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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기
관동중 교장 |
지난 7월 중순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산책을 나갔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14층에 사는 가족을 만났다. 40대 초반 정도의 부부와 초등학교 3학년쯤 되는 딸이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13층을 눌렀다.
“○○야! 너 이번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낼거야?” 아빠가 딸에게 묻는다.
“글쎄……아빠!”
아이가 말꼬리를 흐리자 엄마가 한마디 한다.
“너. 그동안 학교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이번 여름방학에는 다른 것 하지 말고 그냥 즐겁고 신나게 노는 것이 어때?”
“엄마! 그래도 학원에는 하나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 공부 말고 꼭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나만 하고, 마음껏 노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순간, 내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니, 감동의 대화에 흥분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10층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냥 내릴 수 없었다.
“너무 잘 하시네요. 이 나이 때는 신나게 노는 것이 최고입니다. 정말 가장 멋진 방학이 될겁니다.”
약간 흥분된 내 목소리에 의외란 듯이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교장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반가운 듯, 그러나 조금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아이 어머니가 내게 되묻는다. 그러는 사이 13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서 가족을 향하여 한마디 더 남겼다.
“꼭 그렇게 하세요. 그게 정답입니다. 공부에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마시고 신나게 놀게 하세요.”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공손히 머리 숙여 인사하는 가족들의 밝은 모습을 닫히는 문 사이로 보았다.
그 날에 있었던 14층 가족의 엘리베이터 안의 짧은 대화가 오랫동안 귓전에 맴돌았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데 오랫동안 여행이라도 갔는지 14층 가족을 방학 내내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개학 바로 직전인 며칠 전, 단지 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너 방학 때 신나게 놀았어?”
“예! 신나게 놀았어요.”
친구들과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어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다. 개학 전보다 표정은 더욱 밝아졌고 피부도 까무잡잡하게 탔다. 키도 더 커진 것 같았다. 방학 전 계획대로 정말 신나게 즐긴 방학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1호에서 4호까지, 15층이니까 60호가 함께 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초등학교 어린이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과의 만남은 대개 등교시간이거나 밤 9시 이후 시간이다. 대부분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갔다가 오는 그들은 하나같이 지쳐있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난 5월 중순의 일이다. 해마다 동일한 곳에 다녀오던 1학년 체험학습 장소를 바꾸었다. 호화로운 콘도에서 좋은 시설을 즐기고, 추운 날씨인데도 종일 실내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적극 찬성했고 운영위원회, 학부모님들도 모두 동의하였다.
시설과 환경은 좀 나쁘지만 함께 소리치고 웃고 땀 흘리게 하고 싶어서였다.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웃지 못 할 부작용이 밤에 일어났다. 별로 힘든 프로그램이 없었는데도 저녁을 먹고 나니 코피를 쏟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더니 결국 10명이 넘었다. 그 중 한 학생은 코피가 멈추지 않아 119를 불러 응급실로 후송되기도 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노는 놈 위에 미친 놈’이란 말이 있다.
노는 사람, 미친 사람이 사라져가고 있다. 더불어 땀 흘리고 뒹굴며 웃고 즐기는 모습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차고, 재미있게 놀이하는 모습 또한 흔치 않다. 고민하지도 않는다. 문제에 부딪치려고 하지도 않고 문제 속에 혼자 뛰어들지도 않는다. 사소한 문제,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 고민 없이 그냥 어머니 앞에 내려놓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시간만 나면 혼자 앉아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어른 아이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때론 구슬땀을 흘리고, 때론 왁자하게 소리 지르고 웃으며 뛰노는 우리 청소년들을 다시 보고 싶다. 엘리베이터 14층 가족과 같은 대화를 오늘도 듣고 싶다. 14층 어린이가 보낸 방학이 우리 어린이들, 우리 학생들 모두들의 것이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