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의 평전 (외 1편) 이봄희 묵은 펄펄 끓는 것으로 살고 차갑게 식으면서 죽는다 어디에 부어지든 그곳이 관이다 관의 형상으로 굳으므로 그에게 생전의 모습이란 없다 단 하나의 뼈도 없으면서 야들야들 골격을 유지한다 한때 앙금의 힘으로 버텨야 하는 푸석한 날들이 있었다면 가파른 여름의 끝에서 끈덕지게 달여야 미끈하던 응어리 엄지손가락이 푸른 물로 고여든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끼니가 있을까 이처럼 힘없는 낭패가 있을까 작물의 대궁들이 허리까지 숨기면 못 박인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풋 여문 알들, 우리들의 공복은 진하게 무르익을 때를 기다린다 구부러지고 늙은 뼈를 화장한 뒤 묵 한 사발 시켜 놓고 컬컬한 울음의 뒤끝을 꿀꺽꿀꺽 삼킨다 죽은 목숨이든 산목숨이든 젓가락 사이에서 묵은 생물이다 누군가의 관을 들 때 묵을 집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따라 열매에서 가루가 되고 가루는 팔팔 끓어 넘치다가 다시 하얀 사발에 담겨 굳어 가는 저 한결같은 묵만 같아라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봄, 막무가내로 뚫고 나오는 것들 정말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어디 눈 똑똑히 뜨고 보고 말 거야, 겨울의 은닉술들이 예상치 않은 보도블록 틈에서, 나뭇가지 끝에서, 양지에서 허락도 없이, 선전포고도 없이 막 나오겠다 이거지
생의 고수들 앞에서 하수에게나 통할 감언이설로 구구절절 허투루 야멸찬 앞날을 논하겠다 이거지 두고 보자는 말 무섭지 않지 어디로 갈지, 말도 않고 제풀에 자취를 끊고 꽁무니 뺄 것 다 아는데 뾰족한 수도 없이 고작 따뜻한 햇살 하나 믿고 대책 없이 밀고 나오는 봄의 앞잡이들 그 최후의 순간을 아는지 몰라 과신은 때로 낭패의 원인이기도 하지 무지하게 변덕 심한 햇살이 열백 번 쨍쨍해도 발등 한번 안 찍히는 저 꿋꿋한 혈기와 두둑한 배짱 왠지 그것들에게 코를 얻어맞거나 멱살을 잡히고 싶은 날이지 어이없이 멍하니 감탄만 할 뿐인 봄날의 현란한 시비 같은 거지 ―시집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2023. 8 ---------------------- 이봄희 / 본명 이온정. 1953년 강원도 예미 출생.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전태일문학상, 5.18문학상 신인상 등 당선. 2023년 시집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