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비리가 사회문제화 되어 있는 가운데 자신이 직접 체험한 피해사례를 소재로 소설을 출간한 작가가 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사기범으로 몰려 구속되고 난 후 무죄로 판명되긴 하였으나, 구속기간 중 아들이 '사기꾼의 집안'이라는 수치를 당하고, 그 여파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가정파괴를 당한 박경자씨다.
26일 출판기념회를 연 박씨는 자신이 당한 시련을, 사법비리로 신음하는 모든 힘없는 국민들을 위해 문학작품으로써 앞서 싸우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앞으로 문학을 통한 사회정의 구현 활동을 강하게 추진할 것임을 示唆(시사)했다.
박씨는 나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여자의 나이는 묻는 것이 아니다"면서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라고만 했다.
다음은 박경자씨와의 일문일답.
- 사건을 당하기 전에도 작가 생활을 했는가 "방송인으로 출발하여 수필 등의 작품활동을 했다."
- 구금 이전과 이후 囚人들을 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구속된 후 무죄자가 매년 천명 가량씩이나 나온다. 그 전에는 교도소를 갔다온 사람이라면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곤 했지만, 이제는 나 자신도 그곳을 갔다온 입장에서 이 사람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 검찰이 있는 이유는 경찰의 수사 이후 법률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인데 그렇게 억울한 囚人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검찰의 존재 가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당신의 구속이 실수에 의한 것이라면 너무 흔한 사례이다. 검찰의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보는가. "한두 사람 건너 청탁을 하면 검찰은 해당자의 구속 등을 요구에 맞게 하곤 한다. 검찰과 줄을 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법적용의 차이는 매우 크다."
- 작품으로 활동하게 된 동기는 "참여연대 사법제자리놓기 회장을 맡아 활동해보았으나 사법비리에 대항하는 운동의 현실적 한계가 너무 많아 문학작품을 통해 투쟁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 우리 나라는 저항문학 등 문학이 사회의 힘있는 부조리에 대항하는 것이 통상적인 진리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사법비리를 작품으로 다루어 세상에 알리는 작가가 상당히 드문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법비리를 폭로하는 작가에 가해질 보복이 너무 두려운 것이겠다. 정치권력에 저항하여 보복을 받을 때에는 사실 그대로 받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오히려 명예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사법적인 보복은 사생활 캐기나 파렴치범으로 모는 등으로 해서 작가로서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다른 사람들의 사례도 작품화할 것이다. 계속해서 억울한 사법피해자들의 사례를 찾아 옴니버스 식으로 작품을 써서 발표할 것이다. 작가가 해야할 일이 바로 억울한 사람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아닌가."
2002-04-26 오후 9:57:04
*** (소설) 안개 속의 덫 ***
--박경자
9월의 바람이 여름의 더위를 시키던 어느 날 나는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드렸다. 대구시 남산동에 위치한 남현교회 안에 있는 사택에 살고있는 나는 전도사로 이곳에 거주한지도 어언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교회안에 산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수기로 드나드는 신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과 행여 목사님께 누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늘 긴장한 상태에서 깔끔하고 정돈된 생활을 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장성하여 하나 둘씩 출가를 하였고 신학대학을 나온 맏아들 영모도 재학중에 피아노를 전공한 참한 여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여 평의동에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독립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 영모는 교육전도사를 하면서 신학대학원을 준비중이었으며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남편을 내조하는 며느리, 그들은 참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며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어느 덧 여름의 무더위가 한풀 꺽이면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빰을 스치고 지나갈 때 `또 한 해의 가을이 나의 어깨 위에 다가서 있구나'하고 생각하니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후 혼자서 어린아이들을 길러온 세월들이 덧없이 서글퍼 그 쓸쓸한 가을 바람을 피하고 싶어져서 방으로 막 들어설 즈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던 것이다. "어머니, 그이가 어젯밤에 안 들어왔나 봐요." 다급해하는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봐라." "어젯밤 동생네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놀다가 학원문 단속하러 간다고 집에 갔는데 전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근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옆에 없다는 말이냐?" 순간 나는 며느리가 임신한지 얼마 안된 상태라 일단 안심을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기도 갔다가 고단해서 잠이라도 든 모양이지? 걱정하지 말고 좀더 기다려봐." "예. 어머니. 한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제가 좀 놀랐나 봐요. 괜히 어머니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그럼 쉬세요."
별 의미 없이 며느리를 안심시키고 이것저것 일거리를 다듬고 있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거기가 이영모씨 댁 맞습니까?"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영모씨 어머니 계시면 좀 바꾸어 주십시오." "전데요. 무슨 일인가요?" "지금 아드님이 체포되어 서부경찰서 보호실에 있는데 저보고 집에 전화를 걸어달라고 해서요. 아는 사람 면회갔다가 댁 아드님 부탁을 받고 이 전화를 걸어드리는 겁니다. "
낯선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의 힘이 빠져나가면서 수화기를 방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서둘러 택시를 탔다. 서부서로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기도 하고 지옥으로 행하는 길 같은지 내 나이 쉰 살이 넘기까지 경찰서 문턱을 단 한번도 넘나든 적이 없던 나에게는 공포심만 가득할 뿐이었다. 경찰서 보호실 문을 열었을 때 몇 미터 앞에 앉아있는 영모가 뿌옇게 내 시야로 들어왔다.
어떻게 저럴 수가,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피멍이 들어 퉁퉁 부은 얼굴. 내 아들 영모는 이빨마저 부러진 상태였으며 그 뿐 만아니라 와이셔츠에는 온통 구두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무엇대문에 누구한테 얼마를 맞았길래 이꼴이 되었을까 나는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면회신청을 하여 겨우 마주앉은 나는 아들이 간밤에 겪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오후에 학원 문을 닫고 안사람이 진영이네 집에서 처제네 식구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구 하니까 가자구 하드라구요. 그래서 갔었지요." 며느리는 맏딸이었기 때문에 집이 대구 근교여서 동생들이 대구에 나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친정에서 남매들끼리 자주 왕래하면서 살라며 며느리의 학원 옆에 조그만 주공 아파트를 얻어주었는데 그날도 처남처제가 식사나 함께하자고 초대를 해서 아들과 며느리가 저녁무렵 아파트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TV영화를 보면서 모처럼 재밌는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었었는데 이때 갑자가 며느리가 깜빡 잊었다며 어쩔줄 모르는 것이었다. "여보, 생각해 보니까 오늘 받은 레슨비를 테이블 서랍에 그냥 넣어두고 온 것 같애요. 불도 안끄구. 어쩌지요? 안그래도 가끔 도둑이 들어 걱정인데." "그래? 그럼 내가 빨리 다녀오지 뭐."
아들은 급히 그곳을 나서서 3분 정도 떨어져 있는 학원으로 향했는데 아내의 말대로 불은 환하게 켜져 있는 상태였고 책상 속에는 그날 들어온 레슨비 25만원이 들어 있었다. 불을 끄고 돈을 챙겨 나오려고 하다가 내일 있을 스터디에 발표할 자료를 정리해 놓지 않은 것이 생각 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작업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벌써 2시 30분. 아내에게 전화연락을 미처 못하고 눌러앉아 버렸던 것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던 것이다.
빨리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에 서둘러 학원을 나왔다. 자기 아파트에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벨이 고장났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목소리를 높여 안에다 대고 아내를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파트 뒤쪽으로 돌아가 창문을 흔들며 불러보았지만 모두들 피곤해서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 모양이었다.
너무 이른 꼭두 새벽이었지만 차라리 새벽기도를 다녀오면 이른 아침이 되겠지 하는 생각에 아들은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밤새도록 문을 열어놓고 있는 교회는 집 근처에 두 군데가 있는데 순복음교회와 대일교회. 대일교회가 가깝기는 하지만 두류산 가는 쪽에 있는 순복음교회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걸어서 20분 거리.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 도로를 끼고 계속 걸었다. 부평리 사거리에 당도하자 길을 건너야 했다. 대구호텔을 지나 삼익 맨션 앞에 왔을 때 비로소 순복음교회까지 걸어가는게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 한숨 자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지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대일교회로 가기로 다시 마음을 바꿔먹고 길 건너편에 있는 교회를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 지금까지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골목으로 들어가서 좌측으로 쭐 올라가면 바로 대일교회가 나올 거라고 짐작하면서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벽이라서 그런지 골목길은 몇 몇사람이 오갈 뿐 비교적 한적하였다. 가로등 불빛이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고 길도 차 두어대 쯤은 충분히 비켜갈 정도로 넓었기 때문에 걷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영모는 낮에 공부한 내용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계속 걸어갔다. 골똘히 생각을 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 발긑만 쳐다보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는데 달성슈퍼 앞을 지날 때 누군가가 어깨를 툭 부딪쳐 왔다. 깜작 놀라 바라보니 웬 젊은 여자가 다가와서 부딪치며 넘어지는 게 아닌가.
(이 넓은 길에서 하필이면 왜 나한테 다가와 부딪혔을까?) 사태 파악이 안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여자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더니 영모를 향해 다짜고자 욕을 하기 시작하였다. "야, 이 개새끼야! 눈깔 좀 똑바로 뜨고 다녀라." 갑자기 당한 일이라 기가 막혔다. 길가는 사람한테 부딪혀 실수를 했으면 미안해야 할텐데 오히려 심한 욕설을 서슴없이 하다니. 영모는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순간 영모의 눈앞에 다시 삿대질이 날라들었던 것이다. "이 개새끼가 누구를 쳐다 봐! 쌍놈의 새끼!" "뭐가 어째?"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듣다 못해 여자의 빰을 세차게 한 대 때리고 다시 한 대를 더 때렸다. 영모는 방금 자신이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워 하며 무의식적으로 지금까지 걸어오던 반대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등뒤에서 여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살려! 도둑이야! 강도 잡아라!"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들려오자 영모는 여자에게 뺨 두 대를 때렸다는 자책감에 휩쓸려 이 자리를 어서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보원약국 앞까지 뛰어 달아나는데 갑자기 군청색 엘란트라 승용차가 지켜서 기다렸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았다. 영모는 차를 피해 큰 도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때 교통경찰 두명이 합세하듯이 차에서 내려 영모를 뒤쫓아 왔다. 얼마 못간 상태에서 붙잡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가슴만 벌렁거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 얼마 지나지 않아 파출소 문이 열리고 언뜻 보기에도 험상궂게 생긴 건장한 남자 대여석면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가방 어떻게 했어?" 그들은 대뜸 소리를 질러댔다. "가방이라뇨. 무슨 가방 말입니까?" "이 새기가? 이게 어디서 발뺌이야. 니가 뺏어간 가방 어떻게 했냐구?" "전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뭐라고 이 새끼 봐라. 터진 입이라고 나불대기는. 야! 너 공범있지? 이 새끼야, 니가 공범한테 가방 넘겨준 것 다 알아. 빨리 안 불어?" 그들은 있지도 않은 공범이야기를 하며 영모를 마구 몰아댔다. "모릅니다. 가방을 들고 있는 건 봤지만 전 정말 모릅니다." 영모는 정신을 추수려 불과 얼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던 것이다. 그 여자가 가방을 들고 있었던 게 언뜻 기억에는 났으나 그는 빰을 때린 죄책감에 도망을 친 것뿐인데 왜 나한테 그 가방을 내놓으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가방의 행방을 모른다는 영모의 말을 듣고도 거짓말한다며 바른 대로 대라고 인정사정 없이 마구 영모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파출소 순경 3명이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파출소에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며 말리는 척 하였을 뿐 파출소 안은 무법천지로 변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한바탕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퍼부은 다음 잠깐 쉬더니 조금전 보다 훨씬 누구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손가방만 있으면 뭐 별일이 아니니까. 일단 가방을 찾으러 갑시다." 그들의 설득에 영모는 가방만 찾으면 돌려보내준다는 말만 믿고 그들과 형사를 따라 사건현장에 갔다. 이리저리 가방을 찾아봤지만 가방은 눈에 띄이지 아니하였고 한참 후에 파출소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형사는 가방의 소재를 영모에게 또 물었다. 또다시 모른다는 사실로 대답을 되풀이 되었다. 그랬더니 형사도 공범을 대라고 하며 막무가내로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 갈기는 것이었다. 영모는 다급한 나머지 사실대로 말을 하고 신분을 밝히며 자초지정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사실 전도사인데 새벽기도를 하러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아가씨가 그 넓은 길에서 하필이면 나한테 부딪혀 오며 심한 욕설을 하길래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빰을 두 대 때린 것은 사실이나 그 두 대 빰을 때린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영모는 잘못을 그렇게 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 일을 집에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집에 전화 한통화만 걸면 안되겠느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을 하였다. 그러나 형사는 영모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방진 새끼, 여기가 니짐 안방인줄 알아?" 내어 뱉은 한마디로 묵살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주민등록증을 보고는 "남산동에 사는 놈이 한밤중에 여길 어슬렁거리는 것만 봐도 틀림없어." 마치 확증을 잡았다는 듯 단언을 하며 영모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 주민등록증은 결혼한 후 평의동에 분가를 했지만 아직 주민등록 이전을 하지 않아 주소가 남산동으로 되어있어 남산동과는 지금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도 가족에게 전화 한통화는커녕 가족과 차단시켜 놓고 피해자라는 여자쪽으로 유리하게 조사를 진행시켜 나가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담당 형사는 검거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의 결백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아들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이곳에까지 들어오게 한 그자들이 처벌을 받을 거라는 기대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며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일까. 다음 날 신문에 영모는 파렴치한 강도로 둔갑해 보도 되고 있는 것이다. 착한 내 아들이 강도로 변해 있다니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내 아들이 목사가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희망을 걸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천둥소리도 없이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기사내용은 이랬다.
"길가던 20대 여자 폭행, 금품 빼앗은 전도사" 대구 서부경찰서는 25일, 길가던 여자에게 시비를 걸고 폭행한 후 현금이 든 손가방을 빼앗은 이영모(26. 전도사. 대구시 남산동 2424-19)씨를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씨는 25일 오전 3시 30분경 대구시 서구 내당1동 달성슈퍼마켓 앞길에서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고모씨(22. 식당업. 대구시 수성구 수성동 4)에게 접근, 함께 여관을 가자고 시비, 반항을 하던 고씨를 빰과 가슴을 수차레 때린 뒤 현금 수표 등 53만원이 든 손가방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다.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도 아들에 대한 나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유치장에 있는 아들이 눈에 밟혀 밥도 제대로 넘길 수가 없었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뒷덜미가 유난히 당기고 아파서 진통제를 먹고 잇는데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수화기를 들었다. 피해자 고혜영의 남편되는 구병선이라는 사람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피해금이 총 7천만원인데 그 돈만 주면 구속되지 않게 해 주겠다며 돈이 준비되면 연락을 하라고 자기 집과 가게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속으로는 너무도 놀라웠고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태연하게 내일 연락을 하겠다고 말하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피해자인 아가씨가 젊은 나이에 술집을 경영한다는 사실이 좀 미심쩍게 여겨졌고 구병선이 가르쳐준 전화번호를 가지고 전화국에 가서 고혜영의 집과 가게부터 확인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구청으로 가서 유흥업소 등록날짜를 확인한 후 세무서로 갔다. 사업자등록번호를 확인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 동안 세금을 내지 않고 영업을 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피해자 고혜영이가 운영하고 있는 술집을 찾아갔으나 낮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져 있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가게에 들어가 수소문을 해 보았더니 영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영업시간도 무시하고 밤을 새워 영업을 해왔다는 소리도 들려 주었다. 그날 밤, 고혜영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가 구병선씨 댁인가요?" "예. 그런데요?" 어제 나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고혜영씨와 동거중인 내연 남편 구병선.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조직 폭력배두목이었다.
"이영모의 에미되는 사람인데요,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예. 좋습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서로 얼굴을 모르니까 프린스 호텔 커피숍이 어떨까요?" "그렇게 하죠." 시간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 혼자 프린스 호텔로 나갔다. 그런데 피해자 쪽에서는 깍두기 머리를 하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여석명이 나와 있었다. 자세한 경위야 어찌됐든 내 아들이 피해자 빰을 때렸으니 사과부터 한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다치지 않았는지요? 아들은 대신해서 제가 사과를 드릴게요. 여기 차 좀 주시죠."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나는 일이 잘 해결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사정하듯 말했다. "비록 좋지 않은 일로 만나게 됐지만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결과만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 되도록 부디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세요." "예. 안 그래도 전에 서부경찰서에 다녀왔는데 나도 처음에는 분통이 터져서 잡아 넣었지만 유치장에 갇힌 걸 보니 나이도 젊은 사람이 불쌍해 보입디다. 그래서 아직 집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펄펄 뛰지만 내가 잘 설득을 시켰습니다. 가방이 없어져서 잃어버린 건 현금 얼마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외상을 긋고 간 단골손님들 외상 싸인지를 다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 피해액이 7천만 원 정도되니까 이 돈만 받으면 합의를 해 주자고 했어요."
다시 합의금 7천만 원을 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사건 뒤에는 처음부터 고액의 돈을 노린 계획된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부디 제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치료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물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시는 강도 당하였다는 피해액의 보상은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구청과 세무서에 가서 알아보았더니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더군요. 그것보다도 영업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외상값이 7천만 원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아들은 강도질을 할 만큼 급한 처지가 아니였어요. 은행과 집에 돈이 있었고 사건 당일 날에도 25만원이라는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진짜 큰 돈이 필요했다면 새벽길 가는 여인에게 무슨 큰 돈이 있다고 그 시간에 강도질을 했겠습니까?" "아주머니, 댁의 아들은 틀림없는 강도입니다. 그럼 가게에서 술팔고 세금낸 영수증만 가지고 오면 돈을 주시겠습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반문하는 그 남자를 향해 나도지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사업자 등록도 안 한걸 확인했는데 가짜 영수증이라도 만들어 오겠다는 말인가요? 그러지 마시고 치료비에 대해서는 충분히 보상을 해드릴 테니 좋게 해결을 하도록 합시다."
구병선은 크게 실망한 표정이었다. 거액의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나왔다가 치료비 운운하는 말을 듣자 김이 팍 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물러 설 수 없다는 듯이 계속 7천만 원을 주장하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면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할 수 없군요. 나는 내 아들이 강도라는 누명을 쓰고는 나는 10원 한 장도 줄 수 없습니다. 법대로 처리하기로 하죠." 나는 마시지도 않은 제 차 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속으로는 무진장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다리에 힘을 주었던지 집에 돌아오니 누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언 사람처럼 온몸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명을 씌운 것도 분한데 말도 안 되는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일당에게 법대로 처리하자고 당당하게 말하고 나왔지만 사실 이게 잘한 일인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아무튼 이젠 어쩔 수 없이 변호사를 선임할 수 밖에 없는 실정에 이르렀다.
여자의 빰을 때린 것은 사실이지만 가방을 강취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데 마치 강도 상해범으로 몰린 것은 여자가 맞는 것과 가방을 가로채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진술 때문에 아들 영모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있었다. 목격자는 근처 슈퍼에서 점원을 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그 목격자는 폭력배쪽에서 만들어낸 허위증인이었다. 하지만 담당형사는 그들과 짰는지 그 증언을 토대로 강도 상해범이라고 조서를 꾸몄다. 목격자라고 나온 그 청년은 처음에는 가방 뺐는 것을 본 것도 같고 안본 것도 같다며 횡설수설하더니 폭력배들이 돈을 더 집어준 듯 그 뒤부터는 폭력을 휘두르고 가방을 강탈하는 걸 보았다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서부서 강력계 형사들은 그 목격자가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일체 비밀로 하여 목격자에 대해 재조사를 하지 않고 허위 공문서까지 작성하여 서둘러서 사건을 검찰에 송치시켜 버렸다. 거짓 목격자라는 걸 알았으면 영모가 돈을 빼앗고 가방까지 빼앗았다는 강도혐의에 대한 물증이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풀어줘야 하는데도 자백을 받아내려고 가혹행위를 해서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앞 이빨까지 부러진 상태이니 유야무야하면 가족들이 들고 일어나 나중 고소라도 하면 골치 아플 것 같으니까 그냥 검찰에 넘겨버렸던 것이다.
즉 강력계 형사들까지도 이 사건의 공범이 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한 선량한 시민이 자해공갈단 폭력배와 경찰에 의해 엉뚱한 누명을 쓰고 검찰에 송치되었으니 검사만이라도 빨리 옥석을 가려주고 억울한 멍에를 벗겨주었으면 되는데 검사조차 경찰조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구속수사를 시작했다. 끔찍한 검찰조사가 시작이 되었다. 여자의 돈가방을 어디로 빼돌렸느냐 그걸 불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마침내 기소를 했다.
법원에 낸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았다.
공소장 피의자는 울산 옥교동 전도사로서 타인의 금품을 강취할 마음을 먹고 1991. 9. 25. 3:30경 대구직할시 서구 내당1동 소재 달성슈퍼 앞 노상에서 그곳을 지나가던 피해자 고혜영(22세. 여) 에게 접근하여 시간이 몇 시냐고 묻고 피해자의 뺨을 수 회 때리고 땅에 넘어지자 발로 수 회 차서 피해자에게 약 2주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전흉부 좌상 등의 상해를 가해 항거 불능케 하고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현금 530,000원 예금통장 2개(대구은행 원대동 지점 예금액 90,000원, 대동은행 내당동 지점 예금액 20,000원), 외상 술값 네모 사인지 수매, 인장 1개가 든 시가 10,000,000원 상당의 손가방을 강취한 것임.
마침내 아들은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고 재판만 기다리게 되었다. 구치소 찬방에서 옥살이를 해야했던 것이다. 변호사는 무죄로 풀려날테니 염려 말라 했다. 죄가 있다면 여자에게 뺨 두 대 때린 것 밖에 없고 재판과정에서 목격자의 증언이 거짓이었다는 걸 입증만하면 될 것이라 했다. "아드님은 초범이고 성실하게 양심껏 사는 전도사 아닙니까? 교인들을 내세워 강도짓을 했다는 건 어불성설임을 주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죄가 없으니 당연히 무죄로 나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심 재판에서의 검사가 구형 선고한 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아들이 때린 뺨 두 대에 5년 구형이라니 나는 분통이 터져 큰 건물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렇다고 이 순진한 아들 딸들을 두고 그 길마저도 택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억울하여 항소를 했다. 그러면서 재판과정에서라도 아들의 무죄를 밝히려는 희망을 안고 몸이 쇳가루가 되도록 뛰어다녀야만 하였다.
드디어 선거 공판이 5월 20일에 열리게 되었다. 우리가족들은 모두 무죄 판결이 내려지길 마음 졸이며 기다려 온 날이었다. 드디어 영모가 불려나왔다. 나는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8개월 동안 겪은 일들이 색바랜 필름이 되어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이 사건의 일들. 그러나 무죄만 선고된다면 그 동안 끔찍했던 고통과 한숨 섞인 눈물들도 한 순간에 씻겨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부장판사님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은 1심때와는 달리 피해자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목격자의 진술도 일관성이 없어 돈을 강취했다는 강도부문에서는 무죄임을 밝혔지만 검사의 공소장 변경으로 인해 별개로 심리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이 인정되어 결국 뺨 두 대에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이 실형선고를 받게 된 셈이었다.
처음엔 비교적 진실에 근접한 판결이 내려지나보다 하며 좋아햇었는데 잠시후 예비적 공소사실이라는 새로운 올가미에 걸려 영모는 끝내 유죄판결을 받고 만것이었다. 강도의 누명을 벗기 위하여 강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보하면 무죄가 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막상 재판이 시작되고 보니 검찰이 폭력에 관한 부분을 보완하여 공소장을 변경하는가 하면 즉 1심 공소사실에서는 달성슈퍼 앞길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고혜영에게 다가가 갑자기 팔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수회 때리고 손사방을 강취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2심에서는 달성슈퍼 앞길에서 그 곳을 지나가는 고혜영을 보고 성적 충동을 느껴 그녀에게 접근하였으나 그녀가 거절하자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발로 가슴을 등을 차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고 내용이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가방을 강취하였다는 증거가 없자 강도부분에 대한 것들을 쏙 빼어버리고 성적충동을 운운하며 폭행에 대한 부분을 훨씬 강화시켜 부추겨버린 것이었다.
공소장이란 일종의 범죄사실에 대한 기술서라고 할 수 있는데 형사재판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검사가 기소를 함으로써 범죄자를 잡아넣을 수도 있고 풀어줄 수도 있는데 기소하여 재판을 받는 일련의 재판과정 속에서 검사가 준비하여야 할 서류가 바로 공소장이다. 그 공소장에 기재된 사안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는다면 그러면 공소장을 변경하였다는 건 무슨 말일까.
2심 재판을 하게되면 1심 공소 사실이 약해 피고가 무죄로 풀려날 지 모르니까 무죄석방을 막으려고 검찰이 공소장의 내용을 다른 혐의 내용으로 변경하여 기소한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조직폭력배와 같은 강력범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또 모르겠는데 단순폭행에 초범인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일까.
처음 수사단계에서 조사만 제대로 해주었던들 그냥 훈방될 수 있었던 사건을 경찰의 말만 믿고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검찰을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 공소장 변경이라는 불씨는 항소심 판결에 결정적 작용을 하여 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던 것이다.
2심에서 변경된 공소사실에서는 앞서 밝힌 대로 영모가 성적 충동을 느껴 피해자에게 접근하였으나 그녀가 거절하자 머리채를 잡고 발로 가슴 등을 차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고 적혀 있었는데 도대체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엄정해야 할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드님은 풀려나왔겠네요? 집행유예로?" "죄 없이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습니다만 상처뿐인 석방이지요. 집행유예도 실형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들은 전과자가 된 것입니다. 이럴 수도 있나요?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야 하느냐고요. 박회장님! 나는 지금 이순간 전국에 있는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법대 교수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심증만으로 엉터리 각본을 짜내어 공소장 변경을 해도 되는지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공소장을 변경해서 함정에 빠진 무고한 시민을 꼭 전과자로 만들어야 하나요?"
그러면서 이영모의 어머니는 내 소매를 잡은채 소리내어 울었다. 이영모의 어머니가 사무실로 나를 찾아와 하소연하게 된 것은 나와 뜻을 같이한 시민운동가들의 모임인 `사법제자리 놓기 시민모임(약칭 사제모)'에 내가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영모씨처럼 법 앞에서 억울하게 당하며 신음해야하는 이들의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생긴 시민단체였다. 그걸 알고 이영모 어머니가 찾아와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던 것이다.
<사제모>는 사법정의를 생각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 사법 제자리놓기 시민 모임을 발족하였고 이 모임의 취지는 이 사회의 오랜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참다운 민주주의를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속에 많은 법률비용과 법조계의 권력지향적 태도 권위주의적이고 불합리한 관행 등 굴절된 사법을 바로 펴 보자는 의미와 또한 사법을 가까이 하는 사법의 벗이 되고자 하는 의미,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고 깨어있는 시민이고자 하는 의미, 즉 법이 시민의 편이 되기까지 우리들은 작은 시민의 힘을 모아 사법정의에 보탬이 되고자 발족한 단체였다. 그래서 법정과 검찰과 경찰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이 법의 권력에 짓눌린 객체가 아니라 법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일어서는데 도움을 주자는 시민단체였기에 억울하게 당한 선량한 시민은 누구나 찾아와 호소하고 상담하는 시민단체였다.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중에도 "사법감시"라는 기관지도 내어 전국의 판사, 검사, 법학교수, 변호사, 국회의원, 일반시민 등을 상대로 5천부씩을 찍어 배포하고 있었고 그 잡지의 대표로는 김중배(현MBC사장)씨, 그리고 편집위원으로는 박은정(이대법대 교수), 박원순 변호사, 박경자(작가), 안경환(서울법대 교수), 한인섭(서울법대 학장), 차병직 변호사 등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사법감시지'가 그 분들의 노고로 발간되던 터이었기에 법의 피해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으나 억울한 사법피해를 당했던 시민들에게는 이곳을 찾아와 흥분된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다. 나는 이 회의초대 회장으로서 오늘도 시민단체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3평 정도의 책상 앞에서 열을 올려가며 책상을 두들겨 대는 민원인들의 호소를 하루종일 귀담아 들어야만 하였던 것이 당시의 일과였다.
이영모의 어머니는 대구에서 일부러 올라 온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무죄로 석방될 수 있었는데도 검사가 공소장을 변경하여 폭행 대해 과장된 사실을 강조하여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정말 억울하니 아들과 연관된 경찰과 검사, 판사 등 모두 고소하겠으니 <사제모>가 앞장 서달라 했다.
고소라는 건 정말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억울하면 그럴까 싶었다. 나는 우선 강도부분은 무죄로 판명이 되었으니 <언론중재위원회>에 가 신문에 났던 기사를 정정하는게 순서일 것 같다 했다. 고소부분은 힘 닿는데까지 도와 줄테니 용기를 잃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 어머니가 가야될 고된 가시밭길이 지금부터 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겪었기에 `여기에서 이만 그치세요.' 차마 그 말 한마디를 들려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피해보상에는 앞장 설 수 있으나 많은 사람들을 고소에 이르르는 것은 자신이 가시밭길을 걸어야 된다는 너무나 험한 길이기 때문이었다.
선량한 시민 이영모의 명예훼손은 그 후 언론중재위원회의 노력으로 강도 혐의를 없애는 보도로 다시 인격 회복하였다고 하나 이 사건은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나와 영모 어머니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영모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법원 앞에 있는 언론중재위원회를 찾아갔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26일 XX일보에 실린 <길가던 20대 여자 폭행 금품 뺏은 전도사>영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여주고 또 2심 판결문을 보이면서 정정 중재보도를 청하였다.
효과는 바로 나타나 5일 후인 9월 7일 오후4시에 중재부 사무실에서 대구고등법원 김모부장판사를 중재부장으로 하여 비공개로 중재를 한다는 연락이 왔었다. 영모와 함께 그 장소로 갔었는데 중재부장과 3명의 중재위원, 서기, 그리고 XX일보사 고모씨가 발행인 대리로 출석을 하였고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 신청인인 영모와 신문사가 마침내 화해를 했는데 쌍방이 합의한 중재합의조항은 다음과 같다며 서류를 꺼내 펼쳐 보였다.
1. 보도문
가. 제복 : 이영모씨 (무죄) 강도 상해 관련
나. 내용 : 대구 고등법원 형사부는 5월 20일 지난해 9월 당시 대구 서부경찰서에 의해 강도상해 혐의로 입건돼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이 선고됐던 이영모씨에 대해 범죄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무죄의 선고를 한다.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다. 재판부는 이씨에게 현금과 예금통장이 들어있는 손가방을 강취당하였다는 피해자 고모씨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고 이씨가 가방을 탈취하여 즉시 도주하지도 않고 약 20분 동안 피해자를 때리며 따라오라고 강요하였다는 피해자의 진술로는 이씨가 재물을 강취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강도상해 공소사식에 대하여 무죄선고를 해야 할 것임에도 원심은 증거에 대한 가치 판단을 그르쳐 강도상해 혐의 사실을 유죄로 인정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입법을 범하였다 할 것이므로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2. 피 신청인은 이 보도문을 9월 15일 이전에 XX일보에 게재하되 제목의 활자크기는 본건 중재대상 기사 제목 `길가던 20대 여자 폭행'과 같은 크기로 한다.
영모 어머니는 그나마 다행이라며 일부분이긴 하지만 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도와준 것에 여러번 고마움을 표했다. "오랜만에 자신감을 얻었어요.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예요. 우리 아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사람들에 대한 고소에서 이겨 온전한 명예회복이 되도록 나서겠어요. 「사법제자리 놓기 시민모임」에서 적극 도와주세요. 회장님!" 이영모의 어머니는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2004년 03월 0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