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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꾸고 싶었던 법학도 청년, 그 끝은 '인간어뢰' [일본史람]
오마이뉴스 [박광홍 기자] 2021.12.26. 11:21 (daum.net)
[일본史람] 청년 입 틀어막은 제국 일본, 전장의 소모품으로 그들을 내던지다
대선을 앞둔 한국에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청년'의 존재가 뜨겁게 호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 표심을 잡기 위해 각종 청년 관련 정책에 골몰하는 후보들을 보며, 청년이라는 단어가 새정치나 혁신의 상징으로 올라선 현실을 실감한다.
사회적으로 민중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극에 달했던 제국 일본에서도 청년들은 변혁을 갈구하던 주체였다. 젊은 학생들은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고서 폭력적인 제국 체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이 요구하는 '새정치'에 귀를 닫고서 투옥과 고문 등 탄압으로 응수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체사상의 광풍과 거듭되는 대외전쟁 속에서, 청년들이 꿈꾸던 새정치는 설자리가 없었다(관련 기사: 잘 알려지지 않은 '오야코동'의 과거).
시대가 품지 못한 청년
▲ 여동생 와카나와 함께 여동생 와카나는 오빠 미노루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이에 해병단(일본 해군의 교육훈련 시설) 교관들은 '전의를 상실시킨다'는 이유로 와카나의 편지를 문제 삼으며 미노루를 질책했다. 미노루는 편지까지 검열받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일기에 남겼다. |
ⓒ 니시와라 와카나(西原若菜) |
인간어뢰 카이텐(回天)특공대원이었던 와다 미노루(和田稔) 소위가 남긴 수기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국가에 의해 소모품 취급을 받았던 청년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출전 후 인간어뢰에 갇혀 숨지기까지, 자신이 학교와 군대에서 느낀 감상을 무려 36권에 달하는 대학노트에 기록했다.
청년 미노루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사주의로 물든 중고등학교 교육을 비판하고,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지는 천황숭배에 의문을 표한다. 미노루가 품고 있던 사명감은, 그가 고등학교 입학 3일 뒤에 쓴 일기에 드러난다.
"시대의 풍조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현대 전체주의의 강제적 해석에 부화뇌동하는 것, 저급한 군사주의에 가담하는 것은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적으로, 일본민족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에 참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0년 4월 17일)
그러나 이미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총력전 체제의 제국 일본에서 그는 이상을 펼치기 어려웠다. 국가는 잠재적 동원 대상자인 소년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서 주입했다. 전쟁이 예찬되고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를 살아가며, 미노루는 동요와 방황을 거듭한다. 미노루는 "이 무서운 세상에서 또 하나의 신념이 사라졌다"고 까지 쓴다.
독소전쟁의 개전과 일미 관계의 악화를 지켜보며, 그는 "대학 입시를 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죽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 돼 버렸다"고 내면의 불안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폭주의 길을 걷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가 이런 청년의 불안에 귀기울였을 리 만무하다.
▲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입학 시의 미노루 미노루는 학교가 지성을 기르는 곳이 아닌 병정을 만드는 시설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
미노루는 무책임한 제국의 지도자들을 '이기주의'로 비판하며, 그들이 결국 국민 전체를 사지로 내몰 것을 예상했다. 결국 1941년 12월 8일,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의 개전 소식이 들려온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그는 면학정진을 거듭해 그토록 원하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신문지면과 라디오 등을 통해 먼 발치서 전해지던 전쟁의 현실은 어느새 그의 일상으로까지 파고 들어온다. 1943년,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에투 섬 일본군 수비대의 전멸, 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 등의 암울한 소식들이 거듭 전해지는 가운데 미노루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 해 말 그동안 법·문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징병유예가 폐지되면서, 법학부 학생이던 미노루는 결국 학도병으로 동원된다. 그는 자신이 장차 미래에 펼칠 수 있는 수많은 꿈보다도, 지금 당장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가치있게 평가되는 현실에 절망한다(관련 기사: 패전 후 돌아온 일본군 학도병이 어머니께 겨우 한 말).
내면의 소용돌이와 안타까운 마지막
그의 수기에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스스로의 운명을 납득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그에게, 무의미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일본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의 소용돌이는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날에는, 국가에 대한 신뢰가 큰 사람의 죽음을 아름답게 그려준다. 나는 꼭, '어머니'나 다른 무엇인가를 부르는 일 없이 죽으러 갈 것이다. 다만 그 죽음이, 나의 생애를 의미있게 해주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만을 절규하며 갈 생각이다."(1943년 10월 9일)
▲ 카이덴 기지에서의 미노루(중앙) 미노루는 일상화된 죽음을 접하며 고뇌의 나날을 보냈다. |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
해군에 입대한 뒤, 미노루는 '군인 정신'이 철저하게 주입되던 환경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옥쇄'나 '전사' 소식은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못박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체격' 문제로 항공병과 지원에 탈락하고 좌절하던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어뢰정이라는 것은, 2분대 토무라 대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 가장 전사율이 높은 것은 비행기, 그 다음이 구축함이라는 것으로, 아직 정말로 활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긴 하겠지만, 어뢰정 대원의 사망률이 무척이나 낮은 것 같다." (1944년 5월 26일)
죽음에 대한 고뇌가 이어지던 일기 속에서, 처음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엿보인다. 스스로 죽음의 운명을 납득하고자 노력하던 그는 어뢰정의 생존율이 높다는 이야기에 반색하는 듯하다. 이 희망의 끈을 잡고 싶었던 것인지, 그는 결국 어뢰를 다루는 수뢰학교에 지원해 합격한다. 그러나 이때의 선택이 결국 그의 생사를 좌우하고 말았다.
극단적으로 악화되던 전황 속에서, 결국 탑승원의 자폭을 전제로 하는 '특공'이 실시되기에 이른다(관련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어뢰정을 선택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출격시 100% 사망하는 '인간어뢰 카이텐'이었다. 미노루는 체념한 듯 카이텐 특공에 지원한다. 카이텐 지원 후, 미노루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심정을 적어내려간다.
"어머니의 아들이 전쟁에 나가, 거기서 저의 작은 목숨으로 적을 격침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면, 그때는 저를 어머니의 아들이라기보다도 조국의 아들로서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제가 어머니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부르짖으며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944년 10월 18일)
카이텐 기지에 배속된 이후, 죽음은 일상화된다. 함께 지내던 전우들이 공습을 맞고, 훈련 중 사고를 당해, 특공에 나가 목숨을 잃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 죽음들을 지켜보며, 미노루는 자신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해군군인'으로서 특공의 각오를 다지던 그는, 결국 카이텐 출격 직전에 이르러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일기장 위에 고백한다.
▲ 카이텐 출격 당일 단검을 수여받는 미노루 일본군은 특공 출격에 앞서 국가신토적 의식을 행하며 특공대원의 사기를 북돋고자 했다. 미노루는 적을 발견하지 못해 귀항할 수 있었지만, 두달 뒤 훈련 중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
"나는 자신이 없다. 부모님의 얼굴을 뵈면 무엇이든 다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돼 견딜 수가 없다. 부모님은 뭐라고 생각하실지, 뭐라고 말씀하실지."(1945년 5월 15일)
천만다행이도, 미노루와 인간어뢰를 실은 어뢰정은 적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기지로 복귀한다. 그러나, 사망률 100%에 이르는 카이텐 출격을 피했음에도 결국 그는 자신이 고뇌하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1945년 7월 25일, 모의 카이텐을 타고 훈련 중이던 그는 기기 이상으로 바닷속에 가라앉게 됐다. 때마침 벌어진 미군의 공습으로, 기지의 동료들은 그를 구조하지 못했다.
바다에 가라앉은 미노루는 10시간 이상을 어뢰 안에서 살아 있었고, 결국 심해의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질식사했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불과 20일 전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9월에 이르러서야 수습돼 화장됐다고 한다.
한때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년은 체제의 폭력 아래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침묵은 죽음으로 영원히 이어지게 됐다. 만약 당시의 제국 일본이 미노루와 같은 청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였다면, 무모한 침략전쟁과 비극적인 패전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청년 미노루가 침묵 속에 갇혀 펼치지 못한 꿈을 생각하며, 청년 정치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인용된 미노루의 글들은, 미노루의 유족들이 그의 일기장과 편지를 책으로 엮은 <와다츠미의 목소리 사라지는 일 없이>(わだつみのこえ消えることなく, 1967, 筑摩書房)에서 담아온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 Daum 백과
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의 정치가. 19세기 후반 일본이 개화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체제와 기반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하급 무사 집안 출신으로, 22살 때 영국으로 유학하면서 근대화 된 서구 문물에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등 근대적 제도의 도입에 기여하면서 고급 관료로 성장했고, 메이지 정부의 헌법제정과 양원제 의회 수립, 내각 구성을 주도했으며,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국제 관계를 주도하며 결국 한반도의 병탄에 앞장섰고, 1905년 을사늑약 후에는 초대 통감으로서 조선 침탈의 주역이었다.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한국의 청년 안중근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했다.
초기 생애
이토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 가문에 입양된 사람이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같은 인물과 알게 되었는데 기도는 메이지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시기 이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기 전인 1863년 이토는 우연한 기회에 조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발탁되어 서양의 해군학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갔는데, 1년의 유학 기간 동안 영어를 익힌 것이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
정치 활동
이토는 개화파로서 일왕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거쳤다(→ 메이지 유신).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 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국가 제도 개선에 앞장설 수 있었다.
이토의 생애는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결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이로써 그와 마찬가지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1881년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정부를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하게 했다. 1889년 일왕은 헌법 제정을 선포했고 1890년 의회가 수립되었다. 입헌정부의 수립에 대한 준비작업은 매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헌법 제정과 의회 구성에 기여
당시 메이지 정부 내에서 가장 비중있는 인물이었던 이토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거의 1년 6개월 동안 당대의 유명한 헌법학자들에게서 헌법을 공부했다. 이토의 작품인 <메이지 헌법>은 민권과 의회의 권한 등에 여러가지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독재정치를 영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시 메이지 지도자들이 대부분 무사 출신이었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감안하면 기본권 보장과 의회 수립을 명문화한 이 전례없는 조치는 진보적·계몽적인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이토의 영향력은 1890년대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1890년대 중반에 그는 총리로서 2가지 중대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첫째는 영국과 조약(1894)을 맺어 1899년까지 일본 내의 영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을 철폐키로 한 것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 내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은 1899년 이후 일본법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이 선례가 되어 일본은 다른 서구열강과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둘째 성과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거둔 승리였다. 이 2가지 성과는 일본이 비(非)서구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고 동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좀더 비중있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토는 1901년까지 4번이나 총리가 되었으나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반도와의 관계
이토는 1884년부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청나라와 외교전 끝에 텐진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했다. 1900년대 초,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는 등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자,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한 끝에 1904년 러일 전쟁을 벌였고,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감독권을 획득했다.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12월에 조선의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주도면밀하게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할 계획을 수립, 근대식 교육, 경찰, 교통 제도 등을 도입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한 것이 밝혀지자, 이토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내정과 외교, 군권까지 장악했다. 그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서 항일 활동이 전면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토는 보안법, 신문법 등을 제정하여 항일 활동의 전파를 막았고, 군대를 폐지했으며, 일본군을 주둔시켜 강압적인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결국 이토가 강압적으로 추진한 조선 내의 여러 정책은 1910년 한일강점의 결과를 낳었다.
죽음과 평가
이토는 1909년 통감에서 물러나 일본 추밀원 원장이 되었으며, 러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10월 26일 하얼빈을 방문했다. 이날,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安重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동하는 이토를 역두에서 저격했다. 안중근은 이토에 대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대한제국 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으며, 양민을 학살하고 이권을 약탈하는 등 동양 평화를 해치는 인물이라는 죄상을 나열하고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토는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 실행 가능한 일본의 헌법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그 공적을 인정받고 있으나, 지사형이라기 보다는 타협형이었으며 실무에 밝은 사람이었다. 사생활이 문란했으며, 허장성세로도 유명한데, "술이 취하면 나는 미녀의 무릎을 베고 쉰다. 술이 깨면 나는 권력의 고삐를 힘차게 잡아쥔다"고 하여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기틀을 만들고 동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구체화하고 실행한 것도 이토였다.
통감부로 향하는 이로 히로부미 (앞쪽)
ⓒ 東京合資會社冨山房/wikipedia | Public Domain
[김세곤의 세계 문화 기행] 일본 역사기행(21)-메이지 헌법(1) (getnews.co.kr)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2022.03.07 07:3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82년 3월 14일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인솔한 ‘유럽헌법조사단’이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다. 이토를 포함한 10명은 5월 2일에 이탈리아 나폴리 항에 도착하여 5월 16일에 독일 베를린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프로이센 헌법학자 루돌프 그나이스트와 면담 후 5월 25일에서 7월 29일 사이에 그나이스트의 제자 알베르트 모쎄에게서 헌법관련 강의를 들었다.
조사단은 8월 8일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보수적 사회정책론을 주장한 로렌츠 폰 슈타인을 만났다. 이윽고 이토 일행은 파리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빈으로 돌아와서 9월 18일에서 10월 31일까지 슈타인의 강의를 들었는데 보통선거제와 정당 정치의 폐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어서 조사단은 베를린에서 11월 14일에서 1883년 2월 9일까지 모쎄의 강의를 들었다. 3월에는 런던에 도착해 5월까지 머물렀으며, 6월 26일에 나폴리를 출발하여 8월 3일 요코하마에 귀향했다. 1년 5개월 만이었다.
이토는 유럽 현지 조사를 통해서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국의 입헌군주제나 프랑스의 공화제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주권을 강화해야 대국굴기·부국강병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토는 헌법 제정을 위한 준비로써 각종 제도의 개혁부터 단행했다. 먼저 1884년 7월에 화족령을 제정하여 사족 출신의 메이지 공신들을 화족에 포함시켰다. 화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원(貴族院)에서 국민이 선출한 중의원(衆議院)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화족에게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등급의 작위가 세습적으로 수여되었다.
1885년 12월에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내각제도가 발족되었다. 총리대신이 내각을 주도하며 각 성의 대신을 통제해 정무의 통일성과 능률을 강화하도록 했고, 각 성은 외무·내무·대장·육군·해군·사법·문부·농상무·체신 등으로 이루어졌다. 초대 총리대신은 하급 무사출신에 불과하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발탁되었고 각 성의 대신은 사쓰마·조슈 출신이 거의 차지하였다. 이어서 1886년에는 관리임용시험을 제도화했고, 관리 복무규정도 정해졌다. 아울러 궁내성을 내각에서 분리했다. 황실과 정부를 명확히 구분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6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헌법 초안의 기초 작업을 진행했다. 초안 작성에는 이노우에 고와시, 이토 미요지, 가네코 켄타로 등이 참여했다. 정부의 법률 고문인 독일인 뢰슬러와 1886년에 헌법 관련 법률 고문으로 초빙된 독일인 모쎄가 법률 자문을 하였다.
헌법 기초 작업을 주도한 이노우에 고와시는 1887년 초에 갑안, 을안을 작성했으며, 뢰슬러의 「일본제국 헌법 초안」도 탈고되었다. 1887년 6~7월 중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고와시, 이토 미요지, 가네코 켄타로 등은 가나자와 현 나쓰시마(夏島)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별장에서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한편 이토는 헌법 심의에 집중하기 위해 1888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1888년 4월에 완성된 헌법 초안은 헌법 심의를 위해 설치된 천황의 고문 기관인 추밀원에서 비밀리에 심의가 진행되었고 메이지 천황도 심의에 모두 참석하였다.
1889년 2월 11일에 37세의 메이지 천황은 내각 총리대신에게 수여하는 형식으로 「대일본제국헌법」(일명 메이지 헌법)을 공포하였다. 천황이 공포하는 형식을 취한 흠정헌법이었다.
이날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의 그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이토에게 최고의 훈장을 내렸다. 그리고 이토가 1909년에 죽을 때까지 천황의 신뢰는 계속되었다.
메이지 헌법이 공포된 날, 일본은 나라 전체가 축하로 들뜬 분위기였다. 의례용 양복이나 모자, 구두 주문이 쇄도했고 일장기는 동이 날 정도였다. 숙박업, 마차영업, 요리 집은 '헌법 특수'로 큰 재미를 봤다. 그런데 해외에선 '헌법 내용도 모르고 열광하는 일본인들이 우스꽝스럽다'고 비꼬기도 했다. 실제로 메이지 헌법은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그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참고문헌)
o 구태훈 지음, 일본제국 일어나다. 재팬리서치 21, 2010
o 함동주 지음,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창비, 2009
도쿄 우에노 공원의 박사 왕인비 안내판. 사진=김세곤 제공
도쿄 우에노 공원의 박사 왕인비. 사진=김세곤 제공
[김세곤의 세계 문화 기행] 일본 역사기행(22)-메이지 헌법(2) (getnews.co.kr)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2022.03.21 11:00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89년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에 메이지 천황은 ‘대일본제국헌법 (‘메이지 헌법’으로 불린다)’을 발포(發布)했다. 메이지 정부는 1873년 2월 11일을 기원절로 선포했다. BC 660년에 즉위한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은 전설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기원절로 삼은 것이다.
이 날 천황은 발포식장에서 내각 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헌법을 하사했는데 헌법은 천황이 국민에게 내리는 선물이었다. 메이지 헌법은 7장 76조로 구성되었다. 헌법의 기본원칙은 천황주권이었으며, 신성불가침한 천황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집중되었다.
천황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헌법 조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
만세일계(萬歲一系). 이는 태양신의 후손 진무천황이 BC 660년부터 일본을 다스린 이후 천황의 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2천 년 이상 이어져 일본을 통치해 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122대 메이지 천황(1867~1912)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고 왕권신수설을 강조한다. 한편, 2019년 5월1일에 즉위하여 레이와(令和) 시대를 연 나루히토(德仁) 천황은 제126대로서 메이지 천황의 4대손이다.
제2조 황위는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실의 남자 자손이 계승한다.
메이지 정부는 헌법 공포와 동시에 황실과 황족에 대해서는 황실의 제도와 구성 등을 명시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제정했다. 그런데 헌법 2조는 천황은 남자만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런 남성 우위 사상은 나루히토 천황 즉위식에서도 나타났다. 부인 마사코는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019년 4월 29일 “즉위식 여성 참석 불허는 일본 황실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할 수 없다.
이는 천황이 ‘살아있는 신’, 신도(神道)의 제사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일본 열도를 평정하고 손자인 니니기에게 청동거울과 검, 곡옥(曲玉), 즉 ‘3종 신기(神器)'를 주었다. 니니기의 직계후손인 초대 천황 진무천황은 3종 신기를 받았고, 지금도 천황의 상징이 되었다.
5월 1일에 즉위한 나루히토 천황도 ‘3종 신기’를 물려받음으로써 왕권 계승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수천 년간 존재했다는 ‘3종 신기’는 단 한 번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한편, 일본인에게 천황은 지금도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다. 일본인의 혐한(嫌韓) 감정이 촉발된 것도 한국에서 천황의 사과 요구가 나왔을 때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질서정연하면서도 속으로는 복잡하고 이상한 나라일본과 한국이 잘 지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이며 통치권을 총괄하며,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
재5조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 입법권을 행사한다.
제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그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하며, 여러 조약을 체결한다.
제14조 천황은 계엄을 선포한다.
제57조 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법률에 따라 재판소가 이를 정한다.
프러시아 헌법을 모델로 한 메이지 헌법은 이처럼 천황에게 국가원수, 외교권, 계엄권, 의회의 개폐와 해산권, 사법권 그리고 육해군 통수권이라는 주요 권능을 부여했다.
서양식 군복에 칼을 차고 수염을 기른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가 전국에 유포되었고, 교육칙어(1890년)와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로 국민은 천황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다.
대일본제국 헌법을 발포하는 메이지 천황 .사진=김세곤 제공
이처럼 일본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태어났다. 하지만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메이지 헌법은 제국주의 헌법이 되고 말았다.
첫댓글
<인간어뢰 카이텐(回天)특공대원이었던 와다 미노루(和田稔) 소위가 남긴 수기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국가에 의해 소모품 취급을 받았던 청년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출전 후 인간어뢰에 갇혀 숨지기까지, 자신이 학교와 군대에서 느낀 감상을 무려 36권에 달하는 대학노트에 기록했다.>
<청년 미노루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사주의로 물든 중고등학교 교육을 비판하고,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지는 천황숭배에 의문을 표한다. 미노루가 품고 있던 사명감은, 그가 고등학교 입학 3일 뒤에 쓴 일기에 드러난다.>
<"시대의 풍조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현대 전체주의의 강제적 해석에 부화뇌동하는 것, 저급한 군사주의에 가담하는 것은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적으로, 일본민족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에 참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0년 4월 17일)>
해당 기사의 옮겨온 단락에서도 보시다시피 '미노루'라는 이름 '일본민족의 사명'이라는 언급만 제외시켜 놓고 당시 일제 치하 조선의 청년들의 고민과도 어떤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바라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열망이 국적을 떠나서 마음으로 전해 오는 듯만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민족의 고통과 희생에 대해 죄과를 물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들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인지 미노루란 이름의 일본 청년의 고뇌가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고뇌와도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일진대 당시의 빛바랜 사진속 여동생과 함께 찍은 앳되고 순수해 보이는 모습을 보아하자니 당시 나라는 달리 할지라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조선의 청년들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과도 겹쳐 져서는 마음이 아려만 온다 할 것입니다.
<이토는 유럽 현지 조사를 통해서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국의 입헌군주제나 프랑스의 공화제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주권을 강화해야 대국굴기·부국강병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토는 헌법 제정을 위한 준비로써 각종 제도의 개혁부터 단행했다. 먼저 1884년 7월에 화족령을 제정하여 사족 출신의 메이지 공신들을 화족에 포함시켰다. 화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원(貴族院)에서 국민이 선출한 중의원(衆議院)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화족에게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등급의 작위가 세습적으로 수여되었다.>
며칠전 일본티비에서 기자가 태평양전쟁때 참전했던 일본군 할배(93세)에게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묻자 이런 말을 하더군요.
그 시대엔 천황이 모든 것이었다. 풀한포기, 자갈 하나도 천황의 것이고, 우리의 목숨도 천황의 것이었다.
천황이 공격명령하면 우리는 그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걸 이제와서 우리들한태 뭐라하지 말아달라.
나치전범 아돌프 아이힌만과 너무도 똑같지 않나요?
나는 상부의 지시에 충실한 것뿐이다~~~
그냥 생각나서 몇자 적었습니다!
<이토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 가문에 입양된 사람이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토는 개화파로서 일왕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거쳤다(→ 메이지 유신).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 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국가 제도 개선에 앞장설 수 있었다.>
@포퍼엔마스
메이지 유신 지사들 중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경우에는 실인즉 영국의 책임내각제를 주장했었고 그 안건에 대해서도 당시 실력자들끼리 논의도 없지 않았었다고 전해집니다만 오쿠보의 암살과 함께 자연스레 좌절되고 경제 분야는 영국에서 군사제도와 정치제도는 독일 당시 프러시아로 부터 도입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책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프랑스의 민주 공화정은 차제하고서라도 영국식 책임내각제만 도입했을지라도 당시의 파쇼적 군국주의 흐름은 물론하거니와 현재의 일본 정치가 저렇게나 망가졌을 것인지 아울러
일본의 천황?제가 1300여년 이상 내려 왔다지만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고서는 천황은 허울 뿐 실질적인 힘이 없었던 고로 막부를 실권으로 부터 물러나게 할 당시야 말로 제대로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최적기였다 할 것으로 만일 그러했다면 혹여 일본으로서도 동북아로서도 다른 역사 다른 시간대를 열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 것인지 ... 이미 지난 일이라지만 일본의 현재적 실패까지와도 연결되는 대목인지라 이에 참조를 바라며 옮겨와 보았습니다.
좋은글입니다. 저는 미노루는 읽고 이토히로부미는 그냥 흩어봤지만 제가 생각하는것은 우리가 일제 미제 한국 북한 이라고 부를때 두가지의미가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대로 국가와 국민을 칭하고 하나는 그 지배세력과 기득권을 칭한다고봅니다. 그리고 시기와 장소 사안에따라서 뭉뚱거릴때도있고 또 분리해서 칭할수있으면 하는생각도있습니다. 헛소리같다는 생각도덥니다. 내코가 석자인데 무슨소리를 ......
한국의 청년문제는 주권재민의 원칙하에서 바라봐야만되지만 각 세력들의 이용가치와 용도에 따라서 분리 분할 대립등으로 이용되었고 이는 노동자. 민중 여성들에대한 차별과 착취가 계속되는한 이어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최소한 정치세력이 각 어떠한 정치적이념과 정책을 가지더라도 속임없이 국민들에게 정책을밝히고 책임지는 쟈세로 국정에임하기전에는 없어지지않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