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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어젯밤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세영이가 이별 통보를 한 일, 또 게이가 나한테 윙크…….
“젠장!”
왜 갑자기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거야?! 그 일만 생각하면 속이 뒤집힌다.
“야, 너 왜 그래?”
내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전 어렵게 구했다던 배우 이나영의 브로마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승민이가 내게 말을 건넸지만 어제 일에 대한 생각 때문에 듣지 못했다.
“강하림! 무시하냐?”
“미안, 못 들었어.”
“무슨 일 있냐?”
“…몰라도 돼, 그냥 신경 쓰지 마.”
욱하는 성격인 승민이는 내 말에 인상을 구기며 날 다그쳤다.
“신경 안 쓰게 생겼냐? 친구 놈이 아침부터 저기압인데 그냥 무시하리?”
“미안. 복잡해서 그랬어.”
“됐다. 뭐가 복잡한데?”
난 눈물을 머금고 승민이에게 어제 세영이와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주었다. 그러자 승민이는 마치 자기 일처럼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헐.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차버리냐? 너 좋다고 난리칠 때는 언제고.”
“그러게….”
“쯧쯧, 불쌍한 놈.”
승민이는 혀를 끌끌 차며 내 어깨를 토닥이다가 다시 이나영 브로마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불현듯 어제 보았던 게이 녀석이 떠올랐다. 망할 게이.
“야, 근데 나 어제 게이 봤다.”
“그래?”
어라? 뭐야, 이 자식. 반응이 왜 이리 싱거워?
“반응이 왜 그래?”
“응? 뭐가?”
“나 어제 게이 봤다니까?”
“알아. 방금 말했잖아.”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어때서. 우리 학교에도 많아.”
“뭐?”
우, 우리 학교에 게이가 있다고?
“우리 반에도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어제 그 게이 녀석과 똑같은 게이가 우리 반에도 있었다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5개월 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던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한 번 주위를 둘러봐라. 어째 전교생이 다 아는 걸 너만 모르고 있냐? 하여간 둔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승민이의 말대로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한두 명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한 녀석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고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몰래 서로의 손을 붙잡고 마치 연인처럼 장난을 치고 있었다. 우리 반 녀석들이 원래 다 저랬던가? 갑자기 주위의 공기가 탁해지는 듯했다.
“윽, 속 울렁거려.”
승민이는 날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입을 크게 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왜 웃어?”
“이 말 들으면 너 여기서 당장 뛰어내리고 싶을걸?”
“뭔데?”
승민이는 또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에 너 좋아하는 놈 있어. 그것도 광적으로.”
“…….”
순간 난 할 말을 잃었고 내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승민이는 그런 날 보며 키득 키득 웃어대기 바빴다.
“못 느꼈냐? 항상 네 주위만 맴돌아. …오, 마침 저기 있네!"
승민이가 검지 끝으로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창문을 통해 교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한 녀석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잠깐, 저 놈은….”
“맞아. 전교회장이야.”
머리도 좋고,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기로 유명한 전교회장 정한새였다. 그런 전교회장이 게이라니…. 저 놈이 게이란 사실을 근처에 있는 여학교 애들이 안다면 뒷목 잡고 까무러칠 일이었다. 여태까지 대쉬하는 여자들을 다 내쳤던 이유가 남자를 좋아해서였다니. 그것도 하필 나를!! 어제 게이가 뽀뽀하는 모습을 본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지 않냐? 남자가 봐도 멋있고.”
“그럼 네가 사귀던가! 아무리 그래도 저 놈은 남자야. 난 여자가 좋다고!”
“그거야 뭐, 나도 그렇지만.”
대화 도중에 갑자기 세영이가 떠오른 난 승민이에게 전화하고 온다고 말하고 복도로 나왔다. 나가자마자 전교회장과 다시 눈이 마주쳤고 전교회장은 화들짝 놀라더니 잽싸게 도망쳤다. 전교회장이란 놈이 저 모양인데 학생회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제발 좀 받아라.”
핸드폰을 꺼내 세영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세영이의 목소리가 아닌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한 번….]
뭐? 번호가 없어? 뭐야, 나랑 헤어졌다고 번호까지 바꾼 거야? 한세영, 너 진짜!
“젠장.”
“넌 자존심도 없냐?”
어느새 교실에서 나온 승민이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고 그 말에 순간 울컥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내 맘이야, 새끼야!”
“이제 마음 정리해라. 여자가 한세영 밖에 없냐? 세상에 널린 게 여자야.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 몰라?"
“난 세영이 밖에 없어.”
“아이고, 어련하시겠어.”
세영이와 통화를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려서 학교가 끝나고 세영이가 다니는 서림여고로 향했다. 같이 가자고 졸라대는 승민이도 함께.
“우와, 여자들 엄청 많다.”
“여고 앞인데 당연하지. 딴 애들 보지 말고 세영이나 빨리 찾아.”
“눈 좀 정화시키겠다는데 왜 방해해. 네 여자니까 네가 찾아.”
승민이는 여자애들을 구경하느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고, 난 정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여자애들 중에서 세영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을 찾아 봐도 세영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집에 간 건가?
“야, 저기 한세영 아니야?”
“뭐? 어디?”
“저기.”
승민이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세영이가 정문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영이에게 한걸음에 달려가려고 했지만 가다가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영아!”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낯선 녀석이 세영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그 남자에게 달려가 와락 안기는 세영이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아, 가슴이 쓰리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안겨있는 세영이의 모습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도대체 저 놈은 누구지? 어째서 세영이를 안고 있는 거냐고! 절대 용서 못해!
“진정해, 강하림!”
“이거 놔!”
승민이가 그 놈에게 뛰어가려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승민이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승민이가 갑자기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내 두 팔을 결박했다.
“놓으라고!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참아! 사고 치면 안 돼!”
내가 부리는 난동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날 힐끔힐끔 쳐다본다. 하지만 정작 세영이는 이 쪽은 신경도 안 쓰고 그 놈과 다정히 팔짱까지 낀 채 저 멀리 사라져갔다. 그렇게 또 다시 눈앞에서 세영이를 놓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만난 세영이의 친구를 통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세영이가 세 달 전부터 나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자식이 더 좋아서 내게 이별을 고한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세영이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는 여자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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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영이가 나 몰래 바람을 피웠다는 것만 생각하면 일주일이 흐른 지금도 화가 잔뜩 치밀어 오른다.
“한 번만 해주라. 응?”
오늘 아침 학교에 오자마자 승민이가 내게 세영이보다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라며 미팅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난 세영이에게 배신당한 상처가 컸던 탓인지 다른 여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 여자라는 존재를 어떻게 믿어야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보면 내가 세영이를 많이 사랑하긴 했었나보다.
“이제 여자 안 만난다고 했잖아.”
“그러지 말고 날 봐서라도 한 번만!”
“싫다니까.”
”그러지 말고 가자~ 어?”
내가 한사코 거절하자 승민이는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날 귀찮게 했다. 얼마나 끈질기게 달라붙던지 결국 승민이를 따라 미팅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서야 미팅 상대인 백화여고 여자 애들 두 명이 나타났다. 승민이는 수줍게 인사하는 여자애들을 보며 나사 하나 빠진 것 마냥 실실 처 웃다가 내 귓가에 대고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오길 잘했지?”
“아니.”
“왜? 둘 다 예쁘기만 하구만!”
솔직히 승민이 말대로 예쁘기는 했지만 눈길은 가지 않았다. 나 혹시 이러다가 게이의 길로 접어드는 건 아닐까? 갑자기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게이가 된다니! 말도 안 돼! 난 평범한 이성애자란 말이다! 속으로 발악하는 사이 본의 아니게 여자애들의 말을 모조리 씹어버렸고, 바로 옆에서 승민이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져 억지웃음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렇게 지루하기만한 미팅은 계속 되었고, 슬슬 한계에 다다른 난 집에 가고 싶어서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비록 승민이가 다리를 꽉 붙들고 있어서 실패했지만.
“파트너 정해서 따로 데이트 할래?”
“그래, 좋아!”
“어떻게 정할 건데?”
미팅이 막바지로 접어들자 승민이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꺼냈다. 무슨 파트너를 정해? 그리고 네들은 왜 동의하는 건데? 나만 빼고 나머지 세 명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한껏 들떠 있었다. 제길, 이대로 확 도망 가버릴까?
“하나, 둘, 셋 하면 마음에 드는 사람 찍자. 하나… 둘… 셋!”
승민이와 단발머리 여자애는 서로를 가리켰고 그 옆에 긴 생머리 여자애는 날 가리켰지만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모두들 당황해하며 날 바라보고 이내 승민이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나와 긴 생머리 여자애를 억지로 연결시켰다.
“둘이 하면 되겠다!”
그렇게 강제로 긴 생머리 여자애와 파트너가 되었고, 승민이와 단발머리 여자애는 다정하게 팔짱까지 끼고 둘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아무래도 둘이 제대로 눈이 맞은 모양이다.
“저기… 우리 어디 갈래?”
그냥 집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여자애가 얼굴을 붉히며 물어왔다. 아무데도 가기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말했다가는 왠지 울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낮게 한 숨을 내쉬며 여자애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여기 분위기 좋다. 너 이런 곳도 알아?”
“어.”
왼손으로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더니 여자애는 멋쩍어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난 생과일 쥬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애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참 동안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여자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아니.”
“그럼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니?”
이거 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찰나에 옆 테이블에서 낯선 남자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 같이 무식하게 가슴만 큰 애가 무슨 매력이 있겠어?”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여자애는 놈의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곧 울음을 터트릴 듯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여자애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흩뿌리며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런 순진한 여자애를 울리다니, 이거 완전 질 나쁜 놈이잖아?
“너 뭔데 끼어들어?”
“그냥 심심해서.”
하, 이 놈 보소. 심심하다고 처음 보는 여자애를 울리냐? 같은 남자로서 창피하다. 에라이, 집에나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카페를 나서는데 방금 그 놈이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내가 왜 따라 오냐고 묻자 그 놈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언제?”
“네 갈 길이나 가라.”
더 이상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 하고 놈을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놈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런데 어째서?
“여~ 다시 만났네?”
어째서 저 놈이 우리 집 담벼락에 서있는 거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건 누가 봐도 계획적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저 몹쓸 놈이 우리 집 앞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너 뭐야. 스토커냐?”
“음… 비슷해.”
능구렁이 수백 마리는 잡아먹은 듯 능글맞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놈을 보니 속이 느글거린다. 또 게이냐?!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무슨 말인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보던 중 일주일 전 세영이에게 차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던 게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느꼈던 역겨움이 다시금 치밀어 오른다.
“공원 게이가 너냐?”
“빙고!”
빌어먹을!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놈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장난 아니게 긴장이 됐지만 짐짓 태연한 척 하며 놈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집이나 쳐가!”
그리고 그대로 뒤돌아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그 미친놈이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 박태인이야!!! 박태인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미친 새끼야!”
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며 다시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었다. 그러자 그 놈은 대문에 딱 달라붙어서 더 큰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외쳐댔다. 저 새끼가 미쳤나! 동네방네 시끄러워 죽겠네. 난 두 귀를 틀어막고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놈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지만 밤이 되어 잠드는 순간까지도 놈의 이름 세 글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해용 ㅎ.ㅎ
첫댓글 글 잘 읽고 가요
감사합니당!!
박태인 이라고!!!!!!!!!!!!!!!!!!!!!1기억 하겠어 ㅋㅋㅋㅋ
감사해용!!
누구랑 잘될까요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