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위기(영어: Irish Crisis 아이리시 크라이시스, 게일어: Géarchéime na hÉireann 가르케머 너 헤런)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전후 시기인 1937년-1939년에 아일랜드 섬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위기사태들을 일컫는다. 1922년 10월의 아일랜드 위기와 구분하여 제2차 아일랜드 위기라고도 한다. 1937년 위기를 제2차 아일랜드 위기, 1939년 위기를 제3차 아일랜드 위기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아일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유럽의 다른 신생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왕족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입헌군주국을 수립하려 했으나 불발(제1차 아일랜드 위기),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1930년대 하반기까지 장기집권하고 있었다. 아일랜드는 외교적으로 중립국이었지만 전통적으로 영국을 적대해 왔다. 유럽 대륙에서 독-불 간에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고조되던 1930년대 하반기에, 브리튼 연방의 좌익정권에게 후방의 반공·민족주의 국가 아일랜드는 가려운 뒤통수였다.
1937년 4월, 영국의 최상위 노동자 평의회인 노동조합협의회(TUC)는 비밀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후방 정리의 필요성이 만장일치로 합의되었다. 이후 TUC는 아일랜드를 끌어들이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아일랜드의 정권을 전복시킬 것을 목적으로 음지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라킨(James Larkin), 베티 싱클레어(Betty Sinclair) 등 아일랜드의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눈치채고 런던에 밀사를 보내 근시일 내에 아일랜드에서 일어날 총파업 저항을 지원하기 위해 브리튼 연방이 무력시위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4월 말, 예정대로 대도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의 총파업이 개시되었고, 영국 함대가 더블린 앞바다에 배치되었다.
TUC 의장 오스월드 모슬리는 함대에 상륙작전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은 결과적으로 모슬리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어째서 모슬리가 이런 모험주의적 행동을 했는지는 2060년 현재까지 정설은 없다. 라킨 등 아일랜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거점이 일부 대도시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고, 서부의 농촌지대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유격전에 도가 튼 동포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던 도중 영국군의 아일랜드 상륙시도 및 "노동자의 적 마이클 콜린스의 신병 인도와 브리튼 연방의 아일랜드 위임통치의 수용"을 요구하는 모슬리의 돌발행동이 일어나자 그들은 경악했다. 이에 라킨, 싱클레어 등은 아일랜드를 프랑스, 영국과 동등한 인터내셔널의 가맹국으로 대우하지 않을 경우 자신들은 영국의 무력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는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는 한편 사태의 수습을 위해 콜린스와의 협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모슬리는 아일랜드 사회주의자들이 소시민적 민족주의를 사회주의의 국제주의적 대원칙보다 우선시한다며 비난하고 아일랜드를 전면 침공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명령을 서기장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가 정부수반으로서 직권을 발동하여 유보시켰다. 한편 콜린스는 영국이 아일랜드를 정복할 것을 장담할 수 없지만, 영국이 침공할 경우 정권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을 인지하여 사회주의자들의 협상 제안을 받아들여 라킨과 싱클레어 등을 초청하여 회담을 개시했다.
에릭 블레어 영국 서기장은 아일랜드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소규모 수행단만 이끌고 더블린을 방문했다. 좌우를 막론한 아일랜드 각 정파 지도자들과 에릭 블레어,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는 GPO에서 회담을 열고, “아일랜드 공화국 정체와 민족 독립의 유지, 직능의회인 상원의 노동자 평의회화” 등을 조건으로 영국군의 철수와 총파업 중지를 최종 합의했다. 합의 내용을 GPO 앞에서 공개 발표하는 자리에서 블레어는 이 합의를 반드시 존중할 것이며, 아일랜드가 브리튼 연방을 직접 적대하지 않는 한 브리튼 연방이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임을 약속했다. 이렇게 1937년의 제2차 아일랜드 위기는 종료되었다.
1939년 7월의 플란더른-발로니아-엘자스-로트링겐 위기가 결국 8월 전면전으로 비화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아일랜드 대통령 콜린스는 독립운동 시절부터 자신의 심복으로 알려진 온 오 둡허이(Eoin Ó Dubhthaigh)를 대통령궁에 초대해 회담했다. 이후 오 둡허이는 파드라크 오 말러(Pádraic Ó Máille), 가로드 오 키나간(Gearóid Ó Cuinneagáin) 등 우익 정파 지도자들과 더블린 모처에서 비밀리에 회동했다. 이들은 외세 영국 및 영국과 내통한 좌익들에 의해 강요된 현 체제를 1937년 이전으로 회복시키는 것에 콜린스 대통령이 동의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제로 옮기기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세 사람은 각자의 근거지로 내려가 오 둡허이는 모네간, 오 말러는 골웨이, 오 키네간은 벨파스트에서 IRA의 재궐기를 호소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벨파스트는 베티 싱클레어의 혁명노동자단(RWG)의 텃밭이었기에 오 키네간의 봉기는 조기에 진압되었고, 오 키네간은 RWG의 추적을 피해 오 둡허이의 민병대에 합류했다. 오 말러의 골웨이 민병대는 서부 농촌 지역을 순회하며 병력을 모으고, 오 둡허이의 모네간 민병대는 수도 더블린을 장악하기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에서는 TUC 의장 모슬리가 아일랜드의 반혁명을 진압하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며 전군에 비상대기령을 발동하고 다시 한번 아일랜드 상륙을 명령했다. 하지만 서기장 블레어는 이 명령에 대한 공식적 반대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각 기지와 항구에 반대로 출입금지령을 명령한다. 그리고 콜린스, 라킨, 싱클레어 등과 사태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오 둡허이 등 우익 반란군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이것이 독립과 통일의 영웅 콜린스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봉기 3일째 되던 날 콜린스가 라디오 담화에서, 자신이 오 둡허이에게 “아일랜드의 독립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통일 아일랜드와 민족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며, 자기 발언을 오해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론을 분열하다 못해 내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봉기자들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내용이었고, 오 말러의 민병대 소집도 지지부진해졌다. 오 말러는 모병을 그만두고 더블린 공략군에 힘을 더하기 위해 동진하지만, 애슬론 지역에서 정부군 및 친정부 IRA에게 포위섬멸당해 항복한다. 오 둡허이의 민병대는 더블린 외곽에서 시가전을 벌이지만 시민들이 정부군에 호응하여 역시 진압당했다.
체포된 봉기 주동자들은 자신들의 봉기를 콜린스가 지시했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에 좌익 세력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물증이 없거니와 콜린스 본인이 쿠데타 진압을 주도했기에 의혹은 유야무야된다. 이때 콜린스가 오 둡허이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또 이 내란미수 사건에서 콜린스가 차지하고 있는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봉기 주동자들은 국외 추방되었고, 단순가담자들은 사면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제헌의회가 선출되었고 제2공화국 신헌법이 제정될 때까지의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에는 콜린스가 연임되었고, 정부수반인 총리에는 상하원의 합의로 베티 싱클레어가 임명되어 개헌을 지휘하기로 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모슬리가 TUC 총회에서 서기장 블레어가 소영웅주의적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독단행동을 위해 군의 동원을 방해하여 반혁명이 성공할 뻔했다며 블레어의 실각을 주장했다. 하지만 블레어와 뜻을 같이하는 극단주의자 일부와, 모슬리의 중앙집권 정책에 염증을 느끼던 자치주의자, 연방주의자, 회중주의자 전원이 모슬리를 역으로 비난했다. 모슬리는 반박도 못한 채 야유와 욕설 속에 웨스트민스터에서 도망쳤다. 사회 원로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선거구 의원인 버트런드 러셀이 발언권을 얻어 모슬리가 아일랜드 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에 있어서 보인 제국주의적 행태를 논증하는 연설을 한 뒤 모슬리의 의장직 해임을 발의했다.
러셀의 논리정합적인 주장에 반론 없이 모슬리의 실각안은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에 모슬리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하나의 브리튼!” 따위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모슬리를 지지하는 일부 지방군이 협의회장을 점거하고 협의회의 일시적 기능정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정파들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결집해 양자가 케이블스트리트에서 충돌했다. 블레어는 서기장 권한으로 TUC 협의회장에 병력을 파견해 쿠데타군을 무장해제시켰고, 케이블 스트리트에는 기마경찰대를 보내 모슬리 지지자들을 진압했다. 해임된 모슬리는 국외 추방되고 블레어가 다음 선거 때까지 의장 대리를 맡기로 함으로써 제3차 아일랜드 위기가 비로소 종식되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s/?novel_post_id=27136
카이저라이히에서 모티브와 초기 상황을 따온 설정을 지인 몇명과 같이 짜고 있습니다.
이 설정에 대한 여러 글을 비정기적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카이저라이히 팀의 허가도 받을거고요.
하여튼,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