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창작 강의 / 박정규 (시인)
시론 6. / 시의 본질적 특성에 대하여 막연하게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고, 반면에 분명한 인식이 있기도 하겠지만 한 번 질문해보겠습니다. 詩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경험의 총체이며 꿈꾸고 바라는 세계에 대한 표현이다.’ (이 시론의 주요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는 조태일 선생의 ‘시 창작 강의’에 있는 내용입니다. 거기 동의하기에 소개해봅니다.) 그렇다면 또 시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이겠습니까? 거두절미하고 간단하게 말해볼까요? 인간 정서를 가장 압축된 문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바로 문자언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워즈워드는 ‘시는 강한 감정의 자연스런 표출’이라 했습니다. 서거정은 ‘시는 마음에서 발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인로는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하는 것이 믿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시는 인간의 마음, 감정(느낌)과 같은 내면의 정서를 압축해서 표현한다는 것이 시의 본질에 가장 접근해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자기만의 눈으로 보는 색채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색채를 자기의 종이 위에, 자기의 언어로 그려보는 그것이 바로 시라는 생각입니다. 또 마음의 이 색채는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할까요? 제대로 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합니다만, 딱하게도 이 몸 역시 그 부분에서는 내세울 게 없으니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는 없군요. 안타깝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다만, 속에 담아뒀던 옛글들이나 인용해서 써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주제에 여기에 무슨 ‘시 창작론’을 올리고 있느냐고요? 좀 그러면 안 되나요? 시를 써 온지는 그래도 좀 오래 됐고, 그렇다고 누구한테 배운 것은 아니거든요? 더듬더듬 혼자 길을 찾다가 이제야 겨우 이정표 하나 발견한 느낌이 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같이 나누고 싶다는 것인데 정말 주제 넘는 짓하고 있는 것이냐고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할 말 있으면 덧글로 남겨놓기 바랍니다.) 하여튼 오늘은 공자님이 시경에 남긴 말씀 한 마디를 덧붙이며 끝입니다. ‘詩三百 一言而蔽之曰 思無邪’라. ― 시 삼백 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마음)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니…. 한 마디 덧붙여야겠네요. 생각(마음)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을 나는 순수함으로 봤습니다. 본질을 왜곡하거나 자기 잣대로 재단해서 그것만이 옳다고 우겨대지 않는 성숙성도 여기 포함되려나요? 하여튼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그 본질에 대한 순수성 찾기입니다. 이 부분에서 착오를 일으키면 시 쓰는 일까지도 어쭙잖은 장난이 되는 것이랍니다. 이를 잘 새겨 두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