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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는 원래 쾌락에 큰 흥미가 없었다. 십 년 가까운 미국의 독신생활 중에서 술과 여자는 거의 가까이 하지 않았다. 딱히 금욕생활을 했다기보다는 별로 그런 것이 끌리지 않았다. 원래 조선에서 살던 때에도 그다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었거니와, 미국 생활에서는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여자를 만났다. 뮤리엘과 처음 만난 것은 교회에서였다. 주말에 교회에서 오가며 얼굴은 여러 번 마주쳤는데,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서양 미인인데 눈매 어딘가에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그 정도였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느 날 심부름꾼이 찾아와 환자가 있으니 왕진을 부탁했다. 왕진가방을 들고 어느 호텔로 찾아갔더니 뮤리엘과 그녀의 어머니, 두 사람이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약간의 치료를 마치자 젊은 뮤리엘은 금방 증세가 호전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보름 이상을 계속 앓았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계속 왕진을 다녔고 그러면서 뮤리엘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조선의 여자와 미국의 여자는 달랐다. 조선은 내외가 있다. 혼인을 하기 전에도, 혼인을 하고난 후에도, 여자와 남자는 내외를 했다. 부인은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어모셨고, 집안에 어려움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꼼꼼하게도 집안을 꾸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표정이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속으로만 삭히고, 겉표정은 항상 무뚝뚝했다. 조선의 여자들은 살림하는 목석 같았다. 미국의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집안에서 살림을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것은 조선과 미국이 다를 바 없었으나, 미국 여자들은 훨씬 더 사람 같았다. 표정이 있었고 감정 표현이 있었다. 뮤리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녀는 아주 여성적이고 나긋나긋했으며, 역사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여성적 감수성을 가졌으며, 아주 귀여운 유머감각을 가졌다. 모두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열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세균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죠? ” “그렇지요. 외부의 세균과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몸에 열이 나는 것입니다.” “논쟁을 벌이면 볼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군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할 때면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완치된 이후에는 교회에서 만나거나 가끔 그녀가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서른 살, 뮤리엘은 스물세 살이었다. 스스로를 서재필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나는 이미 두 번 결혼했었다. 첫 번째 부인인 경주 이씨는 몸이 약해서 혼인 다음 해에 죽었고, 재혼했던 광산 김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갑신년에 온 집안이 몰락할 때 죽었다. 이제 결혼한다면 세 번째가 된다. 조선의 결혼과 미국의 결혼은 의미가 조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든 미국이든 결혼이란 그 사회의 안정된 구성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도 미국인으로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이 나라의 여성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편이 낫다. 하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유색인종으로서 배경이 전혀 없는 내 핸디캡을 채워줄 수 있는, 더불어 가치관과 취미가 맞는 여성이어야 한다.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면 모든 것을 만족시킨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여성적 성격에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췄고, 작고한 그녀의 부친은 철도우편국을 설립하고 초대 국장을 역임했던 사회 지도층이었다. 적어도 워싱턴의 사회지도층들은 철도우편국의 미스터 암스트롱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뮤리엘은 내게 결핍한 모든 것을 채워줄 수 있다. 나는 뮤리엘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주변의 반대, 특히 뮤리엘의 어머니의 반대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뮤리엘의 어머니는 최근 재혼했고, 유색인종 사윗감을 내켜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반대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결혼 생활 준비를 하려니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특히나 주택 자금이었다. 나는 명색이 의사지만 돈은 거의 없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는 정부에서 직원에게 제공하는 독신자 숙소를 이용했는데, 개인병원을 창업하면서부터는 숙소가 없었다. 처음에는 사무실 안에서 지냈고, 이후에는 저렴한 호텔에서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한 여자를 데리고 살면서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하게 제대로 된 집을 구하려니 돈이 부족했다. 보증금으로 두세달치 임대료를 납부하고, 또 월세로 적어도 이삼십 달러를 내야 했다. 게다가 그런 집들은 교통이 불편했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청강 생활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 박채호를 만나서 이런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박채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선 공사관 건물을 사용하시면 어떻습니까? ”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자 박채호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모양새가 우습기는 하지만, 요즘 조선 공사관에는 사람이 없어 귀신이 나올 지경입니다. 박정양 대감, 이완용 대감 모두 조선으로 돌아간 것은 알고 계시죠? 작년에는 시카고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조금 시끌벅쩍했지만 그것도 다 끝났습니다. 남아있는 사람은 대리 공사 이성수 대감 한 사람이라서, 제 아들놈이 날마다 공사관 빈 방 청소나 하는 형편입니다.” 조선 공사관이 모두 철수했다는 사실은 예전에 박채호에게 들었다. 박채호는 갑자기 공사관 직원들이 철수한 이유는 잘 몰랐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할 수도 있는데, 나로서도 조선공사관의 근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공사관에 유숙한다는 생각을 하자 우스웠다. 나는 역적인데, 역적이 공사관에 투숙한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우스꽝스럽다. 내 생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채호는 넉살좋게 웃으며 아들인 박용규를 불렀다. 박용규는 그의 아버지처럼 작고 통통한 체격에, 웃을 때면 눈이 없어질 듯 작아지는 사람 좋은 인상이었다. 박채호는 그가 원래는 자신의 일을 돕다가, 작년 시카고 박람회 때 통역이며 이런저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공사관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공사관 집사노릇까지 하고 있다며 웃었다. 박채호가 공사관의 빈 방 하나를 내달라고 하자 박용규가 하하 웃으며 조금 방정맞게 수다를 떨었다. “마음대로 쓰시지요. 어차피 놀고 있는 방입니다. 일층은 접견실이고, 삼층은 대리공사께서 쓰고 있으니, 이층은 비어있습니다. 이층에 방이 넷인데, 그 중 방 두 개는 제이손 박사께서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거금 이만오천 달러를 주고 산 건물인데 쓰든 안 쓰든 나가는 돈은 똑같으니까요. 음식도 나눠 먹을수록 더 맛있듯이, 집도 나눠 쓰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 모로 박용규의 말은 솔깃했다. 조선 공사관은 값비싼 주택이라서 월세를 주고 구할 수 있는 집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고, 교통도 편했다. 게다가 무료라니. 지금처럼 어려운 형편에, 가리고 어쩔 처지가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문제는 조선 때문에 그토록 심적 고통을 겪었으면서 조선 공사관에 얹혀살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조선인 서재필이 아니고, 미국인 필립 제이손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내 영혼 밑바닥에 쌓인 조선에 대한 기억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선 공사관에서 조선에 둘러쌓여 살면, 다시 날이면 날마다 민비와 청군과 백성들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지는 않을까. 순전히 내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뮤리엘이 곁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문제는 조선 공사관의 입장이다. 나는 아무튼 아직도 조선의 대역죄인이었다. 그 사이 조선의 소식을 못 듣기는 했지만, 내가 사면되었을 리가 없다. 몇 년 전, 대리공사였던 이완용을 만났을 때 그는 피차간 만나봐야 좋을 것이 없는 사이니 못 만난 것으로 하자고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사인 이성수는 조선의 역적인 나를 한 지붕 아래에 유숙시킬 수 있을까? 첫번째는 몰라도 두번째 문제는 내가 판단할 수는 없다. 조선 공사에게 답을 얻어야 한다. 나는 박용규를 통해 먼저 언질을 띄운 후 공사를 찾아갔다. 혼자 남아있는 대리공사 신분인 이성수는 내가 찾아온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워싱턴에 서재필 선생이 계시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지 석 달이 되었는데 처음 인사를 드리니 이것은 제 불찰입니다.” 나는 인사치례를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사관에서 거주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저는 조선의 중죄인 신분인데 대리공사께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 바꿔 말해서 조선의 역적인 내가 공사관에 머물러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이성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짓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상께서 저에게 아주 어려운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고, 군인을 파견받고, 기술자를 초빙하라는 어명입니다. 저는 영어도 짧고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모든 임무를 저 혼자 부여받은 입장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박용규 군과 그의 아버지가 많이 도움을 주지만, 나랏일을 함께 논의할 경륜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요.” 아마도 이성수 개인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고, 최초 미국 공사관을 만들 때 공사에게 주어진 임무일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튼 일할 사람이 예닐곱 명이나 되었으나 지금은 대리공사 한 사람이 간신히 공사관을 지키고 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임금이 실무의 어려움을 고려하며 어명을 내릴 리도 없다. 결국 이성수는 내게 공사관 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과의 인연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조선공사관만큼 좋은 조건의 신혼집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는 조선 백성이 아니고 미국 시민입니다. 게다가 저는 개인 사업자로서 병원을 운영하느라 시간이 없어, 낮 시간에 공사관의 직원처럼 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필요하거나 미국의 행정 관행을 알려드리는 정도의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이성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입니다. 서재필 선생께서는 공식적으로는 공사관의 직원이 아니고, 그러니 어딘가에 공사관 직원으로 나설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답답할 때 하소연이나 조금 들어주시고 막막할 때 방향이나 좀 이끌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왕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미국인이니 서재필 대신 제이손 박사로 호칭해주십시오.” 이성수와 대화를 마치고 몇일 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 사회니 계약서는 쓰기로 했다. 닥터 필립 제이손은 조선 공사관 2층의 방 두 개를 향후 삼 년간 사용하며, 그 댓가로 일주일에 여덟 시간 씩 업무를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말할 수도 없이 내게 유리한 계약이지만, 이성수의 입장에서도 어차피 비어있는 공사관을 빌려주면서 아쉬울 때 조력을 받을 수 있으니 만족하고 있었다. 공사관 건물은 월세 삼십 달러를 내고 빌리는 집보다 훨씬 좋았다. 그 집은 썩 좋았다. 저택이라 부를만한 석조 건물이었고, 방에는 성능 좋은 벽난로도 있어서 겨울을 보낼 걱정도 없었다. 공간 여기저기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장식물이 있어, 뮤리엘은 무료로 아시아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며 즐거워했다. 가장 어려웠던 집을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제 결혼 준비는 급진전 되었다.
18세 나이에 과거 급제(병과 3등, 최연소 합격)하였고
1885년 영어를 모르는 상태로 망명길에 올라
1892년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워싱턴대) 의대를 2등으로 졸업하고 학위와 의사 면허 획득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
178cm의 큰 키(19세기 후반 미국 남자 평균키가 173cm정도였다고 함)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서 군사 장교 교육을 수료하였고
갑신정변 때도 칼을 들고 앞장섰던 출중한 무력의 소유자로
뮤리엘이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 계기가 서재필이 밤길에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던 뮤리엘 암스트롱을 구해줬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
유색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19세기에
미국에서 명망 있는 정치가문의 여식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의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과 연애 결혼한
알파메일

첫댓글 캬 알파메일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