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짙어가는 계절의 길목, 부산에서 가까운 산을 찾았다. 조만강 하구 조만포에서 시작하여 금병산(242.6m) 생태숲길을 지나 옥녀봉(362.5m)에 올랐다가 풍상산(227.3m)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일교차가 큰 날씨는 가을과 여름의 분위기를 동시에 전해 주었다. 숲이 짙은 산길을 나와 조망이 탁 트인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광활했던 평야와 갯벌이 공단으로 바뀌고 있다. 새삼 가을을 타는 듯 허허로운 풍경이다. 금병산 생태 숲길로 명명된 이 길은 분위기가 팽팽하기도 하고 아늑하기도 하다. 작은 옥녀봉부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고층 아파트를 가소롭게 내려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풍상산 능선은 칼날처럼 솟아 둔치도와 서낙동강을 제대로 볼 수 있는데 '부산의 차마고도'라 불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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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옥녀봉 능선에 있는 전망 바위에 서면 진해 천자봉과 가덕도, 지사동 아파트 단지와 둔치도, 서낙동강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양쪽으로 탁 트인 조망 속엔
가덕도, 서낙동강, 둔치도가
광활한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발밑 작은 돌들이 서걱대는
좁디좁은 능선길에선
마치 선 위를 걷는 것 같다
■잘 가꾼 금병산 생태 숲길 조만강이 서낙동강과 만나는 조만포에서 옥녀봉 산행을 시작한다. 이번 산행의 최고봉이 김해 장유동에 있는 옥녀봉이지만, 산길 대부분은 부산 강서구다. 강서구가 특별히 금병산 길을 생태 숲길로 정해 관리하고 있어 산행하기가 좋다. 이정표도 많고, 산길의 잡풀도 최근 정리를 해서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
이번 산행은 조만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바로 계단을 올라 산길로 들어선 뒤 헬기장~127봉~금병산~옥녀봉 삼거리~옥녀봉~태정고개~작은 옥녀봉~전망 바위~무금티 고개(생태 통로)~풍상산~253봉~송전탑~이조참판 문화 유공 비~풍진식품기계~지사산단 입구 정류장까지 9.9㎞를 5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조만포는 녹산수문이 생기기 전에 김해 장유와 녹산, 가락을 연결하던 나루터. 김해 주촌면 금음산에서 발원한 조만강이 서낙동강과 몸을 섞는 곳이다.
철계단을 성큼 올라 산길로 들어선다. 발파 소리에 놀라지 말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부전~창원 간 복선 전철용 터널을 뚫는 모양이다. 잠시 된 숨을 쉬며 올라가니 널찍한 광장이 나온다. 헬기장이다. 가동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는지 이정표가 서 있다. 본격적으로 능선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아름드리 산벚나무가 있다. 벚꽃이 피는 계절도 아름다웠겠지만,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늙은 벚나무도 늠름하여 경외심이 든다.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걷다 보니 작은 돌탑이 있다. 그 위에 또 어떤 이가 작은 유리에 든 관음보살상을 올려놓았다. 한 떨기 외로이 핀 구절초가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금병산은 별도의 정상석이 없다. 산꾼이 달아놓은 표지로 정상을 확인한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잦아들고, 계절을 품고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 땀을 식혀 줄 뿐. 여름내 소나무에 오른 담쟁이도 빨갛게 계절에 순응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그 옛날의 바다 옥녀봉이 2.14㎞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고 걷다가 스마트폰 지형도를 확인하니 실제로 그렇게 멀지 않았다. 이내 도착한 옥녀봉 삼거리에 있는 안내판을 확인하고서야 그 이정표에 왜 그렇게 써 놓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옥녀봉은 실상 '작은 옥녀봉(332.3m)'이었다. 지형도상 옥녀봉은 삼거리에서 '길 없음' 방향으로 5분쯤 올라가면 있는 봉우리. 삼각점도 있어 여기가 이번 코스 최고봉임을 확인했다.
굳이 작은 옥녀봉을 옥녀봉이라고 소개한 강서구의 속뜻은 잘 알 수 없지만, 모든 제도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세상사다. 옥녀봉 정상을 확인하고 삼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태정고개를 지나 작은 옥녀봉에 오른다. 곰티고개 쪽으로 길이 잘 나 있어 가 본다. 이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 여영산악회 김태영 회장이 전망바위(옥녀바위)로 안내했다. 최고의 조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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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산행 도중 만난 빨갛게 익은 망개나무 열매, 용담, 고고하게 핀 구절초, 철 모르는 진달래 꽃(왼쪽부터). |
봉우리 모양이 독특한 진해 천자봉과 멀리 진해만도 언뜻 보인다. 가덕도와 서낙동강, 둔치도가 파노라마로 섰고, 금정산도 있다. 발아래는 지사동의 아파트가 건물 꼭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두 보여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좋다.
미음산업단지와 지사과학단지 일대는 여전히 개발 중이다. 세산만 남기고 그 주변이 온통 공장 부지로 개발되고 있다. 언젠가 바다였을, 또 최근엔 논과 밭이었을 땅이 인간의 요구 때문에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보배산 자락 채석장도 산을 많이 파먹어 들어갔다. 아쉬운 풍경이다.
전망바위 옆 넓은 공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빨간 팥배나무 열매가 눈길을 끈다. 팥처럼 생겼고, 먹어보면 배 맛이 난다고 해서 팥배나무란다. 다시 무금티 고개를 향해 내려선다. 빨간 망개열매 옆에 철모르는 진달래가 피었다. 남쪽으로 향한 산줄기라 그런지 '후끈' 열기가 올라온다.
■서낙동강 굽어보는 '차마고도' 미음터널 쌍굴이 보인다. 풍상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미음터널 직전의 생태터널 위로 지나가게 돼 있다. 터널 위 생태통로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배수로를 따라가면 왼편 산기슭에 풍상산으로 오르는 임도가 있다.허리를 잔뜩 숙이고 가파른 임도를 오른다. 인내심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무렵 앞이 탁 트이는 정상이다. 이곳엔 가족묘가 자리 잡고 있다. 둔치도를 바라보는 전망이 좋다. 여기서부터 풍상산 정상을 지나 풍상산보다 더 높은 253봉까지는 과연 '차마고도'로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발밑에는 작은 돌들이 서걱대고, 일부 능선은 좁디좁아 칼날 위를 걷는 기분이다. 양쪽으로 전망이 트여 오직 선 위를 걷는 것 같은 상태. 산불 흔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무들의 키가 작다. 막 자라기 시작한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가는 재미가 있다. 여유를 부리다가 일행과 사이가 많이 벌어졌다.
멀리 언뜻 사람이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조금 뒤에 보니 취재팀 바로 앞에 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는데 만나고 보니 인근 아파트에 최근 이사를 와 혼자 산행 온 동네 아주머니였다. 그냥 운동이 좋아 무턱대고 산에 올랐다고 했다. 등산객이 버리고 간 은박지를 보더니 혀를 차면서 줍는다. 이럴 땐 산꾼이라는 게 부끄럽다. 253봉에서 아주머니와 헤어졌다. 왔던 길로 돌아간단다. 붉나무도 불콰하게 단풍이 들었다.
15번 송전탑을 지나자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 있다. '이조참판 문화 유공의 묘'다. 산 아래 미음동 출신인 유식 선생은 임진왜란 때 김해 읍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 선비였는데 왜군이 몰려오자 도망간 김해 부사를 대신해 성과 더불어 순국하셨다. 비는 원래 미음동에 있었는데 공단 개발로 산으로 옮겼다. 선생의 무덤엔 옷과 신발만 묻었다고 하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산에서 내려오니 미음산단이 깔끔하게 들어서 있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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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옥녀봉 고도표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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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옥녀봉 구글어스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