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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어린시절을 겪었기에,
사회적 약자인 서민을 위하여 글을 쓰기도 한다.
2011. 3. 1일 참사랑 이경용
큰부자가 가난한 서민들을 등쳐먹는 범죄를 봐주는 검찰수사를 해선 안된다.
악인의 큰부자는 경제 범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기소전의 수사단계에서는 검사출신의 변호사를 쓴다.
기소후에는 판사출신의 변호사를 쓴다.
큰부자의 악인한테 돈을 받은 변호사는 “유전무죄”의
혜택을 주려고 온갖 노력을 해준다.
하남시 대명강변타운 아파트 조합원들은 무주택자였다가, 내집을 마련하려고
거의 전부가 은행대출을 받았다. 은행 빚을 얻고서 집을 마련한 가난한 서민들이다.
참사랑은 10대의 어린시절에, 배고픈 가난한 고통을 혹독히 겪어봤다.
그래서 1,351명의 서민 조합원들을 등쳐먹는
김상배 사장과 지승동 사장의 범죄피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진정한 “서민사랑의 마음”을 알아주고, 민원이야기에 대하여 조합원 가족들의 많은 후원과
이해를 얻기 위하여 참사랑의 “과거 가난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서울의 재개발 지역에서 쫓겨나는 불쌍한 철거민 세입자를 위하여, “철거민 세입자의 주택
및 상가마련 대책”을 이명박 대통령님, 오세훈 서울시장님, 국회 앞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빚지고 살아가거나, 먹고살기 힘든 서민들을 위한 마음은
“혹독한 가난의 고통”을 겪은자 만이 알 수 있다.
그 가난의 불행을 이겨내고, 혼자의 힘으로 배움의 지식을 얻은 용기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이루어질,
범죄피해를 당한 서민을 위한 봉사의 글을 쓸 수 있다.
부모님의 정미소 사업 부도로, 배고픈 가난이 닥쳐왔다.
1969년 봄, 이제 막 시골중학교에 입학하였건만, 학교를 무단 자퇴하였다.
먹을 식량이 떨어져서, 6개월간 “보리 넣은 무죽”을 먹고 살았다. 배고픔에 시달렸다.
시골 산 밑의 흙벽 스레트 집에는, 외할머니, 누나, 형,
만13세의 참사랑, 9살 6살 4살의 어린 동생 3명이 살았다.
어린 손자들에게 “보리 무죽”을 주는 외할머니의 한숨소리, 슬픈 눈을 보았다.
57세의 아버님, 45세의 어머님은 먹고살 것을 찾아서, 서울지역을 헤매고 돌아다니셨던 것이다.
1969년 10월, 서울 변두리의 상계동에서 사글세의 식당을 차렸다.
만 13살의 어린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였다. 부모는 가슴이 찧어지게 아팠을 것이다.
그 식당에서 음식배달, 청소하고 부엌에는 수돗물이 없어 양동이(바께쓰)로
식당물을 밖에서 길어날랐다.
식당 안에서 일을 하던 중에, 대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갔다 왔더니, 어디를 쏘다니다가 왔냐고,
아버님께 꾸중을 들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학교도 안보내주고 죽어라 일만하여도
아버님의 화난 목소리에 식당집을 가출하였다. 3일간을 굶었다.
시골 읍내의 정미소 집의 부자소릴 듣다가, 어느날 갑자기 학교도 못다니고, 음식배달. 청소.
식당 물을 길어나르는 희망이 없는 힘든 일에, 어린 소년은 너무나 괴롭고 슬픈 나날을 보냈다.
1970년 11월의 찬서리가 내리는 긴밤은 너무 추웠다. 만 14세의 소년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천성이 착하여, 아무리 배가 고파도, 훔쳐 먹을 줄을 몰랐다.
어린 날에 자살을 생각하며 밤새 추위 속에서 슬피 울기도 하였다. 찾아갈 곳도 없고, 잠잘 곳도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3일 밤을 보내고 나서 식당집에 돌아오니, 어머님이 크게 우셨다.
아버님도 슬퍼하셨다.
3일 동안, 꼬박 굶어보지 않으면, 배고픔의 고통을 모른다. 한창 먹을 14살의 나이에,
등에 붙어버린 배를 움켜잡고, 배고픔의 고통을 참아냈다.
이런 과거를 회상하면, 눈물이 난다. 절대로 이런 어린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다짐을 받기도 하였던 내용을 써버렸다.
만13세부터 17세까지, 4년간 식당에서 일하면서, 돈벌러 기와공장에도 다녔다. 기와 기술자 밑에서
데모드를 하였다. 기술자가 찍어낸, 막 생산된 생기와를 햇볕진 땅에다가 계속 나르는 일이다.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나이에, 고등공민학교 2학년 과정의 중간에 편입하였다. 식당 집을 찾아온
사람이 어린 학생의 장래를 위해서, 고등공민학교라도 보내보라고 아버님께 권유해서 생긴 일이다.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식당 일을 하면서 고등공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너무 가난하여, 고등공민학교의 수업료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하였다.
수업료를 안냈다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 상처도 받았다. 부자소릴 듣던 정미소 집의 생활이 그립기도 하였다.
식당에서 번돈은, 시골 산밑의 가족 생계비와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다녔던
셋째형의 하숙비와 학비로 보내어졌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더 큰 돈을 벌기위하여, 중노동의 막걸리 자전거 배달을 하였다.
20리터의 막걸리통 8개를 자전거 뒤의 짐칸에 싣고 술집과 구멍가게에 배달하는 일이다.
1973년 5월의 만 17세때부터 20세의 3년간이었다.
밤에는 학교인가도 없는 초라한 건물의 야간 전수학교를 막걸리 배달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 자전거 때문에, 노가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추석과 설날 명절이 되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전거배달을 하였다.
하루종일의 막걸리 배달을 끝내고 식당집에 돌아오면, 어린 10대의 몸은 파김치가 되어버렸다.
끙끙 앓아누우며, 3일간 온몸이 아파왔다. 그 아픔이 3일을 넘겨서, 야간학교도 무단결석했다.
그래도 아픈 몸을 끌고, 새벽부터 배달하여야 하였다.
아침이면 내 또래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다.
지난날의 시골 고향 옛친구들이 수없이 생각났다.
배달하던 18살의 5월 7일에, 아버님이 만 61세로 세상을 뜨셨다.
돈이 없어, 병원도 못갔다. 죽을 날만 기다리셨다. 종로 5가의 보령약국에 가서,
약을 사드렸을 뿐이다. 매일 번돈을 아버님께 갖다드렸다.
병든 아버님이 좋아하셨다. 어느날, 배달을 마치고 식당집에 돌아오니,
참사랑 너는 다커서 괜찮은데, 옆에 있던 철없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자식 3명을
가리키며 불쌍하다고 하신 아버님의 슬픈 얼굴을 보았다.
막걸리 배달의 노동일은 미래가 안보였다. 정식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다.
검정고시 합격증으로는 취직도 안되었다. 국가공무원이 되고자, 막걸리 배달을 그만두었다.
1달간 독서실에서 죽기살기로 공부하였다.
몸무게 10킬로가 빠져서, 병자처럼 빼짝 말라버렸다. 어지럽기도 하였다.
75,000 명이 응시하여, 1,500명을 뽑는 50대 1의 1976년 10월의 총무처 주관의
국가공무원 5급 을류 시험이었다.
1500명의 합격자 중에서, 220명의 1차 발령자에 들었다.
수학, 국사, 일반사회는 100 점을 받았다. 그러나 정규수업을 못받은
영어와 국어는 단기간 내에 완성하는 과목이 아니었다.
1년만 공부할 수 있다면, 고려대와 연세대는 합격할 자신감이 생겼으나,
가난한 가족을 생계부양하기 위하여 대학공부를 아예 포기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 3명을 가르치려면, 내 자신이 학교에 다닐 형편도 안되었고, 돈도 없었다.
옆의 동료들은 야간대학을 많이 다녔고, 그저 부러웠다. 내 일신의 출세, 영달보다는
외할머니. 홀어머니. 동생들 3명과 함께 살며 그 가족의 부양이 더 크게 생각되었다.
모셨던 외할머님은 90세로, 1987년도에 돌아가셨다. 육회를 좋아하셨기에, 길을 지나가다가
정육점 앞에 “빨간 고무다라”에 천엽 등의 소내장이 담겨있으면, “소잡았구나”.. 소 육회 반근을
사와서, 외할머님께 꼭 드렸다. 1근 또는 2근을 구입할만큼,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부자가 아니었다.
외할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월 용돈 3만원을 드렸다. 현재 모시는 어머님의 연세가 87세이다.
어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때에도 용돈을 빠뜨린 적이 없다.
가난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가난을 벗고자 부동산을 연구하며, 여기저기 다녔다.
1986년에 안산 주택지 80평을 평당 16만원에 매수했다. 은행융자와 동생 2명의 노동일로 번돈을
투자했다. 4년뒤의 1990년도에 상계동 ~ 안산간 전철이 개통되면, 1평당 100만원 이상으로
값이 오를 것으로 투자 예상하였다.
1990년, 1991년에 평당 100만원, 평당 180만원에 팔았다. 큰 돈을 만졌다. 아버님이 세상을
뜰 때까지, 크게 불효하고 가족의 생계를 외면했던 큰형님께, 평촌아파트 32평을 사드렸고,
동생들도 도와주었다.
형제애로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집 마련의 큰돈”을 그냥 줄 수 있었다.
혼자만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가난만 벗어나면 되었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참사랑이고 참 행복이라는 나만의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 아들로 외할머님, 홀어머님, 동생들 3명을 부양하며 살았고, 지금껏 노모를 모시고 있다.
착한 아내를 만난 행운이었다.
식당일을 하던 중에, 막걸리 배달을 하던 중에도, 시골의 채권자들이 찾아왔다.
차비만 해 줄뿐이지,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가난한 죄에, 빚까지 있었다.
배달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술에 취한 오토바이에 치어서, 오른쪽 팔을 크게 수술하였다.
식당집 부근의 경찰출신 문구점 아저씨가 흥정하여, 치료비 포함해서 20만원을 받았다.
수술한 다음날부터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아까징끼만 바르고 말았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돈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 20만원은 빚을 갚고 먹고사는데에 썼다.
아까징끼만 바른 그 상처는 지금도 흉하게 남아있다.
그저 나의 가난했던 슬픈 어린 시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안산 땅을 판 돈이 생기자, 1992년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시골 빚을 이자 붙여
전부 갚아드렸다. 어머님은 이제 발 뻗고 마음 편히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부모님께서 빌려주었던, 받을 돈은 엄청 많다. 그러나 갚아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시골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38년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연락처가 끊겨서,
채권자 1사람만 빚을 못갚았다. 그런데 동창 모임에서 채권자였던
국제양화점인 구둣가게 아저씨의 아들인 서상수 동창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님께 갚을 빚을 물어보니, 너무 오래되어, 3만원인지 5만원인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전남 광주에서 개인택시를 하는 서상수 친구이다.
친구의 부모님은 진즉 돌아가셨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갚아드려야 하는데,
부모님을 대신하여, 꼭 받으라고 해서 3년전인 2008년도에 100만원을 갚아주었다.
3년의 연속된 흉년으로 시골 읍내의 정미소 공장은 가동이 잘 안되었다.
아버님은 쌀 나락의 수집상들에게 빌려준 큰돈을 많이 떼였다.
갚을 돈을 못갚아서, 정미소 공장. 기와집 두채. 읍내의 600평이 넘는 대지를
채권자들한테 넘기고, 반거지가 되어버렸다.
군대 가기 전까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
만 13세부터 만 20세까지 7년 동안을 밑바닥의 천하고 힘든 일을 하여야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님의 뻥튀기 일 등의 가난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어보았다.
참사랑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린 시절의 고생담이다.
대한민국은 “검찰과 법원”을 100% 신뢰하면 안된다. 큰코 다칠 수 있다.
지난날의 불행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은행대출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서민조합원들한테 등쳐먹는 “큰 부자의 범죄”는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참사랑의 과거를 읽어보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무지하고 가난한 서민한테는 법대로 냉정하게 처벌된다.
큰부자와 권력자는 돈과 빽으로 “유전무죄”, “유권무죄”의 혜택을 받는다.
큰부자한테 돈을 많이 받기위하여, 판검사출신의 변호사들이 “전관예우”를 원한다.
도심재개발 사업에서, 유모씨와 조모씨의 2사람은 땅지분을 3평과 5평으로 100개 넘게
쪼개어 팔아먹었다. 조합사업을 방해하고 망가뜨린 “불법 미등기로 지분 쪼개어 전매 및 탈세
(후에, 국세청 18억 세금추징)등”으로 조합에서 형사고발하였다.
당연히 구속기소하고 크게 처벌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사건을 수사한 **지검의 차장검사 출신의
변호사한테 2억의 수임료를 지불한 2사람은 불기소의 벌금만 추징당하는 “유전무죄”의 혜택을 받았다.
2억의 돈 수임료 위력은 대단하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범죄를 저지른 큰부자는 돈으로 변호사를 사서,
유전무죄의 혜택을 입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여, 미리미리
증거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큰부자한테 수임을 받은 변호사를 이겨낼 수가 없다.
가난하고 무지한 서민일수록, 악인의 큰부자를 이기기가 더욱 힘들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매우 불공평한 세상 현실이다. 오죽하면 이명박대통령님께서 공정사회를 강조하십니까?
300억이 넘는 피해를 준, 김상배. 지승동 사장은 비양심과 부도덕한 검은 양심으로
“서민조합원들한테 위법한 이익”을 챙긴 범죄를 저질렀다. 끝까지 법정에 세워서,
그 범죄를 처벌하고 손배상을 받아내야 한다.
악인의 큰부자는 서민상대의 범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수임을 받은 “검사 출신의 변호사, 판사출신의 변호사”들은
“큰부자의 범죄자”한테 유전무죄의 혜택을 주고자 온갖 노력을 해주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고, 피해를 배상하지 않는 큰부자의 범죄 악인한테는 형사처벌과 손해배상의
책임을 반드시 묻기 위하여, “하남 대명강변타운 조합아파트 민원이야기”책까지 만들었다.
검찰수사와 법정에도, 그 책은 증거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참사랑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에, 가난한 서민을 위하여 글을 쓴다.
2011. 3. 1일 참사랑 이경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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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의 인생관 등.....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인생관”을 세웠다.
대학공부와 공직출세도 포기했다. 부자의 꿈도 없었다.
누구한테든지, 피해를 주지 않고, 선행하며 사는 것이었다.
외할머님. 어머님께 효도하고, 형제사랑하며, 두자녀를 잘가르치는 것이었다.
대학교 나온 사람이상의 실력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국세청에서, 전국 전화상담의 법인세 전문 상담관을 역임하였다.
과거의 가난과 역경을 겪어봤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겪는 “대한민국의 불공정한 현실”을 시정하는데
참사랑의 글들이 기여하고자 합니다.
- 서민 운동인 창동 시립배드민턴 경기장 건립민원(이명박 서울시장님 재직시 건립됨)
- 철거민 세입자의 주택마련 등의 대책(철거민 세입자관련의 용적율 인센티브 제공)
- 하남시 대명아파트 서민 조합원들의 피해구제에 대한 민원(현재 수사중)
2011. 3. 1일 참사랑 이경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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