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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와 야반도주하여 트로이로 돌아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자, 일단 프리아모스왕 이하의 트로이 궁정은 발칵 뒤집힌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내 트로이 궁전은 안정을 되찾았다. 즉,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장악하기 위해 요즘 온갖 책동을 벌이고 있기에, 어차피 트로이와 그리스는 한 번은 싸워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언제가 되었든지 간에, 분명히 저 위대한 신의 제국이 있는 이집트와 중동으로 가는 길을 뚫으려 할 테지.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결전을 치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스와 헬레나가 트로이에 돌아오자, 헬레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그녀가 아름다워서 였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그녀가 운명적인 사랑을 찾아, 단 며칠을 함께 지낸 파리스를 따라 자신들의 나라에 왔다는 그 낭만적인 이야기가 트로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파리스와 헬레나는 큰 환대를 받았고, 두 사람은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정신없이 즐기며 행복한 삶에 빠질 뿐이었다. 이러한 파리스의 행동에 분명히 반대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옛날 파리스를 버린 뒤에 태어난 여동생 카산드라 공주였다. 카산드라는 파리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대뜸 소리쳤다. “파리스가 돌아온다면 파리스 때문에 트로이는 위험해 질지어다.” 파리스가 태어날 무렵, 흉흉했던 트로이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이미 궁중에서 실성한 사람이라는 분위기였다. 카산드라는 청소년 시절 언제인가 갑자기, 자신은 아폴론 신이 자신을 사랑하게 했다며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물로 아폴론 신으로부터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다. 자기 자신은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 모양으로 그녀는 미래에 대해 온갖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지껄이고 다녔다. (트로이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카산드라. 피카르트 작품)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큰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치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그런 것을 거부했다. “나는 아폴론 신의 사랑을 얻었지만, 결코 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지. 그래서 신이 노하여 불행하게도 내 말에서 ‘믿음’을 빼앗아 간거야. 그래서 나의 말을 그 누구도 믿지 않지.” 카산드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궁중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가끔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는 줄곧 조용하기만한 카산드라였으므로 궁중사람들은 이내 그녀를 포기하고, 가끔 카산드라가 예언이랍시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혀를 끌끌 차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카산드라. 자신은 치명적인 진실을 알지만, 그 진실을 사람들이 믿지 않아서 멸망한다는 소재는 미술작품 보다는 주로 문학적인 곳에서 수없이 차용되었다. 특히 이는 현대 공포물의 근간이 된다. 19세기 클링거 작품) 그리하여, 카산드라는 파리스가 돌아오면 트로이에 위협이 된다고 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또한 곧 닥쳐올 그리스 연합군의 엄청난 공세 앞에 트로이를 지켜낼 수 있을지 모두가 꽤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트로이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리스군의 선봉에선 아킬레우스는 “불사신”이라는 명성이 돌 만큼 전쟁의 천재로 명성이 높았다. 과연 트로이가 부유하고도 굳건한 성이라고 한들, 그리스의 대군과 선봉에선 아킬레우스의 전력을 버텨 낼 만한 인물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에도 한 명의 위대한 영웅이 있어서 아킬레우스의 천재적인 전쟁의 재능과 맞설만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파리스의 형이자 늙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또다른 아들 헥토르였다. 아킬레우스가 하늘이 내린 전쟁의 천재였다면, 헥토르는 꾸준한 노력으로 착실하게 전략을 연마한 모범생이자 수재였다. 천재 아킬레우스와 모범생 헥토르는 과연 견줄만한 상대였다. 번득이는 영감과 재치, 그리고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법으로 기기묘묘한 싸움을 펼치는 것이 아킬레우스라면, 헥토르는 정공법에 따른 확실한 승리와 시간을 두고 꾸준히 노력하며 확실한 세력의 우세를 이용해 싸움을 펼치는 노력파였다. 헥토르는 기골이 장대하고 굳건한 사나이로 이름이 높았지만, 또한 아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요,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으로 뭇 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는 항상 현실을 직시하며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물이었고, 그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한 프리아모스를 보조하여, 마치 젊었을 때의 프리아모스처럼 트로이의 평화와 번영이 키워나가기 위해 노력을 다하는 훌륭한 왕자였다. “헥토르는 뛰어난 남자로 자라나긴 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가는 아이는 아니야......” 프리아모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헥토르는 항상 성실하고 충직했지만 재미있고 사랑스런 아들이라기보다는 좀 무뚝뚝했다. 프리아모스로서는 옛날 들판에 버린 것 때문에 죄책감이 남아있기도한 파리스가 더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더군다나 항상 성실한 헥토르에 비해, 파리스는 다소 반항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어서, 왠지 그 어린 느낌이 늙은 프리아모스 왕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는 뒤늦게 나타난 파리스를 편애라면 편애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때문에, 헥토르의 부하들은 나를 위해 항상 성심을 바쳐 일하는 헥토르에 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파리스에게 반감을 품기도 했다. “어디서 양치기나 하며 굴러먹다가 들어온 사람 아닌가. 프리아모스 왕은 지나치게 파리스를 대우하는 것 아닌가.” 헥토르의 주변 사람들은 상당수가 파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헥토르 본인은 아무런 불만 없이, 계속 묵묵히 프리아모스 왕을 도왔으며, 뒤늦게 만난 동생 파리스도 왕실 생활에 적응을 잘 하도록 최대한 형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파리스가 헬레네를 그리스에서 데려오자, 헥토르는 그 때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헥토르는 진정으로 자식과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간 관계의 신의와 의리, 가족 관계의 고결함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로 자신의 동생이 갓난 아기의 어머니요, 한 사람의 아내인 여인과 순간의 감정으로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은 큰 패륜으로 여겨졌다. 헥토르는 동생인 파리스에게 찾아가 꾸짖었다. “파리스여. 너는 어찌하여 남의 행복을 짓밟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짓을 저질렀느냐. 한 순간의 혈기로 어찌하여 긴긴 시간 수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두렵게할 엄청난 일을 했느냐. 그리고 어찌, 그리하였으면서도 되돌리려 하기는커녕 이처럼 즐기고만 있느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헥토르였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파리스의 대책없는 행동에 분개하고 있었다. 어쩌면 프리아모스와 헥토르 2대에 걸쳐 온 힘을 다해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온 트로이의 영화가 단번에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협에 처한 것 아닌가. “하지만, 어찌하겠소.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파리스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오직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헥토르는 분개한 마음을 억누르고 돌아갔다. 그것은 어쩌면 불타는 사랑의 열정을 지니고 있는 동생을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질투해서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곧 헥토르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지금 파리스로 인해, 예상치 못한 시간에 갑자기 일이 터졌을 뿐이지, 결국 그리스와 트로이는 중동과 이집트로 나가는 바다를 두고 한 판 겨루어야 할 숙명이다.” 헥토르는 전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갑자기 돌아온 미인 헬레네에 정신없는 왕실 분위기를 안정시키고 착실히 전쟁을 지휘하기로 했다. 헥토르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방법대로, 그러다 훨씬 더 성실하게 병사들을 조련했고, 트로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강력한 트로이의 방벽을 더욱 굳건하게 보수했다. 또한 헥토르는 갖가지 전술을 연구하고 그에 맞추어 병사들을 훈련하였다. “언제가 되든 오너라.” 그렇게 헥토르는 만반의 준비를 다하며 그리스 연합군의 침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한편 그리스 연합군은 기세 좋게 바다를 지쳐 트로이로 향하고 있었다. 끝없이 늘어선 배들의 규모는 수백척을 헤아렸다. “누가 가장 먼저 트로이에 발을 딛고 싸우는가?” 어느새 그리스 연합군의 수많은 장군들은 그것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함대의 규모 따문에 그리스 연합군은 스스로 자신감에 가득찼다. 그들은 트로이에 가장 먼저 상륙하여 제일 먼저 공을 세우는 사람이 누가 될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최고의 속도로 노를 저어라.” 함장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노잡이들은 미친 듯이 노를 저었고, 정신없이 나아가는 속도 때문에 함대들끼리 충돌해서 엉키거나 뱃머리가 바닷속으로 처박히는 배가 있는 등 혼란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부동의 선두는 아킬레우스였다. 병사들을 완벽히 통솔하는 그의 일사분란한 지휘는 항해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아킬레우스의 함대는 그 어떤 함대에 보다도 선두에 자리잡고 바람처럼 바다를 내달려 단박에 트로이를 휩쓸 기세였다. 아킬레우스의 함대는 그렇게 신나게 달려나갔다. 이올리스를 떠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 드디어 거뭇거뭇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터키 지역의 트로이가 멀리 희미하게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때 아킬레우스의 가장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다가와 말했다. “고향 미리미돈에서, 바다의 여신이시자 미르미돈의 어머니이신, 테티스 왕비님께서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눈물로 아들의 출정을 걱정하던 어머니의 전갈이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바라보았다. “테티스 왕비님께서 쓰시기를, 트로이 군은 분명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을 테니, 가장 먼저 트로이에 발을 딛는자는 반드시 목숨을 잃을거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처음 트로이에 닿는 것은 피하라 하시는 군요.” “하지만, 파트로클로스 자네도 병사들을 이끄는 처지이니 잘 알겠지. 처음 적의 땅에 발을 딛고 맨 앞에 서서 싸우는 것은 장군으로서 가장 영예로운 일이자, 가장 쉽게 명성을 드높이고 가장 큰 칭송을 받고는 일이라네. 어찌 그것을 놓칠수 있을까.” 단연 선두에 서서 배를 몰아 나가고 있는 아킬레우스는 자뭇 테티스의 걱정이 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다혈질의 아킬레우스를 보조하는 것은 역시 침착하고 사려깊은 파트로클로스였다. “하지만, 이 전쟁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길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아킬레우스 왕자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선두를 다툴 일은 이번 뿐만이 아니라도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기회가 그처럼 많은데, 아직 트로이에 한 번 가보지도 않은 우리들이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그곳에 먼저 발을 디딜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본시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사이였다. 파트로클로스가 그렇게 말하자, 아킬레우스는 곧 그 말을 받아들이고, 첫 번째 상륙을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함대의 속력을 늦추었다. 곧 정신없이 선두를 경재하며 달려나가고 있는 그리스 함대의 선봉은 프로테실라우스가 되었다. 그는 명문가의 왕자로 꽤나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참전한 사람이었다. 프로테실라우스는 결국 가장 먼저 트로이의 해변가에 배를 대고, 굉장한 함성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해변의 모래톱을 딛고 뛰쳐나왔다. 프로테실라우스는 창을 든 병사들이 따르는 선두에서서 번쩍이는 청동검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프로테실라우스님이 신의 뜻을 받들고......” 그런데, 프로테실라우스가 첫 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굵은 화살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화살은 프로테실라우스의 목을 정통으로 꿰뚫어 프로테실라우스는 그대로 절명했다. “감히 우리의 고향을 짓밟은 녀석들을 혼내주자.” 화살을 쏜 장본인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였다. 헥토르는 잘 훈련된 군사를 몰래 해변가에 숨겨두고 우왕좌왕하며 그리스 군사가 처들어 올 첫 순간을 노렸던 것이다. 과연 테티스의 걱정대로, 처음으로 해변에 도달했던 사람, 프로테실라우스는 또한 첫 번째 전사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스의 군사들은 용맹했으나, 이미 장군을 잃은 부하들은 헥토르가 이끄는 병사들 앞에 유린당할 분이었다. 그리스의 병사들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돌창을 던지고, 그 창의 돌날을 트로이 병사들의 얼굴과 복부를 향해 내질렀으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리스 군사들을 일사분란하게 트로이 병사들은 포위했고, 장군인 헥토르는 돌창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청동검을 들고 트로이 병사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구해주고 도와주었다. 프로테실라우스의 병사들은 극심한 공격을 받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처음 상륙한 프로테실라우스의 병사들을 맞아 헥토르는 해변의 모래언덕에서 가볍고도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기나긴 트로이 전쟁이 처음 시작되는 것일 뿐이었다. - 다음 편,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의 노래"는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