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교육원은 12월 2일 오후 2시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2015 승가교육 전문연구자 연찬회’를 열었다. 연찬회 제목은 “혜각존자 신미대사,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 어떻게 기여했는가”로, 12년간 이 분야를 연구해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펴낸 박해진 씨의 특강으로 진행됐다.
훈민정음의 정신은 애민(愛民), 편민(便民)- 백성 고통 사라지고 자비 퍼지기 바라는 불심 반영
신미 스님의 외조부는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이두, 구결, 향찰의 대가였던 이행이었고, 스님의 은사는 성균관 출신인 함허당이었다. 함허당은 지공, 나옹, 무학 대사로 내려오는 동아시아 흐름을 선도한 법맥을 잇고 있었고 그것이 신미 스님에게로 이어졌다.
박해진 강사는 “함허당은 ‘함께 읽고, 가만히 읽고, 소리내어 읽고, 골라 읽는’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정진했다”며 “신미 스님도 이런 전통 하에서 공부해 훗날 훈민정음 불전 언해의 씨앗을 심었다”고 했다.
또 세종에게 신미 스님을 소개한 이는 “세종의 형이자 미륵불이라 불리던 효령대군”이라며, “이미 신미 스님은 향찰, 구결을 비롯 범어도 익혀 새로운 문자를 구상하던 세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443년 세종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 창제가 전격 발표된 당일 기사에 집현전 학자의 이름이 단 한명도 기록돼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 집현전의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세종은 훈민정음 보완 등을 위해 핵샘신료를 대동해 두 차례 초수행궁으로 가 총 6개월여를 지내는데 이곳은 신미 스님이 있던 속리산 복천사와 지척의 거리였다.
박 강사는 세종과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을 보강하는 데 뜻을 모았고 “신미 스님은 세종께 무극(無極)이 법신(法身)임을 아뢨고, 무극과 태극(太極)의 두 가지 정신이 훈민정음을 끌고갔다.”고 밝혔다.
“583편의 부처님 일대기인 대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을 과연 세종이 썼을까?”
박 강사는 “글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세종이 자신의 이름을 넣었지만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신미, 수양대군, 그리고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의 합작으로 완성했다”고 강조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언해본』을 『석보상절』 1권에 실었고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훈민정음의 교재로 삼았다.
박 강사는 이러한 이유로 “훈민정음은 세종께서 백성을 위해 만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지도”라고 평가했다.
이후 신미 스님의 권유로 세종이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고 훈민정음 창제 1등 공신 신미 스님을 위해 경복궁 안에 26칸의 내불당을 짓고, 완공하자 세종이 직접 찬불가를 지어 불보살을 찬탄했다. 또 신미 스님의 처소였던 ‘복천사중수 권선문’을 효령대군이 수양대군 등과 작성해 불사 참여를 독려했고 신미 스님의 제안으로 안평대군이 함허당의 저술인 『현정론』을 모인(摹印)했다.
이렇게 왕과 가족들이 친불교적인 행보를 하자 성균관에서는 “요망한 신미의 목을 끊으소서”라는 과격한 상소가 올라왔다. 또 세종의 승하 후 문종이 즉위해 세종의 유훈으로 신미 스님에게 ‘혜각존자’ 존호를 발표하자 집현전 직제학이며 당대 명문장가인 박팽년은 법호를 거두라며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신미는 간사한 중입니다. 어릴 때 학당에 입학해 함부로 행동하고, 음란 방종해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학도들이 사귀지 않고 무뢰한으로 지목했습니다. 그 아비 김훈이 죄를 입게 되자 폐고(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 박탈)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잠적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부도만 남은 신미 스님, 불교계에서 뜻과 업적 전해야
문종 서거 후 세조는 즉위해서 신미 스님은 경복궁의 내불당에 주석하며 대장경 인경사업을 맡겼고 집현전을 통해서는 정인지 등의 반대에도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다듬고 덧붙인 『월인석보』 찬술에 전념했다.
박 강사는 『월인석보』를 “훈민정음으로 서술된 산문문학의 첫 새벽이며 미래로 솟은 목탑”이라고 평가했다.
신미 스님이 세조6년 복천사에서 훈민정음으로 『능엄경』 언해에 매진하는 등 불전을 언해하는 작업을 하자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언해를 국책사업으로 시행한다.
박 강사는 “『능엄경언해』 가 마무리 되지 세조는 발문에서 모든 공을 혜각존자 신미에게로 돌렸고 혜각존자는 발문으로 화답”했다고 설명했다. 간경도감에서는 『묘법연화경 언해』, 선종의 요결서인 『선종명가집언해』 등 중요한 불교책들이 훈민정음으로 해석돼 나온다.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이름을 옛 문헌이나 사료에서 발견하기는 아주 어렵다.
박 강사는 “『선종명가집언해』 는 초간본이 한국에 남아있지 않고 일본에 있다. 그래서 ‘세조 구결, 혜각존자 등이 번역했다’는 기록이 남았다”며 “신미 스님의 비문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복천암에 부도 한 개만 남아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이제 불교계에서 눈 밝은 스님들이 공부하고 자료를 찾아,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이룬 불교정신과 신미 스님의 업적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댓글 신미스님의 업적을 잊지는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