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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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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상계에대한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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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남양홍문은,예로부터삼한의갑족이라하였읍니다. 상계를더듬어본다면,돈황의공공씨에서부터9년홍수를다스려, 물수변을얻어서洪성이되었다는사실이있고. 그로부터,선계를이어오시다가 다음으로는.고구려영류왕22년잠시당나라와화평할시기에고구려의요청으로, 당태종이.(이세민이) 8학사(종중에따라서5학사라는,글도있으나,주로8학사로인정함)를보내서, 동국을교화,하신학사공,諱홍천하공이계시고~ 학사공휘천하공과일곱분의학사가계시니 (이역시각종중마다이름이서로다르며 참고로,홍,은.봉.길.방.위.목.기.등.이라는설과 원주원씨도포함된, 좌우간여러가지8학사를주장하는 종중이있으나,우리의홍천하공은여러곳모두에포함됩니다) 이러한선조어르신들이우리의은수포에당도하시니,이를후세에당곳이라하였으며, 현재경기,화성,서신면의구봉산성이라고도하나,일설에는이곳은나중에만들어진곳이라고도하며,우리의지명자체가고려시대 와조선시대.일제를거친,지금에까지,불일치된다는학설이우세합니다 어쨋건 각설하고. 홍천하공은연개소문의난을피하여신라,지리산덕산촌으로피하셔서. 신라선덕왕으로부터국빈으로예우받으시며 우리신라의신하가아닌唐臣이라는당시최고의존칭을받으셨읍니다. 이후효소왕에의하여덕산촌주를봉함받으시고, 10여세대를계보를이룬이후,실전되었고, 일설은다시중국으로돌아가셨다합니다. 우리는고려때에태조를도와고려개국에익대의공이있으셔서18자의공신호를하사받으신, 태사공諱은렬公을비조로모시게됩니다, 이후 고려인종때의麟州지역의세습패주의호족으로서, 麟州都領중랑장공 을派祖로모셔오던중랑장파에서 麟州都領중랑장公할아버님이,고려개국이후인종때의어르신임으로 太師公을1세鼻祖 로높이모시고,麟州都領中郞將公은후손으로하여2세로 모신집안이되고. 그외태사공휘은렬공의주손임을 주장하는남양군(주손이면태사공파가되어야함)휘 주 의부친, 장간공휘융의네아드님에서13세분파조. 네분이나오시며,(장자휘주,남양군파.제2자휘언박,문정공파,제3자휘언유,판밀직파,제4자휘언수,판중추파)9세휘사윤 의제3자라는예 의아들로서홍자번과그의후손임을자임하는 대언공파.시중공파.시랑공파.상서공파.감영공파.익산군휘순의아들로서당성군이신,운형공의당성군파.운수의익산군파,그외 옛적의자료에는남양군파2세동주와관계가없었던 예사공휘복.파조께서도남양대보에4세분파조로하여 합보되셨고,(예사공파의종가계열과강경공휘빈의계열동일하게합보되심) 역시,휘동주와상관없던부림문중의휘란 의후손조차도, 재신공파라는이름으로3세분파조로합보되셨읍니다. 근래에이르러,남양의각문중이옛적의자료가미비함에도, 남양대보에합보하여옛선조어르신들의 별도로계보를정립하신,뜻을알지못하고.다만세력불리기에동참하는것을, 어떻게읽어야할지? 원래세보나족보라는것은정확하게,알고있는최상계의선조부터모시는것이응당할터임에도, 정확히,고증을확인할한근거도부족한근세에,갑자기.합보에만신경을쓴다면. 혹시나중의災가되지않을까두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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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문의 중시조 태사공(은열공?)은...
분명 태조 왕건이 궁예를 배신하고 황제에 등극할 시기의 최고 공신 "홍유"일 확률이 많습니다.
위의 글들을 종합해 볼 때...
홍씨 문중은 대대로 당성(唐城,당항성?) 인근을 봉지로 받은 지역 호족인데...
고려를 배신한 몽골 제후시절의 이들 봉지는...내내 "인주"로 ...관직은 "도령(都令)"으로 나옵니다.
어느 연구엔...당성(당항성)은 돈황 인근이랍니다.
현재도 당항성이란 지명은 그 남쪽 청해성 인근에 현존하고여...
또한 "홍대순"이 고려를 배신했단 시기의 정황은...
몽골이 타타르(거란)을 정벌하려 갈 시기..첨엔 막다가 굴복,,, 길을 빌려준 혐의 입니다.
몽골에서 카자흐스탄 일대 거란(카라한) 을 치러 가려면...반듯이 통과해야 할 지점이 돈황등의 신장 위그루 지역입니다.
홍씨들이 대대로 봉지로 받아 작위를 세습했던 지역은...
그 황조가 발해든...서발해 격인 거란(요)이든...몽골이든...고려(당고려)이든...내내 요 신장지구 근방였단 얘기가 됩니다.
그래 조선의 홍경례등이 반란을 일으킨 서북도(평안도???) 는...요 돈황 인근일 확률이 많다 예상합니다.
홍길동의 그 도술도...이 지역의 유불선 합일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비슷한 "마니교"일 확률이 많고...
홍씨들의 시조 홍천하(洪天河) 가...8학사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드려왔단 "도교"라고도 하고...유교'라고도 하는 그 종교는...
현재 돈황인근에서 젤 많이 나오는...서역식 불교유적의 "마니교(미트라교,미륵불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원을 흔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 객가(커자)족인것도...
이들의 종교가 기독교로 오인되는 것도...이들의 본고장인 돈황일대 불교는...유불선 합일의 미륵교(미트라교,마니교)였고...
이의 분파가 남방 벽련교였기에 그렇다 예측됩니다.
커자..즉,객가(客家)족들의 본고향도...돈황일대 랍니다.
당과 고구려의 요동벌 싸움때...발해 멸망후 거란(카라한)의 침공 때... 몽골의 침공 때...청나라의 박해 때...점점 남부로 밀려나...
남부인들관 격리된 생활을 유지했던게 객가들이요...그 대표적 예가 당성홍씨가 남양홍씨로 둔갑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이 대륙남부에 설치한 객가촌들도...
이미 거란과 몽골이 송(고려)의 남부 왜인들도 있던 역을 치고 설치한 남한성...쌍성총관부등의 총독 집성촌격을 재 사용한 것일지 싶고여...
남양홍씨의 시조 홍천하는...
신라 선덕여왕이 당의 신하라 하여... 하대하질 못해 당신(唐臣)으로 불리고...현 한반도 당성(남양)에 봉해졌다 하나...
이미 고구려 때 받은 직책이 당성백(唐城伯)이고...
당과 고구려의 싸움때 난처해져...남쪽으로 피신... 지리산(덕산)으로 은거했다 선덕왕의 초빙을 받았다 함은...
돈황인근 당성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투때...신라와 당의 국경 청해성의 당항성을 거처... 사천성 덕산을 거처 호남성 덕산(지리산)에 은거했단 얘기로 들리고...
당시 신라의 위치가 사천성,양자강 이남였단 예측도 하게 만드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홍씨 일가가 대대로 도령직을 역임했단 "인주(麟州)"의 몇 않 되는 위치추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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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백련(白蓮)과 김인경(金仁鏡)의 사랑
인주(麟州)에 백련(白蓮)이라는 기생이 살았다. 김인경(金仁鏡)이 일찍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던 중 인주(의주)에서 기생 백련을 만나 그와 사랑하게 되었는데 헤어진 뒤에 김인경은 백련에게 시를 보냈는데,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에 말을 보내노라.
그대는 당연히 대화봉(大華峰)을 지나가겠지
봉우리에서 만약 옥정(玉井)의 연꽃(백련)을 만나면
이 몸이 너를 그리다 얼굴이 초췌하다고 일러주렴.
라고 하였다.그 뒤에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다시 만나니 백련(白蓮)이 그 시를 바치니. 이에 다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주었다.
城南城北碧重重
성남성북벽중중
疑是巫山十二峯
의시무산십이봉
白髮未成雲雨夢
백발미성운우몽
玉顔都不損春容
옥안도불손춘용
남쪽과 북쪽의 성이 겹겹으로 푸르르니,
마치 이것이 무산(巫山)의 열 두 봉이 아닌가.
백발에 운우(雲雨)의 정은 이루지 못하였는데,
옥 같은 얼굴에 젊은 모습 아직도 그대로구나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오래 만에 만나 기나긴 회포(懷抱)를 풀었다. 백련이 먼저 그리는 감정을 표현한 시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보한집(補閑集)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고 김인경(金仁鏡)의 대답한 시(詩)만 전한다.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김인경이 기생 백련(妓生 白蓮)을 사모한 것을 보고 희롱(戱弄)하며
風暖鶯嬌客路邊
풍난앵교객로변
千紅百紫競爭姸
천홍백자경쟁연
使君却厭春光鬧
사군각염춘광료
獨向秋塘賞白蓮
독향추당상백련
바람결 따스하고 꾀꼬리 소리 아리따운 나그네 길가
수많은 붉은 꽃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길가에 섰는데,
사군(使君)은 어찌하여 화려한 봄꽃을 싫어하는고.
홀로 가을 연못에 피어난 흰 연꽃을 좋아하는가.
라고 하였다 고 한다.
김인경(金仁鏡 ?∼1235(고종 2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 초명은 양경(良鏡)이며. 명종 때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초 조충(趙冲)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예부낭중을 거쳐 추밀원우승선이 되었으며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하였다.그해에 동진(東眞)의 군대가 정주(定州)·장주(長州)로 쳐들어오자 지중군병마사가 되어 의주(宜州:지금의 德源)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한림학사에 오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취하였다. 이어 지추밀원사 상서좌복야(知樞密院事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1232년 강화천도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 이부상서 감수국사(正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여러 방면에 재능을 겸비한 것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특히, 시사(詩詞)가 청신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시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칭송하였고, 서체는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무산(巫山)은 무산지몽(巫山之夢)에서
동의어- 조운모우(朝雲暮雨). 천침석(薦枕席).유사어-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출 전- 문선(文選) 송옥 고당부(宋玉 高唐賦)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 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전국 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의 선왕(先王)이 어느 날 고당관(高唐館)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 지었다 고한다.
중국 무산
김인경이 인주기생과 이별한 시기는...
위그루역사의 카라한(거란)이...탕구트(북송)을 쳤단 시기와 일치합니다.
위의 고려 김인경 과 인주기생의 러브스토리를 보자면...
김인경이 머물던 도성에서 북쪽으로가 인주란 얘기인데...
후대의 해석은...설마허니 중원이겠나..?...허고...
그저 신화의 무산(巫山)에 존재한단 여신(염제의 아름다운 처녀귀신 동생)과의 동침설화를 비유했다고만 해석하나...
김인경의 시를 냉정하게 보자면...
김인경이 있는 도성(성도,한성)이 첩첩산중인 무산(巫山)과 유사해...도성의 성루들을 무산에 비유했을 뿐이고...
도성에서 인주(麟州)까지 가려면...무산을 거처야 함을 이른 글이며...이는 사천성 무산 넘어에 인주가 있단 얘기니...
인주는 오늘날의 신장 위그루 지역이며...인주 인근이 "의주"란 얘기로 보건데...
발해(대진)이 망하자 고려가 점령했다가...거란에게 빼앗겼다 금의 발호로 금을 도와 그 댓가로 되찾고... 다시 몽골에 빼앗겼다...
원과 무굴(明,무굴리스탄) 두 몽골이 싸우던 와중에...
다시 점령하려 하다...명(모굴리스탄 몽골) 출신 이성계에게 도륙을 당한 그 장소...요동과 의주는...
현재의 신장자치구 일대일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우리 홍씨의 정식 중시조 태사공님이야 왕건의 개국공신이니까 빼고...
그 아래 우리 홍문의 중시조격 분들께서...당고려(왕건고려)에 지대한 타격을 입힌 점...당고려(왕건고려)의 후손들께 사과 드리오며...
그래도 하나...
고려를 괴롭히고...결국 대조선을..동국고려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양이들의 멍밍이족...왜놈들에 대해선...
원나라가 그리 구찮으니 왕위다툼 전쟁 끝나고 하자..지발~~~~ 사정을 해도...
원나라 칸들을 부추겨 왜노들을 일망타진할 것을 주창했단 점은 좀 좋게 봐 주셨으면들 합니다.
사실은 홍다구의 라이벌들인 삼별초가 왜노들 지역인 동남아로 숨어 들어서였긴 하지만여...^. .^
그것만 성공했으면...어쩜 근세사 처참한 동국조선족들의 비극들은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여...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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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 사연이 있었군여... 그럼 홍선생님 일가는 어트케 반도 구석진 곳까지.....궁금! 지는 본이 경주인데 증말 아무 쓸모가 없는가 봅니다.... ~ 글구 조상님 탓을 하는 용기에 감탄 ... 입이 쩌~억 벌어집니다 자꾸~ 빠져듭니다~~~~~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김선생님...우리 집안여...?...어른들께 물어보니...한양서 큰 벼슬하시다가...고조부가 무슨 비리혐의로 양주감산가..?...로 오셨다가 일산으로 옮기셨다...증조부가 파주로 오셨답니다...일산땅 반이 우리것이였단 자랑도 너절합니다...^. .^..일산 신도시 생길때 이미 남의 수중이 된 고 선산이 다 파헤처 졌는데...벌초하러 갔던 제 기억으론 자진해서 무보수 묘관리까지 해 주신 분이 있으신 것으로 뵈도...세도는 좀 있었던 집안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례때 어르신들께 여쭤 뵜습니다...양주감사?면...한양 높은 벼슬였으면...그 사적지가 있을 터이고...일산으로 옮겼다면...묘소 외에 원 본가터라도 얘기가 있었어야 하는데...돌뎅이 하나도 집안자랑이 늘어지는 어른들이...왜 거기에 관심이 없나 질문했고여...일산의 묘소도 생각해 보니...높은 벼슬 집안의 정식 묘소라기 모단...산능성이이 임시로 옮겨진 환란기의 가묘로 보인다 질문했습니다..그랬더니...이상한 정보들 너무 보고 댕기지 말라시면서들...구체적 답변없이 뭉게시고들 지나 가시더군여...당신들도 모르신단 얘기의 우리 집안식 표현입니다.
근데..재미있는건...상식적으로 일산이나 양주에 계셔야 할 고조부 증보부님의 묘소는 현재의 파주에 있단 겁니다...담 차례땐...일산에 계시던 그 묘소 분들은 대체 누구시냐고 여쭤 보겠습니다...틀림없이 증조부님까진 7대째 독자라 했고 족보도 그렇게 작성되어 있거든여...제가 다소 당돌한 면이 있답니다.
항상 충격적인 글로 마음 콩콩뛰게 하시더니 이번글은 그냥 혼절시키십니다, 지난번,저에글에 도움글 주시더니 마치 후속글처럼 넘반갑습니다. 그런데 증조,고조부님 산소이신대도 이력이 명확치 않으신가요? 담글 기대됩니다....
당성(唐城)과 당항성(黨項城) 한자부터 틀린데.......ㅜㅜ;
저도 당성과 당항성은 위치가 다르더 봅니다...당성은 돈황인근지역...당항성은...당과 백제&고구려...후대엔 신라와의 경계 구역...이라 생각합니다...송준희님의 글엔...당항(黨項)이라고도...당항(當項)이라고도 했음은...그 당"자가 정식 한자가 아닌 음차나 왜곡 글자라 해석하심도 의미있어 보입니다...양이들이 당(唐)을...탕,탄..으로 지들 맘대로 발음하듯이여...
그리고 하남성인가에 항성(項城)이란 지명이 있었으니...당나라 시대엔 그곳이 당항성일 것이란 분석도 유력하나...항성(項城)이란 말 자체가...어느 특정한 길목위치의 자치구 비슷한 용어니...경우에 따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지명이니...그 곳 만이 꼭히 당항성이라 보기도 어렵다..라고... 어설픈 예상을 해 봅니다...오래 살다보니...한자맹인이 별 짓거리를 다 합니다...^. .^.
홍씨가 매국노임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좀 더럽네요.
네.저도 좀 무안합니다...그래도 홍범도 같은 분도 더러 있었음도 위안으로 삼고 숨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