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에 오든(W. H. Auden)의 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중에 나오는
“악마는 보통 평범한 모습이며 항상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잠을 자며, 우리와 함께 밥도 먹지만,
우리는 매일
하느님께 인도된다.”는 대목 때문에
몹시 충격을 받고 그만 망연자실하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종교가 탄생하기 전의 신화(神話)는 인간의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에서조차도 고통을 겪지 않으면
신이 은총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북 유럽의 신화를 보면 오딘(Odhinn)은 이미 지혜를 지닌 신이었지만
더욱 깊은 지혜를 얻으려는 열망이 끝이 없었습니다.
신들은 이둔(Idun) 여신(女神)이 보관하는 젊음의 사과를
매일 먹는 덕분에 늙지 않고 영원한 젊음을 유지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나무에 매달아 희생제물로 받아 힘을 키워왔던
지혜의 신이기도 한 오딘은
이미 세계의 모든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죽음’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날카로운 창을 꽂아 넣고
위그드라실(Yggdrasil)의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위그드라실은 거대한
물푸레나무이며
우주를 뚫고 우뚝 솟아 있어 우주수(宇宙樹)라고도 합니다.
오딘이 우주 창조 후에 심었다고 하는데,
거창하게 자라 잔가지는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Asgard)를
뒤덮었으며,
세 줄기의 거대한 뿌리가 있어, 그 중 하나는 지하의 나라
또는 안개의 나라 니플헤임(Niflheimr)으로,
또 하나는 인간세계인 미드가르드(Middangeard)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신들의 아스가르드로 뻗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툰헤임(Jötunheimr)은
거인을 뜻하는 요툰들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인간들의 살고 있다는 미드가르드(Middangeard)의 저편에
있는
얼음과 눈이 덮인 나라로 거인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미드가르드와 아스가르드 밖의 차가운
땅 요툰헤임의 거인들은
항상 신들이 만든 세계를 위협했습니다.
인간세계와 닮아서 요툰헤임에는 산과 목장도
있는데,
거인들은 그곳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기도
하고
가축을 키우기도 했다는데 이는 바이킹
족을 상징한 것 같습니다.
각 뿌리의 끝에는 샘이 하나씩 있었는데,
요툰헤임의 ‘미미르의 샘(Mímisbrunnr)’, 니플헤임의
‘흐베르겔미르(Hvergelmir)’,
아스가르드의 ‘우르드의 샘(Urðarbrunnr)’이었습니다.
그런데 니플헤임의 흐베르겔미르에서는
분노를 불태우면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비룡(飛龍) 니드호그(Nidhogg)가
이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스가르드에서 세 요정들이 끊임없이 생명수를 부어주기 때문에
위그드라실은 니드호그의 독기(毒氣)에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다가 오든이 번역한 <하바말(The Hávamál)>
중에
나오는 구절을 보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갈비뼈를 좌우로 관통한 창이 나뭇가지에 걸쳐졌다.
그렇게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아흐레 동안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 동안 그는 죽음 저편을 바라보았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이 그렇게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머물면서 그는 옛날에 죽은 존재들도 만났다.
아흐레 밤낮이 완전히 지나고 나서야
그는 죽은 듯한 모습으로 나무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되살아났다.
아무리 현명한 자라도 이 십자가 나무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으며,
아무도 술잔으로 나의 혀를 적셔 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울부짖으며 룬(runes) 문자를 배운
다음,
이윽고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후 아흐레
만에 다시 살아났다.”
놀랍게도 종교가 없던 바이킹 시대(793-1066)에 쓰여졌다고 하는
이 신화에 예수님과 같은 수난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오딘은 아흐레 밤의 고행(苦行) 끝에 룬(runes) 문자를
터득했다고 합니다.
신비로운 마법의 문자는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찌르고
말았던 오딘의 창처럼
어떤 모순적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라는 ‘십자가’가 종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화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성찰과 회개는 내면 깊은 곳을 파헤쳐야만
하기 때문에
‘죽기보다도 더 싫어하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내면 깊은 곳을
파헤치지 않으려고 할뿐더러
파헤치고 나서도 자기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합리화만 하려고 합니다.
‘말씀’은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실천하기는 더욱더 어려워 계속하여 죄만
짓게 되지만
‘죽음’을 통하여 회개하게 되는 우리 인간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진리를 실천하고 살았다면 즉 사랑을 실천하고
살았다면
성령을 받아 기쁘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딘의 창은 자신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날카롭게 자신의 살을 파고 들었습니다.
오딘처럼 자신을 찌르지는 않았지만
프로이트(Sigmund Freud) 역시 자기 자신을 파헤쳤습니다.
그의 정신분석의 대부분의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만성병(慢性病) 환자였던 프로이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좀처럼 드러내기 어려운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보는 일은
바람 부는 숲에서 홀로 목매달려 있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였던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에 의하면
내면 깊은 곳은 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내면이란 드러내고 싶다고 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환상(幻想)으로 내면을 덮어두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뼈와 장기(臟器)와 같은 내면을
살[肉]이라는 연약한 덮개로 덮어두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것처럼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내면 깊은 곳을 파헤치고 보면 바로 환상이라는 살이
뼈와 장기(臟器)를 덮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악마라는
것과
다윗 왕이나 노아 예언자도 악한 면이
있었고
모든 성인(聖人)들도 추악한 과거를 갖고 있었으며
‘선하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인간이 살을 도려내 버린 후에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것처럼,
환상을 도려내 버린 후에는 견딜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만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절한 자기 성찰을 거친 후 자기를 죽이고 난 다음의 허무는
이처럼 감당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환상이 눈을 가리고 있는 한 진실에
도달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이란 아무에게나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본다고 해서 어떤 힘을 얻는다거나
지혜를 얻게 된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보고 난 후에 남는 것은
후회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이 회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때문에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소녀 도로시가
별다른 즐거움도 꿈도 없는 캔자스의 시골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랐듯이
나는 그 동안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바닷가에 있는 오두막에서
명상만 하고 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은 다음과 같이 계속됩니다.
“연인처럼
보였던 악마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말다툼은 끊임이 없었으며
우리의 눈에는 싸우는 두 사람 모두 패배자였다.
이제 그는 깨어나서 꿈속이 아니면
아무도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악몽은 인간은 벌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엄청난 폭풍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만날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당신의 품에서
사뿐히 내려놓으시고는 떠나가버리셨다.
그는 좁은 발코니에 서서
어릴 때처럼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모든
별들이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고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옛날과 같은
감동은 없었다.
이제 산들의 고요함처럼
‘나타나엘은
이기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였다.’는 말씀이
내려 왔다.
그는 다시 태어나서 기뻐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외쳤다.
‘하느님께서는
빵처럼 쪼개어지셨다. 우리 모두 빵 조각들이다.’
그런 다음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자서전을 써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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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Hávamál(sayings
of the high one)’은 ‘높으신 분의 말씀’이란 뜻으로
바이킹
시대의 고대 노르드어(Norse) 시집(詩集)인
『에다(Edda)』에 들어 있는 시 중 한편입니다.
여러 짧은 시들이 모여서 이 시 한편을 구성하고 있으며,
삶과 지혜에 대한 금언적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지혜서’를
솔로몬이 썼다고 하는 것처럼,
‘하바말’의
시들은 북 유럽 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전쟁과 예술과 문화와 죽음을 관장하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신(神)
오딘(Odhinn)이 한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스스로 자기를 죽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면에서
마치 예수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좋은 글로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