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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을 만나다
추석이 되어 역귀성으로 아들놈 집에서 조상에게 문안드리고
설날도 석권이 집에서 설을 쇠다
실학의 대가요. 세계문화 유산 4인물, 유배문학의 성취를 이룬 다산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 경의선을 타고 운길산 역에 가자는 제의에 큰 놈이 여든 노인이 고생 한다며
큰 놈, 작은 놈 차로 가기로 하였다
물의 정원 두물머리
신양수대교를 지나며 마주한 두물머리엔 산수화 한 폭이 펼쳐져 있다.
그림을 배우는 이라면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완벽하다.
왼편 두물머리와 오른편 팔당 쪽 산세, 그 사이를 고즈넉하고 넉넉하게 채우는 강물.
두물머리의 끄트머리는 마치 고대에 살았을 법한 거대한 악어 같다.
백 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느릿하고 조용하게 물속으로 미끄러진다.
크고 긴 등 위에는 세월이 남긴 이끼와 수풀이 덮인 채로. 옅은 운무까지 끼어,
은빛 가루가 날리듯 수줍게 반짝였다.
다리 위라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양평 두물머리여행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되어
서울을 살지우게 한다
천년의 느티나무.
세미원에서 추사선생의 국보 세한도를 만나다
추사 선생은 수만자루의 붓을 닳아가며 추사체를 창조 하였다
제주도 유배시 제자 이상적과 아름다운 사제의 정을 나누었다
오래 동안 잊지 말고 사랑 나누자 長毋相忘
세한도는 많은 시련후에 손재형선생이 일본에서 다시 찾았으며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님이 사랑한 작품이다
세계4대인문문화인으로 다산 선생 고향 남양주에서 조선의 최고학자 다산을 만나다
강진 유배시 사의제에서
마음. 생각. 용의. 말을 이끼라는 가르침을 배웠다
조선조 말 천재 다산과 추사
복숭아뼈 닳도록 공부한 다산 (1762~1836 踝骨三穿)
붓 천 자루 털 빠지게 쓴 추사 (1786~1856 磨穿十硏)
삶에 진심과 정성을 다하는 아름다운 삶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세상에 이루어진 것은 공짜가 아닌 땀과 눈물과 피로 쓴 고난사이다 無汗不成
물의 정원 두물머리
500살 넘은 샛노란 은행나무,
물안개 자욱한 두물머리 장관을 만나다.
세미원에서 추사 선생을 만나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 서예가, 금석학자, 실학자이다.
歲寒圖
선생 추사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에게 ‘논어’를 인용해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논어 자한편)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송수천년(松壽千年)·송백불로(松栢不老)이다
송(松), 백(栢)은 사계절 잎이 지지 않으나,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푸른 절개를 변치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다.
藕船是賞(우선시상) 스승이 제자를 다정하게 부른 후, 감상하게나,
阮堂 (추사 김정희)
長毋相忘(장무상망)우리 서로 잊지 말자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인생길은 고난과 역경의 길 이지만 축복의 서곡이다
땀과 눈물과 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스승과 제자의 인간지정이 하늘을 감동 시킨다
제자 이상적인가 스승을 생각하여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여
스승 김정희에게 보냈다
국보 180호 탄생
국보 180호 '세한도'는 15m 두루마리 대작이다.
추사가 1844년 그린 그림에 청나라 명사 16명이 쓴 감상문, 오세창ㆍ정인보 등
우리 문인들의 글이 붙어 길어졌다.
그림 오른쪽 아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의 '장무상망'인이 찍혀 있다.
바람처럼 옮아간 세한도
(추사 그리다-이상적-추사에게 보이다-이상적-김병선-김준학-후지스카 린-
손재형- 이근태-손세기-손창근-박물관 안치)
추사 김정희는
정조 10년(1786)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조선 세도가 경주김씨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법적 증손주
정순왕후와는 먼 친척뻘인데 김정희의 양증조부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이다.
실학자·역사학자·금석학자·서예가·화가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7세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한문으로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다
아버지 진주목사 정재원(성리학에 정통),
어머니는 윤형의 5대손이며 윤선도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의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 윤소온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 마현(지금의 조안면 다산리)에서 태어나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이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어지던 날
정조는 이렇게 물었다.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르네상스
유네스코는 2012년에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 루소, 헤르만헤세, 드뷔시, 정약용을 선정하였다
조선시대 르네상스 정조대왕과 약관 23세 다산.
어전에서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했다
또한 실사구시 학문 "실학"을 연구하고 책을 집필하고
그리고 몸소 실학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였고, 백성의 고통을 덜기 위한 제도 개선에 힘썼다. 그는 과학과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거중기, 수표(水標) 등의 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개혁 사상은 민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는 ‘실학’의 대표 주자였다.
1784년 이승훈(매부)에 의해 천주교 전파(온 가족이 천주교를 믿음
(정약종, 정약전, 조카사위 황사영)
1793년 이벽(李檗) ·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 하면서, 순조와 정순왕후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1801년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신유박해(1801)로
첫 번째 유배길 경북 장기로 귀양 8개월
장기현에서 유배되어 있던 여덟 달 동안에도 정약용은 시와 문집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천주교 박해(신해1791, 신유 1801, 기해 1839, 병오박해 1846, 병인1866(개항요구)
두 번째 유배길 1801년 11월 23일(음력) 추운 겨울 저녁 무렵,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형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 이별을 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각 유배를 떠났다.
형 약전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발간 하였다
다산 선생이 처음 강진에 도착한 것이다
주민 모두가 서양 귀신을 믿다가 귀양 온 사람이라면 상대하지 않았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동문 밖 주막에 들러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다.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 가는 모르겠는데, 가 밉지 사람이 밉겠소.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말씀해 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선생은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1803년 주모의 적극적 권유에 의해 읍내 제자 6명
(손병조, 이학래, 황상, 황지초, 이청, 김재정)을 가르치면서 저작 활동 또한 시작하였다.
또한 선생이 거처한 방에 四宜齊란 당호를 걸고 사의제기를 썼으니 다음과 같다.
<사의제(四宜齊)는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살던 방이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의미에서 사의(四宜)에서
사의담(思宜澹 생각은 맑게 하되 더욱 맑게(몰입)
모의장(貌宜莊 용모는 엄숙히 하되 더욱 단정히 (남의 도움에 감사)
언의인(言宜認 말은 과묵하게 하되 더욱 과묵하게’(말은 생각을 담기에 조심 또 조심하라)
동의중(動宜重 행동은 중후하게 하되 더욱 무겁게’(행동을 진중, 신중하게)하라
진심 어린 마음, 단정한 용모, 마음을 읽고 감동을 주는 언어,
진중한 삶으로 삶에 생명을 얻었다
이 4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다.
義로써 고결한 절개와 지조와 기개로 大義 삶을 추구 하여라.
義로써 자기를 다스리는(愼其獨) 것이 사의재(四宜齊)이다
마땅함(宜)이란 義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義로 규제함이다.
삭풍이 몰아치던 1801년 겨울. 고향마을 어귀에서 배웅하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뒤로
하고 불원천리 먼 길 기약 없는 유배의 길에 나선 다산의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다산은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 2녀를 천연두 등의 질병으로 잃었고
2남 1녀만 살아남았다. 유배를 떠날 때 막내딸은 겨우 8살이었다
다산의 서신 자녀교육
편지를 자녀교육에 잘 활용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39~57세)를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낸
아버지로서 직접 자녀 교육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컸다.
유배지에서 다산이 자녀교육을 위해 활용한 것이 바로 편지다.
다산은 두아들(학연, 학유)과 100여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18년이 넘는 유배지에서도 자녀교육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산은 두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오직 독서만이 살 길이다’라며 책 읽기를 독려했다.
다산은 책을 읽을 때 ‘초서(抄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초서란 책에서 주요한 내용을 뽑아 옮기는 것이다.
또 다산은 둘째아들 학유에게 ‘정리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편지로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자신이 보낸 편지를 꺼내 자질구레한 내용은 제외하고 훈계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을 베껴 써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다.
편지들을 정리해 하나로 책자로 묶으면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고
불필요한 내용을 걷어내고 알맹이만 추려내는 훈련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詩聖 杜甫선생님은
‘語不驚人 雖死不休’(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 않는다.)
‘孤立無援’(학문의 길은 성실과 정진이다.)
“두시(杜詩)가 내 마음 먼저 알아서 /
네 편지 받아 보니 너도 사람 되었구나
세상 밖 강산은 이리도 고요한데 /
어지러운 속에서도 모자간(母子間)은 친하구나
의심받고 놀란 몸 병을 어찌 면하겠나 /
살림살이 가난한 것 걱정치 말고
부지런히 힘써서 남새밭 가꾸어 /
맑고 밝은 세상에 일민(逸民)이나 되어라”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인 학연, 하유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편지를 통해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 밖에 없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줄 테니
바로 '근검(勤儉)'이다.
항상 지니고 다녀라."
선비의 고결한 절개와 지조와 기개로 大義 삶을 추구 하여라.
의(義)로써 자기를 다스리는(愼其獨) 것이 사의재(四宜齊)이다
사의는(四宜) 사의담(思宜澹) 모의장(貌宜莊) 언의인(言宜認) 동의중(動宜重)
생각, 용모, 말, 행동을 아껴라
양심이 살아 있는 올바른 삶으로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毋使汝愧
학문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 모두 학혼(學魂), 예혼(藝魂)으로
얼굴에 부끄럼 없게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하여라
유배생활 7년째 되던 1807년,
그의 아내가 30년 전 혼례식 때 입었던 다홍치마와 편지를 보내왔다.
"그대와 이별한 지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
남쪽으로 내려가/ 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으나/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 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
이 애절한 그리움을..."
하피첩
아내의 다홍치마는 노을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의 빛바랜 웨딩드레스와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받아 든 다산은
고향의 처자식들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마음을 추슬렀던 같다.
그리고 3년 후 다산은 고이 간직했던 아내의 '노을빛 치마'를 잘라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간곡한 당부를 담아 4권의 서첩으로 만들어
'하피첩(霞帔帖)'이라 이름 짓고 마재마을로 보냈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 책 서문에 책을 만든 사연을 적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을 담았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기려무나.
지금은 비록 '폐족'이지만 선량하게 살아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
화평과 효심, 안목을 키우라..."
한폭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 남겨두었던 치맛자락을 꺼내 활짝 핀 매화꽃과
두 마리의 멧새가 가지 위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매조도'를 그렸다.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다.
아랫부분 여백에 세로로 길게 시를 적고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었다.
하피첩의 서문과 유사하다. 두 마리의 새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결혼한 딸과 사위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유배지에서 아버지가 빛바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써 보낸 편지와
그림을 받아본 자식들의 눈시울은 무척이나 뜨거웠을 것이다.
강진 유배 시절 정이 아내가 보내온 붉은색 비단 치마를 잘라
두 아들(학인, 학유)에게 썼던 편지를 묶어 만든‘하피첩’.
사람의 마음가짐, 베푸는 삶의 가치 등을 전하는 내용이다. 보물 제 1683-2호.
유배지에서도 자녀교육에 힘을 썼다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잘 섬겨라고 하였다
다산은 부인이 글쓰기를 좋아하는 남편(단산)을 위해 글씨쓰기 편한 다홍치마를 보내왔다
다산은 서첩 4권을 만들었고, 하피첩 가훈를 써 양주집으로 보냈다
자손들의 독서를 강조하였다
다산은 家誡(가훈) 하피첩으로 가르쳤다.
孝(孝弟慈, 깊이 생각하여 헤아린다.
아버지[父]는 의(義)롭고, 어머니[母]는 자애[慈]로우며,
형(兄)은 우애[友]하고, 동[弟]은 공손[恭]하며, 자식은 효도[孝]해야 한다),(孝弟慈)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浩然之氣).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光風霽月).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옳은 것을 추구한다.(唯是是求)
仁義 옳고, 바른 길을 가르친다(삶의 大道)
어짊이 사람의 마음이고(仁人心也)
올바름이 사람의 길이다(義人路也)
五敎이다(경천, 공경, 조화, 의로움, 책임 원리)
①하늘을 경외(敬畏)하며 살아간다는 敬天愛人 ‘경천의 원리’
②타인을 사랑하고 공경한다는 ‘사랑과 공경의 원리’
③타인과의 관계 및 조화를 잘 한다는 ‘관계 및 조화의 원리’
④덕망과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덕성과 의로움의 원리’
⑤자기에게 성실하고 타인에게 책임을 다한다는 ‘자기성실과 책임의 원리’
방례초본(邦禮草本),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아이들을 가르치려 지은 책,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삶의 장향을 가르치는 책이다
집안 아이들이 공부는 삶을 살라고 돌림자를 학자로 하였다
서형 정약현, 정약전(학초, 소실생(학무(學武), 학승(學乘), 정약종, 정약용(학인, 학유),
서자 정약횡
고난과 역경과 외로움의 유배18년 500권의 책을 지었다,
경집 232권, 문집이 260여권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에 대해서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리 유적지를 거닐다
맑은 물방울 소리들리는 수종사(水鐘寺)도 들렸다
운길산 수종사 구름 따라 가다가 지은 사찰
세종이 청아한 종소리 등고 새벽길을 걷다가 폐사찰을 발견하고
중축을 명 하여 세워진 사찰이 수종사이다
남양주 운길산, 두물머리
은행나무 세종이 심은 기념식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 물머리(양수리)
팔각오층탑 해체시 금동불 보살, 목조불 보살이 나오다
태종의 딸 정혜옹주 사리 탑
웅진전 세조가 새벽 은은한 종소리를 듣고 간 곳이 수종사의 굴이다
여기에 18나한상이 나왔다
삼정헌은 다산, 추사가 차를 즐기든 곳이다
산(운길산)과 물(두물머리)이 모인곳이 수종사이다
어진 사람은 의리에 밝고 산과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히는 것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
樂山樂水『論語』옹야편(翁也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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