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
나는 중고교 학부형 모임에 강의를 다니고 있었는데 강의료는 거의 없어 봉사 수준이었지만 학교나 교사들 군대강의도 물론
중요했으나 어머니 강의가 무엇보다 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성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사고가 굳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직 덜 굳은 청소년들에게 아니 그 어머니들에게 더 늦기전에 내가 해야할 말들이 있어서였다.
나는 여성학자 오숙희의 말을 잘 인용한다. '우리나라 남편들을 망친 것은 그 어머니들이다' 라고. 사람은 받아 버릇하면 늘 받기만을 원하면서 베풀지를 못하는데 특히 아들을 둔 어머니들 지금 어떻게 아들들을 기르고 있나. 하나부터 열까지 방청소부터 그 모든 것을 애는 손하나 까딱 못하게 하고 어머니가 다 해주며 받들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세살버릇을 여든까지 들여놓으니 장가간 후에 어떻게 하느냐. 맞벌이를 해도 모든 것은 여자에게만 맡긴다. 나는 남자입네 하는 오만함만 가지고. 물론 덜한 남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아들들은 나중에 마누라에게 이혼 당하기 쉽다. 아들이 며느리한테 안쫒겨나게하려면 교육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어떤 무식한 엄마들은 '내가 어떻게 아들을 키웠는데'라며 아들을 감싸고 드는데 딸들도 똑같이 귀하게 카워졌다는 건 생각을 못하는가 보다.
나의 이런 이론은 나의 시어머니를 보며 느낀 것이다. 아들을 장가보내 놓고도 그 분의 평생 온종일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아들뿐. 며느리가 아들에게 어떻게 잘 써비스하고 받들고 섬기는가를 감시하는 것뿐. 남들은 나를 열부라며 칭송하고 있었지만 내가 아무리 잘한다해도 이것은 내 성의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의지로 여겨지는 것 같아 신이 나지 않았다. 내가 내 딸들을 돌보고 있는 것에도 그녀는 낯빛이 좋치 않았다. 내가 퇴근하며 아이들을 위해 작은 과자를 사와 먹이는 것에도 눈쌀을 찌푸리며 '가시나들에게 무슨..'하는 표정이셨다. 한번은 당시 과자중 가장 싼 편인 라면땅(라면을 잘게 부순 것)두개를 사와 먹이고 있는데 들어오셔서 '에비도 쫌 줘라'하며 쏘아보셨다. 이건 애들 과잔데요.. 하고 싶어도 그걸 감히 말로 하진 못했다. 시모님에겐 항상 공손하게 복종해야 했으므로. 그럴 때 남편은 옆에 있어도 '난 괜찮아요 애들 주세요'같은 말은 절대 안하고 그런 경우 그저 만족스런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가정들은 아들을 선호하는 집일 수록 아들들은 나중에 별로가 되고 대신 딸들은 모두 생활력 강한 성공한 사회인이 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학과 직장은 들어가기 엄청 힘든 관문이라 이를 악물지 않으면 통과되기 힘든 곳인데 그래서 악착같지 않은 사람들은 떨어지게 되어있다. 나는 이 집에서 아들을 못 낳아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딸들만 낳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애가 아들이었다면 할머니와 아빠가 금지옥엽 애지중지 극진히 아껴 지금 애는 반 멍청이가 돼 있었을 것 아닌가.
이 집의 3남3녀중 딸들은 모두 성공해 있고 아들 둘은 고졸로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의 남편하나만 대졸인 것은 위의 두누나들의 등쌀때문이다. 이집을 살리려면 너 하나라도 대학을 나와 성공해야 한다 라고 다그쳐서. 집안 형편이 좋치 않아 딸들은 모두 자력으로 직장을 잡아 야간대학을 나오거나 하여 그후 모두 미국으로 가서 학과장 교수, 대학 서무과장 그리고 막내딸은 목사님이 되어있다. 미국가기 전까지 내가 데리고 있던 시누이라 정이들어 친한데 한국을 떠날 때 까지도 멀쩡하던 그녀가 미국 가더니 예수쟁이가 되어버려.. 그녀는 한국에 다니러 나올 때나 내가 미국방문할 때마다 어찌나 내게 극성으로 전도를 하던지.
등록금을 대 줄테니 대학을 가라해서 다행히 그들이 원하는 좋은 대학에 붙었지만 누나들은 동생이 원하는 농대로 가면 등록금은 못 대준다 으름장을 놓으며 정치과를 나와 정치인 벼슬로 출세하라해서 할 수없이.. 그러나 결국은 그의 소원대로 농장을 하게 된다. 누님들은 한국에 없었으니.
대학때 그를 만나 교정이나 다방에서 얘기를 나누던 때를 나는 잊지 못한다. 하이데카 카프카 칸트 헤겔.. 그의 대화는 종횡무진 다른 남자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매우 수준이 높고 지적이라 행복했다. 그런데 결혼 후엔 그런 대화들은 쑥 들어가버려 내가 왜 이젠 옛날같은 그런 대화는 안하느냐 했더니 '연애할 때와 같나, 누가 잡은 고기한테 미끼를 또 준다카대'라 하여 깜짝 놀랐다. 나는 충격을 받아 '아아 속았다! 결혼을 잘못했구나' 싶었다. 내가 그에게 원한 것은 단하나 결혼 후에도 언제까지나 연애하듯 싱싱하게 사는 것이었는데.
큰형님은 부산에서 큰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장이 마음에 들어해 그를 사위로 삼고 부사장으로 앉히려 햐였다. 그러나 그건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데릴사위격으로 굽혀 지내야 하여 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해 평생 그를 섬길 것 같은 말단의 예쁜 여경리사원을 데리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마음에 드는 직장을 가질 수 없었으니. 어떤 자리가 나면 내가 어찌 그런 자리에 가랴 하며 불쾌해 하기만 하고. 평생 그러면서 안방에 버티고만 앉아 있었다. 그 경리사원은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들떠 있었는데.. 날 보고는 '내가 부두 노동자나 하다못해 날품팔이에게 갔다해도 이보다는 낳았을 것을'하며 울먹였다. 한번 말년에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들어가 보시라 했다가 자기를 어찌보느냐고 남편에게 엄청 혼났다 한다.
그렇게 불쌍한 나의 동서는 평생 여기저기 일을 다니며 쌀되값이라도 벌어 와서 가족들이 그래도 굶지않고 버텨왔다고. 그 처음회사는 나중에 더 커져서 지금은 전국에서도 이름을 말하면 모두 금방 아는 유명한 재벌회사가 돼 있는데. 큰집 아들들이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가 그 회사에 있었다면 우리집안은 내내 풍족하고 행복했을 거라며 아쉬워한다. (그랬다면 더욱 고급 룸펜이 돼 있지 않았을까)
큰집엔 아들2 딸2이 있는데 그 역시 아들들은 고졸이고 딸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 사회적으로 성공해 있다. 두아들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지냈는데 제대후에 직장을 잡으려 노력해야 할 때도 우리집에 와서 삼국지5권이나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다룬 대망(大望)20권 짜리 대하소설등을 우리는 틈을 낼 수 없어 감히 시작도 못하며 일하고 있는데 그애들은 편안히 읽으며 뒹굴면서 지내고 있었다. 큰조카도 그렇게 오는데 어떨 땐 비슷한 친구까지 데려와 한달 쯤 놀다간다. 남편이 정말 조카들을 사랑한다면 띠끔하게 정신교육을 시키고 인도했을 건만 이 집안에서 남자애들 사랑방법은 그저 무조건 잘해주는 거라 나는 감히 간섭할 수가 없었다. 시동생 아들 2도 우리집에 와서 지내곤 했는데 꼭 마찬가지로 고졸로 지금은 그냥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대학 학벌주의면서 고졸을 폄하하는 것 같지만 중졸 무졸이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 나는 그를 존중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를 못나와도 밝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게 사회는 그를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뒤틀리고 반항적인 인간으로 변해 간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이 원만하고 행복한 부부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동서들이 다 대졸인데 자신만 아니라면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자신의 외모가 남보다 열등할 때 또는 친정이 가난한 집일 때 그가 느끼 스트레스는...?
학교를 못나오면 열등감에, 좋은 대학을 나오면 오만함에.. 모든 것이 횡이 아니라 상하 서열로 매김되어 진다.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엔 서양 어느나라들 보다 뚱뚱한 사람이 왠일인지 특히 여자들이 많은 걸 본다. 그런 상황이 놀라운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즐기는 모습에 나는 놀란다. 나는 미국의 힘은 그런 평등성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나라엔 그 정도 뚱뚱한 사람들도 없지만 조금만 비만하면 사람들이 옆에서 끊임없이 살 좀 빼라느니 그만 먹어라느니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느냐 하며 놀린다. 왜 우리나라 여자들이 세계제일의 성형대국인가 왜 살을 빼려 결사적인가.
나는 왜 우리나라는 모든 면에서 남보다 높이 올라가려 발버둥치는가 왜 차별적인가 생각해 봤는데 그것은 우리는 무엇이든 성취해 내려하고 남보다 우월하려 힘쓴다는데 있는 것 같다. 다 같이 잘되려는 우리 민족 본유의 홍익정신은 많이 훼손되어..
내가 시집왔을 때 작은 조카는 고등학생으로 별로 공부하는 모습이 안보여 내가 웃으며 왜 공부는 안하냐 했더니 '공부를 너무 잘하면 애들에게 미움받아요. 그저 10등에서 20등 사이만 유지하는 게 젤 적당하죠' 한다. 머리는 좋은 집안이라 공부안해도 그정도는 되는 모양이라 생각했는데 동서말로 보면 그애는 반에서 중간이하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어찌어찌 장가를 갔는데 그 작은 조카가 우리집에 와서 자랑스레 하는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 처는 밥상을 들고 들어와 공손히 자기앞에 놓고 옆에 꿇어앉아 있으면 자기는 반찬이 짜다 싱겁다 잔소리를 해가며 먹는다고. 내가 같이 먹지 않느냐 했더니 처는 자기가 다 먹고나면 그제서야 남은 밥상에서 먹는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옷차림도 절대 반바지 같은 건 못입게 하고 집에서도 무릎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만을 입어야 한다고 으시댄다. 나는 너무나 놀라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보수성은 세대가 바뀌면 개선될 줄 알았는데 더욱 후퇴했단 말인가?그 보수성은 후천성이 아니라 DNA의 유전성이란 말인가?
오늘은 남편댁 흉보는 편이라 부끄럽지만 우리나라의 옛 보수주의가 가족들에게 미친 영향 특히 여성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나 를 분석 보고하는 교육학적인(?) 의도임을 이해하고 참고해 주기 바란다. 내 시댁 집안 일이니 잘 알지 남의 집 사정이야 어찌 잘 알겠는가.
내 친정집도 마찬가지 현상이었으니 아버지가 감옥가신 후 나의 언니는 빈손으로 도미하여 헤쳐나가 은행 창구의 텔러로 시작해서 7년만에 미국의 한 은행장으로 우뚝 섰는데 비해 내 한살아래 장남인 동생은 고졸후에 슬슬 놀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죽도록 맞으며 고생한 후 제대하여 특별히 배운 기술이 없으니 택시운전수로 지내다 그럭저럭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현대식 교육을 받고 겉으론 민주적 남녀평등을 주장하셨지만 워낙 보수물에 젖은 옛날 분이시라 장남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각별한 애정으로 동생은 속이 너무 여려터져 있었고 경제적 자립성이 부족해 그 품성과 생활방식은 지금껏 안 변한 채 살고있다.
자고로 우리나라엔 장남을 집안의 신주단지처럼 모셔 대개 차남들이 더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 제사답이라며 부동산을 모두 장남에게만 상속하는 제도때문에 장남은 안일해지고 차남부터는 분발해 일어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형만한 동생없다고 대체로 형은 점잖고 의젓해 속세의 지저분한 경쟁에선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기 쉽다. 대개 점잖음과 경제력은 반비례하니까.
나의 남편은 실질적인 장남노릇을 했어도 어쨋든 차남이었지만 나의 아버지도 차남이셨다. 일제시대 때 이를 악물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 난방장치라곤 없어 잉크도 꽁꽁 어는 다다미 2층방에서 견디며 새벽이면 얇은 옷만 입고 나가 우유배달을 하시며 대학에 다니는 글자 그대로 고학(苦學)을 하셨다. 그 와중에서도 독립운동을 하여 구속되곤 하다가 결국 학교에서까지 퇴학을 당하고 국내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계속 하신다.
그 후 이승만정부의 후예들은 그런 애국자들을 치하하기는 커녕 빨갱이라며 다시 옥에 가두었고. 지금이라고 그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까? 그런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셨던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나중에 내가 그 고통스런 순간들을 어찌 견뎌 내셨나 한번 여쭤봤더니 '우리나라가 어떤 민족이냐, 특별한 천손민족이니라' 라는 짧은 말로 답하셨다.
수십년이 지나 그 대학은 아버지에게 명예졸업장을 보내왔다. 그 시절엔 대학가는 사람이 적어선지 대학 중퇴자라도 대학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나보다. 요새는 학력 인플레이션이라 박사학위없으면 이력서 명함도 못내는데.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당시 부산대 윤인구(尹仁求)총장은 독립운동하던 집안출신이었는데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추천과 압력으로 아버지는 특별채용되신 것으로 안다. 친일파 후손들만 채용하지말고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아버지같은 이를 교단에 서게 하라고. 당시 그런 계통의 목소리도 어떤 졸업장의 형식보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으리라.
나는 그래서 그 대학은 일본에서라도 꽤 양심이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괜찮은 점수를 주고 있다. 대학이란 아무리 자체적 목소리가 있다해도 이나라나 저나라나 정권의 감시를 벗어나긴 어려운 법이니. 사립인 와세다(早稻田) 대학이라고 당시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 대학엘 가고 친일파 귀족들은 東京 제국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마치 국내의 京城제국대학처럼.
서울대 출신들이 대부분 정계를 주름잡아오며 온갖 독재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뿌리는 거기에 있는 것같다.
나는 그래서 서울대학을 없애야한다는 주장에 크게 동의한다. 도올이 한번 그 주장을 했다가 서울대 출신들이 '자기가 서울대를 못가 놓으니 열등감에서 하는 소리다'하며 벌떼처럼 반박들을 하여 나는 과연 그 대학출신다운 이기적인 속좁은 소리들만 하는구나 싶었다. 한국은 그 대학출신들이 다 망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도올처럼 유명인사가 아니라 그래봤자 아무도 귀기울이지도 않겠지만.
우리나라 여자들이 미국으로 많이 가는 이유는 야망은 큰데 현실의 벽에 막혀 발버둥치다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을 찾아 떠나가기 때문으로 본다. 나의 시댁이나 친정 모두 여자들이 도미한것은 (나만 빼놓고) 그 성공하고 일어서려는 야망 때문이다. 나는 야망도 별로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침략적 제국주의 나라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가 그렇게 인식하기 전부터 왜그런지 모르지만 한국이란 땅엔 거대한 자석이 있어 나를 꽉 붙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내가 보기에 미국으로 가는 여자들은 그 자본주의의 물질환상에만 젖어 있고(그래서 실지로 모두 富도 이루었지만) 한국의 역사에는 무관심한 것 같았다. 한국의 분단에 미국이 절대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의식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북의 남침이란 것만 있었고 미국은 우리를 지켜준 고마운 존재라는 것 뿐. 그 의식은 너무나 견고해 내가 몇번 바꿔주려 시도해 봤지만 내 사상을 의심받을 뿐 입김도 안들어가 포기해 버렸다. 괜히 의만 상할 것 같아서.
시댁 성토를 한다는 것이 그만 삼천포로 빠져 버려 글의 길이만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보호를 덜 받고 고생할 수록 강해지는 우주의 원리.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민족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힘든 고난을 주셨다고 믿는다. 편하고 안락하게만 살아왔다면 앞으로 우리 한민족이 어찌 이 세상의 맏으로서 복분해 나가겠는가.
첫댓글 국제 자본가들이 한반도 운명을 어떻게 설계해 놓앗을까?
뻔하지요, 지구상에서 한민족을 사라지게 할 계획.
그러나 그 계획은 오히려 자신들이 사라지게 될
운명으로 가고 있습니다.
@산비탈양 좋은 글 늘 감사히 잘보고 잇읍니다요....
100% 공감가는 글
잘 보았습니다.
몸소 겪은 값진 삶의 경험을 밑거름으로
대한의 정신사상적,
생활 밀착형 대모님이 되어주세요..
그냥 주저리 주저리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끝까지 다 읽어
보셨군요.
죄송하고 또 고마울 뿐입니다.
좋은 글이네요...
제가 어린 학창시절,
국어나 수학이나 이런 것은 우수했으나...
영어는 성적이 떨어졌어요...
모친께서 "왜 영어공부를 하지 않느냐 하시길래"
제국주의 언어라서 싫다고 했죠...
그 어린 시절에 이미 그런 사상으로 깨어
있으셨다니 놀랍습니다.
우리 동녁의 동이족이십니다.
저의 시댁에도 엇비슷 하네요
형제만 다섯인데 그중 셋째가 남편이고
다른 형제들은 모두 서울대를 나왔습니다
머리들이 좋아서 고등학생때도 1등으로 나오고
둘째 아주버님은 서울대 물리과에 수석으로 나왔습니다
시어머님은 자식들을 위해 가정 일은 어머님이 다 하셨지여
그러나 며늘이들은 연해 결혼을 시키셔서
학벌도 안보시고 맞이 하셨는데 둘째 형은 중졸을 한 며느리을 보시고
큰 형도 고졸 형님을 들이셨지요
그런데 제가 시집와서 보니 형님들이 학벌이 안좋아서 자격지심이 많아서
시집에 잘못하고 시어머니를 따돌리고 여간 시집 식구 알기를 우습게 여기더군요
저는 시어머니를 딸처럼 생각하고 모셨습니다
그래서 며늘이 다섯중 저를 젤 이뻐하셨지여
그런데 아들들이 가사일을 안해요 어머니가 그리 키우셔서요
저는 당연히 여자인 제가 가사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잔소리를 안했지요
남편의 형제들은 너무 착하고 어질어서 욕심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다들 못살지요
그거보면 동서든 누구든 학벌이 어떻든간에
어느정도 교양과 지성이 갖추어져 있어야
주위가 편하게 돌아가지요.
주위를 볼 때 그것은 혹시 대졸이라야 더
교양이 갖추어지는 건지 항상 의문이 들어요.
무식해도 교양이 있을 수 있듯이 대좋이라도
무교양인 분들이 많더군요.
네에 교양과 지성은 학벌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항상 배움을 가지고 그리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가정 교육이 잘 되어 있으면 선하게 살려고 하겠지요
큰애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셍님께서 그러더군요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고요
가정교육이 잘 되어야 합니다
언니는 가정에서나 밖에서도 현명하시니 자녀들이 훌륭히 자랐지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04 00:53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04 10:09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4.04 10:19
유교가 지배하는 문화속에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어렸을적에 어머님은 같이 식사 안하시고 항상 부엌에서 먹는것만 보아 왔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차별받는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우리집 제사에 내가 내 딸들도 과감히 참석시켰더니
그 혁명적 처사에 모두 깜짝 놀랐지요.
애들 반애들이 자기들은 부엌에서 음식장만만 하지
제삿방에는 부정탄다고 얼씬도 못하게 한다고 부럽다 했다더군요.
그럼 음식장만에 남자들도 참석하던지 남자들 위주
세상이 너무 심하고 그것이 아직도 내려온다니 더욱.
잘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창 미국으로 이민가던 시절이 있었죠.
제 형제자매 8남매 중 3명이 재미동포입니다.
형제들과 만나 대화하면 안통하는 것이 좀
있으시겠습니다.
전부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힘드시겠지만.
사모님이 그정도로 당당하게 나아가신 것은
대단한 氣의 소유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분은 우리 시댁같은 집으로 한번 시집을
와보셨어야 하는데 ㅎ
프티부르조아님을 진정한 프로텔라리아로
훈련시키는 神의 뜻 아닌가 싶습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여성들은 성차별이라는 불평등을 하나더 짊어지셨지요. 빨리 빨리 불평등이 사라지는세상이 되었으면...
양반 상놈 남자 여자 상하관계에서 받은 불평등을 여자 남자에서 보상받으려는 어리석은 남자들의 심보를 이제는 크게 꾸짗어셔도 될듯. 대등한 인간을 차등과 차별로 나누는 저들에게 철퇴를....
철퇴를 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