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정치로 퇴행하는 한국 정치
[시평]
2026. 7. 30. 11:59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전 한국정치학회장
정당은 갈등 다루는 공적 제도
권력투쟁用 사적 조직과 거리
근대 민주주의의 값비싼 결실
양당 행태는 문명의 궤도 이탈
19세기 산업사회 반영한 체제
다양한 21세기 담기에 역부족
오늘날 한국의 정당정치는 근대 민주주의가 어렵게 구축해 온 문명의 궤도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파벌정치로 회귀하는 듯하다. 한창 진행 중인 거대 양당의 당 대표 선출 과정과 당내 갈등을 지켜보면, 정당의 존재 이유인 ‘비전’과 ‘정책’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계파 간 권력투쟁과 특정 인물을 향한 충성 경쟁이 대신하고 있다.
본래 정당은 단순히 어느 편이 정치권력을 차지할 것인가를 다투는 사적 조직이 아니다. 사회 안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정치의 언어로 번역하고, 갈등을 제도 안에서 조정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당에서는 국가의 미래를 둘러싼 정책 경쟁보다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세력 결집이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당이라는 이름 아래 파벌만 남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실 공동의 가치 추구가 아니라 편을 나누는 파벌 정치는 정당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문제다. 17세기 후반 근대 정당이 탄생한 영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왕권을 옹호한 토리(Tory)와 의회 권리를 강조한 휘그(Whig)는 초기엔 집단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파벌에 가까웠다. 토리는 아일랜드 무법자를, 휘그는 스코틀랜드 소몰이꾼을 뜻하는 멸칭에서 비롯됐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조롱과 적대가 심각했다.
근대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취는 바로 날것의 파벌 경쟁을 정당이라는 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정당은 갈등을 제거하는 조직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장치였다. 서로 다른 세력이 무한 충돌 대신 공동 규칙 속에서 경쟁하도록 만든 정치적 발명품이었다. 민주주의 발전은 갈등 없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갈등을 생산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당은 이러한 문명적 기능을 잃어간다. 파벌과 계파 중심의 정당은 공동체를 위한 고민이 아니라 강성 지지층의 이해를 정치에 동원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정치적 편향과 적대감을 증폭시키고, 정당은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는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진영 결속을 강화하는 소수 파벌의 공간이 되었다.
분노와 대립이 일상화한 한국 정치에서 시민이 느끼는 것은 깊은 피로감과 무력감이다. 주요 정당들이 사회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국가적 과제 해결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과연 현재의 정당 체제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고 있는가”와 같은 근원적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진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민주주의가 파벌을 정당이라는 제도로 문명화했다면, 21세기 민주주의는 정당을 넘어 시민을 정치의 진정한 주체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먼저, 권력을 독점하고 사유화하는 정당 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소수 지도부와 특정 계파가 공천권과 의사결정권을 장악하는 폐쇄적 체제를 개혁하고, 공천 과정과 당내 의사결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다당제적 요소를 강화해 거대 양당 중심의 독점 구조를 완화하고, 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시민의 요구가 정치 과정에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적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계 자체도 확장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정당 중심 민주주의는 현대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모두 담아내기 어렵다. 오늘날 시민들은 정당을 통하지 않고도 온라인 네트워크와 시민사회 조직을 통해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다. 사회는 이미 변했는데, 정치제도만 과거의 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는 ‘정당 중심 민주주의’에서 ‘정당을 포함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정당은 정책을 책임지는 주체이지만 다양한 시민 목소리를 독점하는 유일한 제도적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회, 숙의형 공론장, 시민발의와 같은 새로운 제도를 통해 시민이 국정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통로를 넓힐 때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마주한 문제는 “정당이 민주주의의 결정체”라는 오래된 신화 때문인지 모른다. 파벌과 계파의 결집체로 퇴행한 정당을 넘어 시민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시대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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