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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조만식은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자 서대문 감옥에 있던 이승훈의 부탁을 받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다가 2년 후에 교장으로 취임하여 9년을 재직하면서, 후진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오산에서 무보수로 일했다. 가족은 평양에 두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머리는 박박 깎고 언제나 한복 바지 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이것은 소금으로 이를 닦고 한국 재래의 팥비누(팥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가루)로 세수를 하는 그의 철저한 국산품 애용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만식은 기독교의 사랑을 교육의 모토로 삼고 모든 일을 솔선 수범하여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1인 4역을 감당했다. 교장, 교사, 사감, 그리고 사환 일까지 맡아 변소 청소도 손수하였다. 조만식의 3대 교육 이념은, 첫째 이웃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할 것, 둘째 예수를 믿어 의롭게 살 것, 셋째 학문에 힘쓸 것 등이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이 세 가지 이념을 행동에 옮겨 나갔다. 일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들도 사랑했으나 저들의 죄악은 미워했다. 그는 일본 사람을 ‘왜놈’이니 ‘쪽바리’니 하고 부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적을 사랑하면서도 그 악과 싸운 종교인이요, 민족 지도자였다. 그는 오산에 재직하는 동안에 백인제, 주기철, 한경직, 김홍일, 김억, 김소월 등 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다. 당신의 헌신을 통해 길러진 영적 인재들이 있으십니까? 딤후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수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역을 위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길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오네시모를 아십니까? 성경 : 빌레몬서 1;8-12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주어진 생명은 다시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쓰임 받으며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고 하나님께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 주간동안 이렇게 위대한 사람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초라한 한 사람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바로 오네시모라는 사람입니다.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도 아마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그는 어떤 특별한 기적의 주인공도 아닙니다. 그는 어떤 설교자도 아닙니다.그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어떤 특별한 봉사와 헌신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능력 있는 전도자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러분에게 이 사람을 소개하는 이유는 단 한번의 인생을 위하여 그가 내렸던 결단과 변화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위하여 어떤 지혜로운 결단을 내리며 살아오셨습니까. 또 어떤 결단을 내리며 살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먼저 오네시모를 말하기 전에 바울과 골로새교회의 빌레몬과 빌레몬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주후1세기의 기독교 초기에 3차레의 전도여행을 하며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사도행전 18:23에서 부터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골로새지역을 가서 어떻게 전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그러나 19:1에 보면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가서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윗 지방을 바로 골로새 지역을 포함한 기타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를 가려면 골로새지역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를 가기 전에 조그만 지역도시인 골로새지방에 들러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1:7과 빌레몬서에 의하여보면 골로새 지역에서 바울은 충성스런 일꾼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열매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한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가 탁월했던 에바브라라는 사람이며 또 한 사람은 바로 빌레몬이라는 사람입니다.빌레몬이라는 사람은 비교적으로 부유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빌레몬과 가족들은 바울의 복음에 은혜를 받고 자신의 집을 골로새교회의 개척교회로 내놓았습니다. 빌레몬서 2절에 보면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또한 교우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입니다.4-7을 보면 그가 얼마나 교우들을 사랑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초점이 되는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빌레몬의 집에 살고 있는 노예이며 종이었던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이 빌레몬의 집에서 살다가 바울이 있는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신적인 일꾼인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오네시모가 이제는 변화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으니 그를 받아주고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애정 어린 부탁의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8-9을 보십시다. “많은 담력을 가지고 마땅히 명할 수 있으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목회자인 나 바울의 입장에서 마땅히 명령할 수도 있지만 간곡히 부탁한다는 말입니다.어떤 권위를 가지고 명령과 일방적인 지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빌레몬을 대하면서 사랑의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제가 어떤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대방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나와 2시간, 3시간 같이 있다 해도 마음을 붙잡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은 어떤 명령이나 권위적인 태도로 살수 없습니다. 마치 군대 지휘관이 병사들을 명령으로 육체는 자기를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명령으로 병사들의 마음까지 자신을 사랑하거나 존경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진실한 사랑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졌던 지도력의 비결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권위보다 인격과 사랑으로 대했습니다.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간관계가 깨지는 원인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신과 비교해서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데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나와 똑같은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나, 환경이나, 학벌이나, 사회적 위치나 경력 등을 자신의 잣대로 재보고 나서 미음 깊은 곳에 이미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년 이상 인간관계를 지속하지 못합니다.처음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할 정도로 호감을 갖게 하다가 나중에는 실망을 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친구 , 가족, 직장동료, 이웃사람들을 통하여 행복을 얻기 원하십니까. 먼저 여러분 속에 비교의 계단에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든 나와 똑같은 인격을 가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말하기를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이 말은 옥중에서 믿음으로 인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육신의 아들이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믿음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네시모의 변화를 말하기 전에 몇 가지 의문점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는 오네시모는 어떤 사람이며, 왜 그토록 사랑과 인정 많은 주인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했으며, 도망했으면 자유롭게 살지 않고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왜 찾아갔는가 하는 점들입니다. 먼저 그는 노예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의 노예나 종들은 사람이라기 보다 물건 취급을 받았었습니다. 노예가 되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 중 하나입니다. 즉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어 잡혀왔거나 아니면 빚을 갚지 못하여 몸으로 대신 팔려오든지 아니면 아버지가 노예였기에 노예가 되는 경우들입니다. 어떤 경우든 종들은 재산의 일부로 취급되었으며 사람으로서의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재판관에게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체벌을 가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의 인생은 이렇게 비참했습니다. 노예로서 인생을 마쳐야하는 운명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저 일하고 먹고 자는 것뿐입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입니다. 결혼도 주인이 허락해야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이런 신분의 오네시모가 도망하여 바울을 만나 변화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오네시모는 도망하여 방황하다가 우연히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주석 성경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그렇게 설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오네시모는 우연히 바울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적으로 바울을 만났다고 확신합니다. 첫째 이유는 오네시모가 도망하였다면 문화 사회도 언어도 완전히 다른 로마까지 그토록 멀리 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로마에서는 노예의 제도가 엄격해서 잡히면 즉시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나라이며 당시에 가장 강대국으로 용맹을 떨치는 나라였습니다. 여러분의 성경 뒤에 혹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보십시오. 골로새에서 로마까지 가려면 최소한 2000㎞이상 되는 거리입니다. 교통 사정을 감안할 때 적어도 몇 달을 걸려야 갈 수 있는 거리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피해서 국경과 국경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무리 도망해도 로마까지 간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혹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하였다 해도 우연히 바울을 만나는 경우는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로마 옥중에 호송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몸입니다. 로마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무서운 감옥입니다. 비록 바울에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해도 그것은 죄수인 바울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감옥 안에서의 일입니다. 감옥으로 찾아가지 않고는 바울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잡히면 당장 죽음을 면치 못하는 오네시모가 로마의 수비대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새가 사냥꾼의 품으로 날아드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목숨이 열 개가 있어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오네시모도 감옥에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 볼 수 있지만 그가 만약 감옥에 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그의 신원을 조사해 보면 금방 탄로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유는 골로새서에 있는 바울의 편지 내용입니다. 골4:12에는 골로새교회에서 바울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온 에바브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라는 「휘몬」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골로새 교인들을 가르킵니다.그런데 이와 똑같은 단어와 내용으로 역시 오네시모를 말합니다. 4:9절을 보십시다.“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방문하러 로마로 온 에바브라와 같은 의미의 내용으로 골로새 교우들에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또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 어디에도 오네시모를 책망하거나 그가 도망했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따뜻하게 맞아 줄 것을 누누이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는 어쩌다 바울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여 로마 감옥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바울을 찾아 왔습니까. 그가 찾아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의 말씀이 그리운 영적인 갈급함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에게 돈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노예를 해방시켜 줄 권세가 있었습니까. 오네시모가 찾아 갈만한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러 수천 리를 찾아갔습니까. 바울에게는 돈도 명예도 권세도 없지만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이미 골로새에서 바울의 가르침과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집을 거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부터 오네시모의 마음에는 믿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바울의 복음은 그에게는 은혜의 복음이요 그를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무슨 죄를 범했든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죄를 용서하며 그 죄에서 해방시킨 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는 당시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현실에서 그는 바울에게 들었던 이 복음의 말씀이 그리웠을 것입니다..그는 바울에게 이 복음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적어도 몇 개의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강과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피하여 산과 사막을 넘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잡히면 죽는 도망한 노예의 신분을 숨기며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여행은 목숨을 내놓은 여행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속에 불타는 복음에 대한 그리움의 불 꽂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번뿐인 인생을 위하여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택한 것입니다. 그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잡혀서 죽어도 좋다”“십자가를 가르치는 바울선생을 만나는 것만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보잘것없이 여기는 한 노예 마음에서 일어난 기적의 역사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오네시모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사모했던 그 똑같은 복음의 말씀을 우리는 바로 이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시119:97,148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지금은 누구나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이 말씀을 쉽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을 나의 복음으로 믿는 것입니다.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가 아닌,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내 안에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오네시모는 인간적으로 바울이 그리웠기 때문에 도망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가르친 영적인 지도자인 선생인 바울이 차디찬 로마의 감옥에 있다는 소식에 그는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는 바울을 돕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 감옥에서 죽을지모른다는 생각,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그의 곁에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머나먼 로마로 출발한 것입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인간적인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포기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의리란 악세사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때로는 친구도 속이고 이웃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속입니다. 우리는 서로 아무 어려움이 없을 때, 여유가 있을 때는 의리를 말하며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리는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곤경에 처할 때 그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내 이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가슴 가득 그리움을 안고 몇 달간의 목숨을 건 필사적인 도망자로서의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로마감옥에 도착하여 그토록 꿈에도 보고 싶었던 바울을 만나 “선생님”하고 바울을 부르던 순간을 말입니다.바울이 이렇게 갑자기 오네시모가 찾아올 줄을 꿈에나 상상했겠습니까.바울도 기쁨에 눈물을 흘렸겠지만 오네시모는 더 많은 기쁨의 눈물을 적셨을 것입니다. 육체의 자유를 원했다면 그는 바울을 만나지 않고 어디론가 잠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오네시모는 말씀을 통한 진정한 영적 자유가 그리웠던 것입니다. 혹 자는 오네시모의 무모하면서도 모험적인 행동에 대하여 현실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도망한 범법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사람들 중에 가장 낮고 천했던 신분의 종이었던 그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무모한 결단에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불타는 정열이 그를 잠 못 이루게 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복음뿐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워,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 외로이 앉아 있는 영적 스승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목숨을 내걸고 골로새를 떠났다는 것입니다.저 아프리카지역의 에디오피아 간다게라는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그는 말씀이 그리워 수천리 예루살렘까지 와서 서기관들이나 갖고 있던 그 귀한 두루말이 성경을 구해서 마차를 타고 가며 읽었습니다. 독일의 루터는 로마서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롬3:24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도전을 받고 역사적인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마4:4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라고 하셨습니다.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생명을 내던질 만큼 이 복음의 말씀을 사랑하고 있습니까.지난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두고 살았습니까. 이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그 속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그 말씀을 따라 삽시다. 말씀편에서 결단하며 삽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인격적이면서 의리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
첫댓글 벧전5:5~6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 하시 되 겸손한자에게는 은혜를 주시 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 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지혜와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