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시간을 내쳐 달려 바다가 가까운 첩첩 산골 마을 주민행복센터를 찾아갔다. 어느 대학의 농촌활성화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마을리더 역량강화 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강의실이며 숙박실, 휴게시설을 갖춘 그 행복센터는 몇 개 마을이 힘을 합하여 정부 지원을 받아 주민 복지를 위한 개발 사업을 수행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 시설을 이용하여 농촌 체험을 원하는 여행객도 받고 오늘 같은 교육생들도 받는다고 했다. 이틀 밤을 자며 사흘 동안 진행된 교육은 ‘주민주도형 마을 만들기’며 ‘농촌정책의 방향’, ‘마을기업 운영하기’, ‘이야기기가 있는 마을 만들기(스토리텔링)’, ‘마을 축제 프로그램 기획’, ‘마을개발사업 우수사례’ 그리고 마을 만들기에 앞장을 서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낸 실무 책임자들이 들려주는 체험 사례들로 구성되었다. 우리 마을 모습에 강의 내용을 얹으며 듣다보니 우리 마을 실정과는 거리가 먼 것도 있지만, 귀가 솔깃해지게 하는 것도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별로 겪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일도 없는 내용들도 있어, 그런 것들은 봄날 새순 같은 호기심을 일게도 했다. 듣는 것으로만 못 미더워 차곡차곡 적기도 하고, 카메라에도 부지런히 담기도 했다. 내가 왜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이런 강의를 듣고 있는가. 강의 중의 쉬는 시간에 문득 내 모습이 돌아보였다. 내가 한촌 사람이 되어 살고 있지 않다면 이런 강의를 들을 기회도, 필요도 물론 없었을 것이다. 일여덟 해 전 한촌을 찾아올 때는 이런 일을 해야 될 줄을 상상도 못하고 안했다. 오직 산이며 물과 더불어 새소리며 풀꽃과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바란 대로 그렇게 살아왔다. 한촌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풀이며 나무며 새며 바람이며 그런 자연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사는 조그만 마을도 발전해 나가는 세상의 일을 따라 모습이 변해갔다. 지하수로 사는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고,숲에 신식 운동기구들이 놓이고, 풀숲 흙길은 시멘트로 덮였다. 어느 날 나라에서 얼마간의 예산을 줄 테니 마을이 더욱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 했다.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라 불리는 낯선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왔다. 회의가 재미있게 잘 진행되도록 돕는 사람들이라 했다. ‘주민주도 마을 만들기 농촌현장포럼’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마을회관 방 안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먼저 지원센터 책임 교수가 인사말과 함께 ‘주민주도형 마을 만들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했다. 주민이 주도하고 전문가가 참여하는 현장 포럼을 통해 마을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라 하며, 주민이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진행자는 어떻게 파악했는지 마을의 실태에 관한 자료를 소상히 준비했다. 마을을 알고 왔다는 것이다. 퍼실리테이터들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을 몇 조로 갈라 재미있는 게임도 하고, 마련해준 점심도 먹어가며 날이 저물도록 마을 역사 돌아보기, 마을 지도 그려보기, 마을과 이웃의 자랑거리 찾아보기 등으로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어느 날은 마을 사람 모두 차에 태워 잘 가꾸어진 마을을 찾아가 견학도 하게 했다. 또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와 마을의 장점과 단점, 필요한 일이며 바라는 일에 대해 생각해서 적어보고 발표도 해보라 했다. 이렇게 현장 포럼의 과정이 진행되어 갔다. 다음은 누가 ‘마을 만들기’ 교육을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사업을 추진해나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 했다. 그런데 ‘마을 만들기’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나에게 눈길을 모았다. 나는 이 마을에 오래 산 사람도 아니고, 모두가 하고 있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산이 좋고 물이 좋아 살고 있을 뿐인데 왜 나에게 눈길을 주는 걸까. 한여름 겨울외투같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그런 교육을 제대로 받아 무언가를 해낼 수 있고 나중에 문서라도 닦아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했다. 왜 없을까. 다른 이들을 두고 나에게 거는 기대가 치수 안 맞는 옷처럼 거북했다. 나는 거저 이 마을에 조용히 살려고 온 사람이 아니냐고 해도, 혼자 조용히 살기만 하면 되냐며 함께 잘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다. 사람들의 기대를 끝내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나도 나그네가 아니라 이 마을 흙에 살 섞으며 사는 사람 아닌가. 딴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는 나에게 걸어주는 기대가 고맙기도 했다. 마을을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곰실댔다. 그것은 곧 내 삶의 터를 위한 일, 바로 나를 위한 일이라는 상념에 이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예, 교육 제가 가겠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마을 만들기’에 애써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두 사람 이상 참가하게 되어 있는 지침에 따라 한 이웃과 함께 먼 길을 달려가서 다른 지역 참가자들과 더불어 사흘 동안의 교육을 받고 왔다. 이제는 그 교육 내용을 실천해 나가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힘을 보태어 삶의 터가 더욱 살기 좋은 터전이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한촌살이의 보람이 아니랴. 마을을 어떻게 꾸며볼까. 살기에 편하고 편리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이다. 편리도 좋지만 도시는 도시로서 살아가야 길이 있고, 시골은 시골답게 살아갈 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걸 두고 어떤 이는 ‘어메니티(amenity)’라는 말을 했다던가. 그런 것을 위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힘과 지혜를 모을 일이다. 그리하여 더욱 싱그러운 물과 산을 볼 수 있고, 더욱 청랑한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할 일이다. 그렇게 한촌을 살아볼 일이다.♣(2018.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