 모르겠다. 그 초가을 어느 날에 너무도 단정한 얼굴로 내게 ‘죽음’을 말하던 한 이상한 여자, 도대체 어떤 사고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향해,
“저기 근데,”
다시 고개를 돌리게 했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엘리자베스―로 시작하는 이름이 저자 란에 박힌, 흰색의 아주 얇은 책을 들고 있었다.
“죽을 예정이라는 건 어떻게 알죠?”
그렇게 물었던 순간이,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긴박했었던 느낌으로 기억된다. 그럴 이유가 사실은 전혀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 지금의 내가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긴박한 기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히어로가 독이 든 차를 마시는 순간에, 안 돼, 제발, 거기서 멈춰, 하고 조급해지는 것처럼.
“내게 약속했어요. 오늘이 아닐 이유가 없을 테니, 아마 약속을 지킬 거예요.”
이것도 자살 방조죄에 포함되나요? 그녀는 내 팔에 잔뜩 끼워진 형법 도서를 눈짓하며 말했다. 너무도 친절하게 웃기에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살? 아, 잠깐만. 약속이라니. 지금 그러니까, 이 작가와 서로, 그, 아는 사이란 거잖아요?”
횡설수설.
“각별하죠.”
“그리고 오늘 자살을 할 거라고 당신에게 약속했다?”
“내 이름은 리사에요.”
“뭐요?”
“‘당신’이라는 말은 꽤나 볼품없이 들리는군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눈이 너무도 진지했다.
“난 그저 내일 아침 그 책을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불쾌하게 여길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줄이고 싶었을 뿐이에요. 안 그럼, 이 작가가 너무 불쌍하잖아. 안 그래요?”
“노력해야할 부분이 그 부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가서, 말려요, 당장.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단어씩 힘을 주어 말했다.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무슨 근거를 들이대며 살라고 하라는 거예요?”
“죽을 이유가 없으니까. 아까부터 말끝마다 ‘이유가 없다’ 뭐다 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당장 가서 말해요. 당신은 죽을 이유가 없다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주위에선 낮게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법학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해요?”
하!
“뭐라고요?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만 두죠. 내가 당신에게 괜한 소리를 했군요. 호의를 이런 식으로 매도하다니.”
“아니, 이봐요. 저기, 그, 리사. 난 오늘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겠어요. 그리고 그 작가를 내일 아침에도 기쁜 마음으로 찬양하고 싶군요. 그러니 그 사람에게 가서 딱 한 마디만 해요.”
잔뜩 화가 나 뒤돌아서는 그녀를 돌려세워 어깨를 붙잡고 나는 절실하게 말했다. 팔에 들려있던 전공 책들이 거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그 하얗고 얇은 책만은 여전히, 절대로, 내 손에 들려있었다.
“하,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리사.”
나도 내가 왜 그 작가의 목숨을 구걸하는지, 구걸해야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달리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곳에 서 있던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 쟝이었다면, 그는 최선의 행동을 알고 있었을까.
“…… 좋아요. 죽을 이유가 없다고요. 그거면 되는 거죠? 이걸로 과연 뭘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녀를 돌려보내고, 나는 그날 밤새 그 책을 읽었다. 차라리 두꺼운 판례집을 해석하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비논리적인 단어 조합뿐이었던 이상한 책. 그리고 다음 날, 이 나라의 모든 언론이 그 작가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세상을 음유하는 시인 Elisabeth…….」
“무슨 생각해?”
정신을 차리자, 내 품에 안긴 리사가 나른하게 그러나 소름이 끼치도록 얇은 목소리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리사의 침실. 나는 차 안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그 짧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그녀의 침실에서 수차례 그녀의 육체를 ‘범했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요.”
당신. 그 때의 그녀는 이 단어를 그토록 싫어했다.
“후회하니?”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는 어쩐지 울음이 날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요.”
자상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며,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내가 이 법전에 적인 조항 수만큼 알고 있다고.’
「세상을 음유하는 시인 Elisabeth,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다!」
‘꼭 그렇게 말해 줘요, 아름다운 리사.’
늦엇습니다 연재도, 시간도.
늦은 만큼의 무언가가 잇어야 할텐데 말이죠.
자음님의 댓글 영향이 컷나봅니다.... 다들 코멘트를 보고 갓겟지 머라고 지껄엿는지
*자음님 이 치명적인 사람.. 알바 당장 때려치워요 이게 머하는 짓이에요 저렇게 두고 가버리다니, 나보고 성실연재 함께 가자더니 이 거짓부렁쟁이!!!!!........... 지송ㅋ 새벽엔 제가 좀 감성적....ㅋ 암튼 덕분에 지난 화 조회수가 폭발적이엇습니다 기분은 좋더라구요 후후 어쨌거나 이번화도 똥邕 나는 똥만드는 유기체인가..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자음님 알바도 홧팅 건강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