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가 나라를 지탱하는 중국과 맺은 국제항공협약 때문인지 우리의 항공기는 중국대륙을 횡단하는 직선로가 아닌 남쪽의 제주도를 지나고 홍콩과 다카를 우회하여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향한다.
해협에서 준비한 항공편은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해 세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의외로 지루하고 고달프나 호기심이 유별난 나에게는 딱 어울리는 신나는 여정.
다행히 내 좌석은 기창쪽이라 오랫만에 느긋한 항공촬영과 조망을 맘껏 할 수 있는 기회.
150mm와 300mm 망원줌랜즈도 갖춘 여행용 PEN2 카메라에다 대용량의 메모리가 빵빵하게 있으니 이번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 준비가 잘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해안 해변을 낀 섬 위로 날던 비행기는 한눈 판 사이 눈에 익은 제주도 위를 야속하게 금방 지나쳐 이번에도 한라산 분화구 촬영 기회를 놓치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기내식이 의외로 빨리 나왔다. 해외여행 때마다 공짜술에 맛들인 나는 기내식으로 비프스테이크, 반주로 레드와인을 두잔이나 시켰다.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인 특성이 고질화 되어 있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어글리코리안. ^^
푸른 바다를 지나는데 구름 아래로 언뜻 대도시가 보이는 대륙이 보인다. 아니 대만이라는 큰 섬이 나타난다.
잠시 후 우리가 내린 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글로벌 홍콩공항. 여기서는 장장 5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행사를 총괄하는 남팀장의 인도 아래 우리는 대합실 한켠에서 생활체조를 익힌 여단원의 시범을 따라 율동체조를 마친 뒤 각 팀별로 모여 봉사활동에 대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먼저 무데에 있는 산골마을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쾌적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횡설수설..."
내가 속한 시설지원팀장인 박센터장(구미)의 연설문같은 묘한 발언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원..."
옆에 있던 조국장(김포)이 답답하다는 듯 불평을 늘어 놓는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인데, 저는 센터장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당최... 화장실 공사를 한다면 먼저 인부, 자재, 공사내역 등에 관한 말씀을 하셔야 하는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 없이 이상한 말씀만 하시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선 나를 뻔히 바라보던 60대 초반 박센터장이 대답했다.
"화장실은 이미 건축되어 있으니 우리는 거기다 페인트칠과 준비한 그림만 그리면 됩니다."
사전 참가자 워크샵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일 것이지만, 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나와 조국장은 황당할 수 밖에.
불만스런 이 내용을 페이스페인팅 담당인 20대 여단원에게 전하니 -대책없는 사람-이란 나만 모르는 인물평.
이제 남은 건 시간.
우리들은 무리를 이루며 하릴없이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대합실 쇼파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지루하면 왼갖 물건들이 쌓여있는 공항 면세점에서 아이쇼핑도 하고, 내공이 엿보이는 윤씨와 함께 흡연구역에서 담배도 피우며 무료한 시간을 소일도 하고...
자상하면서도 유머로 가득한 윤씨를 계속 따라다니는 안경낀 곱상한 중학생(2학년)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니 의외로 군인이 되는 게 장래 희망이란다. 그 이유는 할머니를 따라 세계여행을 여러번 했다는 심플한 아이답게 -멋 있어서-였다.
오후 7시에 케세이퍼시픽 항공기에 탑승한 우리는 또 다시 기내식을 제공 받았다. 이번 메뉴는 선택이 잘못된 생선요리에다 반주로 화이트와인 두잔. 호기심 많은 두 중학생들이 좌석에서 시청하고 있는 영화는 World war2.
어둠을 뚫고 동남아 상공을 한참 날던 비행기는 세계최고 인구밀도를 말해주듯 빈 땅에 없을 정도로 수많은 민가 불빛이 아스라히 보이는 방글라데시 수도 Dhaka에 11시에 도착하여 Dragon Air로 갈아탄 우리들은 기내에서 또 다시 1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육중한 체격의 비디오카메라맨은 여전히 촬영에 열중한다.
Hazrat Shanjalal international Airport라는 영문, 그 아랍식 발음, 그와 동일할 라면같은 아라빅 네온글씨만 기창 밖으로 선명히 보이는 다카공항은 깊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아열대지방인 방글라데시 한 밤 좌석 모니터에 표시된 외부온도는 27도.
여러번의 이동탑승과 긴 대기시간으로 인하여 피로에 지친 우리들이 마침내 카트만두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주간에는 네팔여행자들을 위해 특별히 히말라야 상공 선회비행을 해 준다는데, 야간이라 만년설이 쌓여있는 신비로운 히말라야 산맥을 상공에서 못 본 게 너무나 아쉽다.
카트만두국제공항, Welcome to Nepal!
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종교적 미신을 타파한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붓다의 탄생지이자 주요 활동영역이었던 네팔인만큼 공항엔 싯다르타 붓다의 일대기를 상징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선망의 대상인 천혜의 자연경관에 비하여 너무나 가난한 최후진국 네팔의 적나라한 모습은 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기마저 끊겨있는 공항입국장의 일부시설과 공항직원의 서비스 또한 허름하고 빈한하기 짝이 없어 해외에서 몰려든 수 많은 여행객들은 여유작작 태평한 직원들의 느림보 업무와 비상식적 일처리에 대책없이 노출되고 있었다.
제각각 큰 짐가방을 들고 길게 늘어선 우리 줄에, 옆줄에 서 있던 인도인들이 시스템 문제로 인해 우리 줄 앞에서 입국수속을 하게 되자 졸지에 인원 수가 두배로 늘어나게 되어 안 그래도 피곤에 지친 우리 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어찌어찌하여 세월아 네월아 검색대를 겨우 통과하고 나온 우리들 앞에는 해외봉사 일정에 타격을 줄 정도의 심각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화물에 들어 있는 수 많은 박스로 포장된 의약품 통관문제가 바로 그것.
단장스님과 실무진들은 주간도 아닌 꼭두새벽이라 영사관에게 연락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시간대라 비상이 걸려 우왕좌왕한다. 여러번 화물을 옮긴데다 부실한 포장때문에 하필이면 박스가 터져 그 의약품이 공항직원의 눈에 띤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두어번의 해외봉사경험이 있는 단장스님은 급한 마음에 영사관과 포교단에 연락하다가 잘 안풀려 이곳 출신 실무진인 우스님에게 그 화풀이를 하고... 그 모양새가 맘에 안들어 불만이 최고조에 이른 Young 실무진... 이곳 실정에 밝은 우스님에게 조용히 맡기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을 괜히 과도한 행동을 취하여 일을 크게 만든다며 연신 불평....
"해외의료봉사 한두번 하십니까, 스님? 눈 딱 감고 5,000달라 쥐어줍시다 마..."
경험이 많은 60대 초반 박의사님 나섰다. 5,000달러면 우리돈 500여만원이 넘는, 네팔로 치면 거액! 단장스님은 어떻게든 돈을 안쓰고 해결할 방도를 찾으려 애쓰신다.
검사가 쉽지 않은 의약품은 특별한 경우 외엔 해외통관이 어렵다는 걸 잘 알지만, 행사개요가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의료봉사라는 타이틀이 붙은 국제친선 의료봉사인데 이렇게 법과 원칙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공항직원의 입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 현실일 것이다.
듣자하니 가난한 나라에 해외의료봉사를 갈 때마다 이런 불행한 경우를 당한다는데, -의료봉사는 당신들이 원해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여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한다는 각국 공항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한 현실.
결국 중요한 의약품(처방전) 십여박스는 통관을 못했다.
새벽인데다 다들 피곤하니 내일 이른 아침에 행동개시하기로 하고 우리는 화물차와 승합차에다 많은 짐들을 옮겨 실은 후 공항 인근 보다나트지역 숙소인 5층규모의 Ti-se Guest House에 도착하여 침대가 2개 있는 4층방을 배정받은 후 여장을 풀었다.
나와 룸메이트가 된 분은 해외봉사 경험이 많은 모복지관에서 근무하는 말이 없는 50대 초반 조국장.
카메라와 핸드폰 밧데리 충전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사전에 설명을 들은 내용이긴하나, 접지선이 포함된 3구형 220v 콘센트에 꽂은 전원플러그가 작동이 안돼 프론트로 내려가서 사용법을 확인 후 다시 올라와 상단 구멍(접지선)에 볼펜을 끼운 후 플러그를 꽂으니 그제사 작동이 된다.
참 웃기는 나라라며 서로 마주보며 낄낄대고 웃다가 피곤에 지친 우리들은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샤워를 하자마자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첫댓글 태산님 모습은 처음입니다.
건강해보여 다행입니다_()_
종교적 미신타파를 외치셨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 용어를 태사산님께 배웠습니다_()_
나중에 그 약을 찾았을까???
전부 다 멋지신 님들로부터 배운 어깨공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