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교회 갈 준비하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마누라 성화를 뒤로하고, 듣는 <쪼다> 기분이 상해 한 마디 해야겠다. 공부한 것이 '신학' 비슷한 나부랭이인지라 강나루에 있는 신학대학으로 간 친구들이 많다. 선후배들 중에 목사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그래도 목사가 된 동료들이 인생관과 세계관이 다르다고 해서 나보고 <아직도 그 따위 되지도 않는 **공부나 하고 있냐. 이 쪼다야!> 라고 말하는 놈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향하여 <어이 쪼다 나부랭이 목사, 요즘 좀 생각이 깼냐! 사기치는 일은 그만 뒀지!>라고 하지도 않는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그래 넌 너대로 열심히 살아라> 하는 정도로 그친다. 그것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현명한 태도일 수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고, 상대방의 다른 견해에 귀기울이지 않고는 대화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대결장에 들어서면 서로간에 존경심이 깨지고 필리아(Philia)가 무너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정치적-사회적 공동체(Koinoia)는 필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공동체의 중요한 덕 필리아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정치적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나누어야할 중요한 덕(德)목이다. 필리아는 친구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다. 수직-수평적 사회 관계 속에서 인간 서로간에 긴밀하게, 서로 나누어야 할 일종의 <사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난 결코 친구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서 동료들인 목사들에게 감히 <쪼다들아! 구라치지 마라, 머리 나쁜 것들. 너 대학 시절에 학점 얼마나 받았냐. 높은 데 올라가 설교해 보니 괜히 우쭐해지디. 너 따위 목사 설교엔 사자가 가진 <발톱과 이빨>이 없어. 설교에 진실이란 힘이 있어야 해. 주중에 사우나나 가서 목사 나부랭이들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 떨지 말고 공부 좀 열심히 해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건 충고가 아니라 모욕이기 때문이다. 깨놓고 말해서 신학대학원에 간 놈들은 제다 공부를 못했고 좀 덜 떨어진 놈들이었다. 지 꼬락서니 모르고 가끔 방송에 나와 날뛰는 놈도 더러 있으나, 대개는 열심히 사목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직분에 따라 한 시민으로서 성실히 살아간다. 만나 이야기 하다보면 아주 유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불쾌하지 만도 않다. 그럴 마음의 <의지>조차 가지고 만나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들을 용서할 뿐이다. 그 직업이란 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직업인가? 나도 한 때 신학대학에 가려고 생각해 보았던 적도 있었다.
'목사는 봉사하는 직업 나 자신의 꼬락서니를 보니, 속된 말로 양심불량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 그런 일에 나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배반하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생각을 바꿨다. 목사들이 많이 참여하는 모임에 나가보면 대체로 시끄럽다. 늘 단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단 아래에 앉아 차분히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태도는 영 아니올시다 이다. 이거 훈련이 필요하다. 이거 지나치면 시건방져진다. 신도들이 '목사님,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고 떠받쳐주고, 신발 챙겨주고 하는 사람들 주위에 살다보니 버릇이 더럽게 든 친구들이 더러 있다. 이 점을 반성하는 목사들을 보면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은 병세가 완연해지고 연세가 들어 한국에 돌아와 은퇴해 사시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시다. 런던에 얼마간 머물 때 그 분의 설교를 들으러 자주 만났던 분이다. 그 분은 영국 교회를 빌려 주일에 설교를 하셨는데, 예배가 끝나면 교인들을 다들 밖으로 내몰고 자신이 혼자 그 넓은 실내를 청소하셨다. '목사는 봉사하는 직업이지 군림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분의 신념이었던 것 같다. 목사들을 욕하는 이 글을 보면, 아마도 마누라쟁이는 "흥, 너나 잘해 남 말하지 말고. 꼭 빌 볼일 없는 것들이 목사 욕이나 해대고, 예수님 말씀 안 듣고 목사보고 하나님 믿는다니까. 왜 오늘도 교회 안 갈 핑계 찾고 있구나. 정신차려! 이 작자야!" 할 것 같다.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하자. 오래 전에 몇 군데 신학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논리학을 강의했던 적이 있었다. 시험문제 어렵게 내고 점수 박하게 주었다. 이런 정도의 논리학도 못 풀면서 어떻게 '책 중의 책'이라는 성경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겠느냐고 호통치면서. 아마 당시의 수강생들 중 과락 당해서 재수강했던 분들은 못생긴 젊은 친구를 향해 원망 꽤나 했을 것이다. 머리 나쁘다는 욕 되게 얻어먹었을 것이다. 머리 좋은 친구에게 '이 머리 나쁜 놈'하면 욕이 아니다. 그러나 머리 나쁜 친구들을 향해 '이 머리 나쁜 놈' 하면 진짜 욕이 된다.
그래 난 허물이 있다!! 그나저나 난 이런 얘기를 여기다 왜 쓰고 있나. 쪼다이니까! 김진홍씨 말의 요점은 <이 시대에 허물없이 조용한 사람은 그 동안 일을 안 했거나 본래 쪼다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허물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 난 <허물> 있다. 사람이 쫀쫀해서 목사 나부랭이나 욕하고, 주일에 교회가기 싫으면 토요일에 일부러 약속 정해서 술에 취해 들어오고. 김진홍씨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허물이 많은 모양이다. 무슨 허물이 있는지는 물어보지 않겠다. 그 동안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꽤나 씹어댄 것을 보니, 노무현 대통령도 허물이 엄청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도 일 많이 한 사람 아닌가? 그럼, 같은 논리로 노 대통령에 대해서 욕을 하지 말았서야지. 우리가 공자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뽑은 것도 아니고, 일꾼을 뽑은 것이니, 일 많이 하다보면 허물이 생기고, 욕을 많이 얻어먹을 일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노대통령 우리 잘 뽑은 것 아닌가. 더 이상 얘기 할 것도 없다. 입만 아플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잣대가 하나여야 할 것도 없다. 하나의 짓대로만 세상을 재서도 안 된다. 남의 허물도 덮어줄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간에 필리아가 생길 수 있다.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세상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세상일에는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지도자를 뽑는데 지나치게 허물이 많은 자를 뽑을 수는 없다. 설령 지난날의 순간적인 잘못 판단으로 인해서, 이기적인 욕망 탓에, 허튼 생각 때문에 용서할 수 있는 잘못까지도 모조리 까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한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르다. 이해할 수 없는 잘못까지도 지난날의 허물로 덮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린 한 나라의 정치적 지도자를 뽑고 있으니까.
그냥 냅두라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용서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범법 행위까지 덮어가면서 특정한 사람의 허물을 묻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우린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를 헷갈리면 세속적 질서인 법체계는 다 무너지기 마련이다. 김진홍 같이 '이 독사의 자식들인 쪼다들아. 내 말 잘 듣고 그만 허물벗기기에 매달리지 말라. 그냥 냅둬라 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김진홍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정치적 권리만을 가졌지, 다른 사람을 욕하고 이 <쪼다들이>라고 말할 아무런 특권도 가지지 않았다. 우린 당신의 손아귀에서 경영되는 특정한 교회의 종들이 아니다. 그 말은 당신이 경영하는 교회의 열성적 신도들한테나 먹힐 이야기다. 지 집안사람한테 할 얘기를 아무 곳에서나 똥싸대듯이 처바르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향기롭지 않은 세상 더 냄새나는 세상이 된다. 요컨대 나대지 말라는 얘기다. 나설 데(장소), 아니 나설 때, 아니 할 일에(목적) 중뿔나게 말이다. 그래서 김진홍한테 한 마디 한다. 쪼다야 쪼다야 하지 마라, 이 쪼다야! 듣는 <쪼다> 되게 기분 나뻐! 이 세상엔 김진홍의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으로 만족해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는 <허물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들은 김진홍이 말한 <쪼다>들이 아니다. 이러한 현명한 삶의 방식을 갖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도 높은 삶의 질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이 오히려 역사를 움직여 가는 진짜 숨은 봉사자요 일꾼들이다. 이들을 존중하는 사회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 바라는 <인간적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