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산자락길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까지)
▲ 낙엽이 짙게 깔린 산들수목원약수터 해맞이동산 |
산들수목원약수터는
버드나무약수터와 수성동 사이에 자리해 있다. 약수터 이름치고는 좀 긴
편으로 단순히
이름만 봐서는 산들수목원에 깃든 약수터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런 이름의 수
목원은 여기에 없으며, 수목원 같은 시설도 전혀 없다.
어찌하여 속칭 낚시성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수질이 양호하여 마셔도 무리는 없다. |
▲ 산들수목원약수터 |
마침 주변에 있던
아저씨들이 인왕산에서 제
일로
물맛이 좋다며 1모금 권하길래 졸고 있
는
바가지를 깨워 마셔보았다. 약수터는 수도
꼭지로 물을 통제하고 있어 물을 마시려면 꼭
지를 돌려야 된다. 그러면 물이 쏴~ 쏟아진다.
물을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
는 이 땅에 흔한 약수 맛이다.
약수터 주변에는
'해맞이동산' 표석이 있는데, 해맞이에 걸맞게 동쪽을 향하고 있다. 여기서
는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린다. |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서촌, 남산,
그리고 푸른 하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수성동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늦가을 단풍이 곱게 자연산 터널을 이루며 산책의 흥을 돋군다.
▲ 자연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수성동계곡 상류 |
산들수목원약수터에서
자락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성동계곡 상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는 인왕산길에서
내려오는 산길과도 만나는데,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잡석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거의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이곳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이기도 하며 수질이 양호해 도룡뇽,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계곡이나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계곡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게 하며, 산길을 따라 1분 올라가면 인왕
산길(석굴암입구)이 나오고, 반대로 2분 정도 내려가면 수성동계곡 중심부와 그를 내세운 공
원이 나온다. |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
수성동의 상류는 3개 정도 된다. 석굴암에서 오는 계곡과 그 남쪽에서
오는 계곡, 인왕천약수
터에서 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을 통해 인왕
산의 맑은 물을 접수받아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상류 계곡들은 계곡 중심부와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계곡 역시 바위
틈의 좁은 협곡을 타고 물이
내려온다. 수량이 많으면 폭포도 신이 나고 폭포 밑에도 많은 물
이
고여 조촐히 담(潭)을 이룰텐데, 가을 가뭄이 풍년 수준이라 간신히 물만 축이는 실정이다
.
물과 흙이 있어야 될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해 폭포의 위기감을 더해준다. |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 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수성동에 물을 보태고 있었다. 이 물줄기는 거
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기에 아주 적당하
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어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나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 수성동 중심으로 내려가는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물줄기)
▲ 수성동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꾸며주는 사모정 |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이곳의 구수한 양념인 사모정이란 네모난 정자가 자리해 있다. 사모정
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달랑 1칸 크기의 아주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이다.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절
대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에도 정
자는 나와있지 않고,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허나
계
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풍경이 한층 더 살아
나는 것 같다.
그럼 여기서 수성동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
▲ 사모정 앞을 흐르는 수성동계곡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
인왕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인왕산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서울의 주
요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
略) 등에 서
울 명승지로 절찬리에 언급된 곳이다. 이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렀는데, 이
는 계곡에 있는
'기린교'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여 유래된 이
름이다.
수성동계곡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
帖), 즉
장동(壯洞) 지역에 이름난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의 '수성동'이란 제목으로 어깨를 피
고 등장한다. 여기서 장동은 효자동(孝子洞)과 청운동 일대로 북촌과 더불어 왕족과
사대부(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집과 별장을 지었던
금싸라기 땅이다. 특히 이 지역에는 인왕산과 북악
산이 빚은 절경이 많은데, 그중에 장동8경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수성동과 창의문,
대은암
바위글씨 정도만 남아있음)
수성동에 가장 먼저 집을 지은 귀족은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그는 계
곡
아랫쪽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나중에 창의문 북쪽에 무
계정사(武溪精舍)란 별장까지 장만했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란 그림
을
남기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넌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끼어있는 바위와 질감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
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격하게 찬양했다.
이 계곡은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안에 자리하여 접근성 또한 아주 착했다. 그
래서 사대부 외에도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정(宋石亭)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
의
성지(聖地)로도 명성을 날렸다. |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장안의 경승지로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은 1960년대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하여 참으로 아름답고 착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
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
기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으며, 수성동 뿐만 아니라 도심의 많은 경승지
들이 인간의 욕심 앞에 큰 고통을 받으며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깔린 채, 40년 가까이 고통스럽게 살았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질에 빼앗
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
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아파트를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우
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입주민을 싹 내보내고 2011년까지 모
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해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
철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
단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좁아진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선비와 지배층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
끼도록 했다. 그리고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추정되는 계곡 아랫쪽(기린교 동쪽)
에 관람공간을 조성해 정선의 눈으로 계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했으며,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
린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
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완전 옛날 모습은 아니며 여전히 비슷한 자리
(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계곡 관람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
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어 복원하면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 들어차
거의 불가능하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구역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이고, 주변
바
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안그
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
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복원된 것은 아니나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했고, 복원공사를 벌이는
중
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
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축내는 청계천과 달리 살아있는 계곡
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
인왕산자락길은 수성동계곡 상류를 지나간다. 이번은 어디까지나 자락길이 중심이라 그가 지
나는 부분만 살폈을 뿐, 기린교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통과했다. 수성동은 이미 20번을 넘
게 가본 곳이고 자락길 종점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었
다. |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내용 분량 관계로 본글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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