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창작 강의 / 박정규 (시인)
시론 10. / 시의 언어 다루는 방안 20세기 ‘숨은 철학자의 왕’이라는 ‘하이데거’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사람. 오늘은 그 의미에 대한 분석을 조금만 해보려고 한다. 시는 언어와의 사랑이라고도,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 그런데 지금 마우스에 왜 손 올려놓았지? 멈추시라! 무슨 재미없는 철학 강론이냐고, 시큰둥해 하는 것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철학 강론하고는 상관없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갖게 된 인식을 형상화해내서 시로 표현해보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언어 없이는 ‘그 대상과 존재’를 지칭(형상화)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위의 내용을 말한 건데 왜 그렇게 금방 싫증을 내고 그러시는지. (뭘 또 생각하고 있담? 내가 그렇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 될 텐데.) 시 창작이란 아직 이름을 부여 받지 못한 사물을 관찰하는 동안 발생한 내면의 인식에게 이름을 주어서 이를 존재로 형상화시키는 일이다. 그 사물에게 이름을 주기 위한 가장 알맞은 언어를 찾는 일이다. 아름답고 합당한 자리에, 그 말이 아니면 안 될, 그런 언어를 찾아 헤매는 고단한 행위라는 것도 납득했는지. 시를 쓰면서 이런 치열함이 없이 막연히 떠오른 상념을 글자로 끼적거려 놓을 수가 있다. 혹자는 그것을 관념시라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뭐냐고? 잘 들어두시라. 바로 구체성 획득의 실패! 이 글을 쓰는 동안은 아마 계속해서 구체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詩든 소설이든 써서 내보인 다음에는 그 작품에 문학적 가치를 부여 받아야 한다. 타인에게서든, 자신에게서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읽는 이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는 내용에 구체성이 확보돼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꼭 명심하고 있기 바란다. 자기가 써놓은 글을 나중에 다시 읽는다고 해보자. 그런데 읽다가보니 자기가 쓴 글을 자기도 이해 못하고, 무슨 의미로 썼는지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허위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것도 격이 낮은. 이 말이 꼭 야유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아예 터놓고 분명하게 말하라고? 정말 그래도 될까? 내 말에 다른 뜻은 없다. 이제 좀 노력해서 제대로 써보자는 뜻 외에는. 다시 말해서 낙서든 뭐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집중해서 좀 많이 읽으라는 말이다. 솔직히 한 달에 몇 권 읽으시는가? 이들을 읽다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으면 직접 묻기도 하시라. 성의껏 알려드리리. 오늘 여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