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덴크라이스는 누구?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3∼44년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에 특출나게 뛰어난 학자들만 피신시켜 숨겨놓았다. 전시라 실험실과 실험도구들이 없던 학자들은 매일 밤 자기들이 일하는 각 분야에 관한 자료와 의견들을 서로 토론하고 강연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특히 한 사람이 학자들로부터 대단한 갈채와 인정을 받았는데, 그가 바로 동작을 통한 의식 공부를 발전시킨 러시아계의 유태인 펠덴크라이스(Feldenkrais, 1903∼1984) 씨였다. 그는 어이없을 만큼 간단한 동작들을 매트리스 위에서 시범해 보이며, 그것만으로 인간의 두뇌를 계속 발전시키고 자극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펠덴크라이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였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졸리엇 퀴리(Jolioit Curie)와 함께 작업한 유명한 물리학자였으며, 신경시스템과 움직임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한 생리학자이기도 했다. 또 서양 사람 최초로 검은 띠를 획득한 유도인이며, 유럽 최초의 유도 클럽 설립자로 유명하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펠덴크라이스를 창시하게 됐을까. 여기에는 고통을 통한 발견이라는 인생 드라마가 숨어 있다. 어느 날 펠덴크라이스는 유도를 하다가 무릎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찾아갔는데, 거기서 “다리를 절단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듣는다. 여기서 현대의학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면 그는 그저 다리가 불편한 물리학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작이 곧 의식이요, 호흡
그러나 그는 병원을 떠나 자신의 다리를 직접 치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평소에 동작, 사고, 생각, 감정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획기적인 인식과 해부학과 물리학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자세’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는데, 우리의 전체적인 몸 상태의 그림은 바로 육체적·정신적 자세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었다. 또한 우리의 두뇌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에는 ‘동작’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가 높은 매개물이라고 확신했다. 우리의 신경시스템은 거의 모두 동작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펠덴크라이스는 자신이 개발한 동작으로 정상인처럼 다시 걷게 된다. 기적의 재활이었던 셈. 그 기적은 일회적이고 예외적인 한 사람에 머물지 않았다. 그 뒤 1949년부터 동작들과 방법들을 체계화해 전세계에 보급했으니까. 펠덴크라이스 동작법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간단하고 쉽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장점은 복잡다단한 체계를 신뢰하는 현대인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너무 간단해서 처음 경험하는 이는 싱겁게 느낄 지도 모르지만 꾸준히 익히면 서서히 몸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모든 수련이 마찬가지이지만 급한 마음, 조급한 욕심과 기대감은 금물이다. 동작이 간단하다고 섣불리 체조의 일종일 거라는 선입견을 품어서는 곤란하다. 펠덴크라이스는 호흡과 의식을 놓치지 않고 하나로 엮으며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작은 의식의 가장 기본이고, 호흡은 곧 동작”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펠덴크라이스의 제자로는 이스라엘 초대 수상 다비드 벤 구리온,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 프로골퍼 릭 액튼 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다. 국내에서는 성악가 이혜경 교수를 통해 주로 음악계 인사들, 예컨대 성악가 김영미·송광선·김청자 씨, 피아니스트 배예자 씨 같은 이들과 의사, 학생, 한양대 공성진 교수 등이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다. [출처] [대안 의학 펠덴크라이스1] 자세교정과 호흡으로 의식계발까지 (Feldenkrais Korea (움직임 학습을 통한 자기계발/치유)) |작성자 멀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