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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5월 23일 토요정례법회 ○
ㅇ 청년강연
원불교를 만나서 : 이현도 청년회장 (청년 8단) 강연
ㅇ 질문과 답변
Q. 김명선 교우님 : 예전에 기독교를 열심히 다니셨는데, 원불교를 열심히 다니는 것에 대해서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A. 이현도 교우님 : 가족간의 관계는 일단 좋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많이 반대하였다.
예전에는 원불교 전서를 어머니에게 던지면서 나 원불교 믿어, 했던 것이다.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나는 이 법이 너무나 좋으니 다니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한 것이다.
아버지는 반대를 하셨는데, 오히려 더 독실했던 어머니께서 오히려 불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하셨다.
그것을 교무님께 여쭤보았더니 교무님이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불공하라 하였다.
교당에서 밥을 먹는다 했더니 "절밥이 건강에 좋다더라" 하였고,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교당에서 가르쳐 준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물건을 보내달라고 하면 '응 교당으로 보내면 되지!" 하면서 교당이 택배를 받아주는 고마운 곳으로 되었다.
지금은 부모님과 교무님을 대면시키기가 꺼리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을 것 같다.
올라오시면 교무님을 뵙게 할 계획이 있다.
Q. 박원허 교우님 : 나는 교당에 오는데 조금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A. 이현도 교우님 : 공부심이 떨어졌을 때, 요새 쓰는 방법은 교무님과 이야기해보자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얻는 방법을 썼는데 요즘은 교무님께 여쭤본다.
나의 좌우명은,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하는 것이다.
경계가 공부거리라는 말이 있다.
좌선의 맛을 보면서 끊을 수 없듯이, 생활에서 경계가 닥치면 성장이 온다는 말을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나는 기대고 있는 것이 바로 교전이다. 그리고 교무님이다. 그래서 해답을 얻고 있다.
Q. 권도훈 교우님 : 청년회장을 맡으신 후, 그 전에는 교도로서 다니다가 청년회장으로써 다니다 보면 굉장히 많은 업무가 교당에 있게 된다. 그러면 괴리가 있게 된다.
나는 법을 믿으러 왔는데, 너무 많은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럴 때 어떻게 취사하셨는지?
A. 이현도 교우님 : 내가 법을 믿으러 왔는지 일을 하러 왔는지 헷갈린다는 말인가? 지금도 그렇긴 하다.
사실 힘들다. 학생이 공부 잘하기도 힘들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해야 하니까 한다는 생각으로 해왔다.
그리고 하다 보니까 역량이 늘었다.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그 수준에서 끝난다. 내 인생은 거기에서 끝나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일이 많으면 예전을 생각해 보고, 방법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교당에 안 빠지면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법문을 듣고 깨인다.
ㅇ 김제원 교무님 설법
현도 교우님 강연을 들으면서 뽀뽀해 주고 싶은 심경이었다.
어릴 때에 부유하게 살다가 집안이 몰락하게 되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을 보는 경험, 집안 환경의 경험,
그리고 종교를 통하여 생각되어진 것들이 현도교우님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너무 잘살고 고생 안 한 사람은 그런 것 같다. 조금만 고생이 오면 아프기도 한다.
너무 찌들어만 산 사람도 부정적으로만 살고 강한 물욕에 따라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원불교를 공부하면 자력을 갖추게 되고, 어려웠던 사람도 긍정적인 안목을 가지게 된다.
물욕을 넘어서서 베푸는 삶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우리 교리에서 얼마든지,
자력양성이나 무아봉공, 무엇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가 경험한 세계를 넘어서서 대종사님의 세계가 다가오려면, 자기를 놓아야 한다.
교무님의 말, 원불교의 주장, 하나의 관념과 사상이 아니라 내 삶에 끌어들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려웠던 사람은 물욕에 대한 집착에서 베푸는 삶으로, 긍정적인 삶으로 살게 된다.
부유했던 사람은 사은의 빚을 알기도 하고 공부삼아 자력을 양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불교 와서 부유한 것 자랑하고, 가난한 것을 원불교 교리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열린 마음이라는 것은 원만한 부처님의 인격을 갖추는데, 빨리 변화시키는 데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종교가 공포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
어떠한 죄인도 어떠한 어려운 사람도 품어 안아 주는 것이 종교인의 모습이며, 성자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는 너무나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나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투사하는 공격적인 마음이 많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공격적 마음보다는 은혜의 마음, 덕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른 사이에 세상에 많은 업을 짓게 된다.
인생의 목적이 돈과 명예, 좋은 직업, 좋은 차, 좋은 배우자였다고 했다.
가족이나 친구 공동체를 위해 내 능력을 발휘하며 자기는 다른 사람 고통보다는,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정말 행복이란 진리를 깨쳐서, 일원상자리를 깨치고 참 나를 깨쳐서 우주의 원리를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정말 큰 인생이며,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 가치 있는 삶이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구하며, 그것을 생각하고 이 자리에 앉아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초입자는 원불교 법을 적당히 하여 윤기 있게 살겠다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원불교는 함께 잘 사는 것이 나의 삶이 행복해지는 방식이라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고 알려주는 곳이다.
나를 잡고 있고, 나에 집착할수록 나의 행복은 멀어진다. 그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어떤 목사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스님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우리는 원수가 없는데 무엇을 사랑하라는 것이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거기에 묶여서, 온 바가 없는데 왔다는 데 묶여서 사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그러나 온 바도 간 바도 없는 우리의 참 자성자리, 그리고 정말 그 속에서 오고가며 내가 지은대로 받게 되는 인과의 원리,
내가 현실에 살아가면서 엄청난 은혜의 사슬 속에서, 그 윤기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고 삐딱하고 부정적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원불교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자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참 자기가 무엇이고, 참 행복 영원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대종사님 만난 보람이 있고 나와 인연된 보람이 있다. 그 사람은 여기에 투자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도안교우가, 친구라고 화요일에 친구를 불렀다. 그래서 결국은 이 교당에 오게 하였다.
친구는 회장 시키고 본인은 부회장을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인연인가.
도안교우에게도 박수 한번 쳐줄까? ^^
가장 쉬우면서도 큰 복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권선이다. 권장이다.
이것은 돈 없어도 괜찮다. 정성과 관심만 있으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돈이 없어서 원불교에 자신 있게 못 다니겠다 생각하지만 이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리 삼타원 최도화 할머니, 이타원 장적조 할머니는 그렇게 똑똑한 분이 아니다.
그러나 무서운 공덕이 있다. 여러분이 생각한 것의 수 십배 수 백배의 공덕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교화요 권선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내 능력으로 교화하는가? 아니다,
대종사님의 힘으로 한다. 내가 내 능력으로 사람들 모아서 내 사람 만들어서 장학재단 세울 것인가?
그것은 언젠가 없어진다.
소남 훈련원을 세운 분께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내가 이것을 느그들 주면 삼대를 못 간다" 하면서 훈련원을 기증하셨다.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이다. 당장 좁은 시각으로는 자식을 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잘 가르쳐 놓았다. 그 자식 중 하나가 원광대 부총장이셨던 분이다.
자식을 충분히 교육시키고, 자력을 갖추어 놓으시고 희사하신 분이시다.
나는 이 교당을 살면서, 이 교당을 살면서 한 푼, 한 푼 아껴서 사셨던 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우리가 그 공덕 속에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친구가 보내니 안 갈 수도 있다. 아니면 한번만 갈 수도 있다. 그런데 거리가 먼 데 온다.
내가 여기 있어보면, 교당 오고 싶은데 집이 멀다고 한다. 집이 사당이니, 신림이니 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천호동이라고 한다. 그 정도 거리는 우리 교당 식구들의 반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 말이 거짓말인 줄 안다.
현도교우님은 입교도 안 한 상태에서 매주 화요일에 안산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기 앉아계신 분 중에 화요일에 맘 먹으면 올 수 있는 분 있다.
현도교우보다 입교한 지 오래되었고, 거리도 훨씬 가깝고 원불교 만난지도 오래된 사람들 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마음먹기 따라 달린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에는 교당 근처로 이사를 왔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집 위치, 환경의 문제가 참으로 중요하다.
성은이가 교당 가까이 살 때 좌선 참석숫자와, 더 멀리 갔을 때 참석숫자가 줄었다.
즉 마음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의 가치를 뒤로 밀어놓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당에 너무 가까이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한다.
가까이 살면 부담스러우니까!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이미 이 법에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능력과는 다른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마음에 어찌 사은님의 위력이 영원한 깨달음이 깃들 수 있겠는가.
나는 결혼하는 사람에게 이사 가까이 하라고 한다. 그런데 멀리가 놓고는 피곤하다고 한다.
상황이 어떻다 한 것은 마음이 없다는 소리다.
환경을 누가 만드는가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결혼을 하셔도 알아서 하시기 바란다.
나는 현도 교우가 안산에서 무결석으로 온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고, 또 하나, 제대를 하고 취업을 상당기간을 못했었다.
어떻게 보면 안한 것도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그 동안에 침울하고, 원불교 회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
원불교 때문에 시간 빼앗겼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더 출가여행도 이 기회에 가겠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기어이 일년이고 이년이고 해보겠다 하는 마음, 그것은 본인의 두렷한 마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공부하지 말아라 해도 공부해서 대학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는 죽어라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는다.
아까 표현이 참 좋았다, 들뜬 기쁨,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한가하고 넉넉한 마음을 원불교를 다니는 사람은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지, 화려한 기쁨만을 쫓아서는 안 된다.
담담한 그 위에서 다양한 문화적인 것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담담함으로 충만된 기쁨을 찾지도 않으면서, 그런 감각적인 것, 문화적인 것을 쫓아다니는 것은 아직 철없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하다 보면 충만된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허령이 뜨기도 한다.
교전에 이만갑이라는 분이, 허령이 떠서 내일 비가 올지 손님이 올지도 알았다 한다.
그래서 대종사님에게 혼났다고 한다. 또 한분, 구산 송벽조 선생님이 좌선에 욕심내어 두통이 오자, 욕속심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교무님, 허령 떠서 고민이에요, 이런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허령만 떠도, 와, 나라는 것이 이런 능력이 있구나, 내 안에 자성이 있다더니, 조금만 가라앉으면 밝아지는구나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정력(定力)에 바탕한 혜력이어야, 건지 건혜가 아니다.
정력에 바탕되지 않은 혜는, 건지 건혜라 한다.
어떤 사람이 만덕산 훈련에 갔다 와서 무엇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정력이 바탕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내 안에서 차분해지고 맑아져서 알아야지,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알았다, 하면 건지 건혜라는 뜻이다.
지금은 동지로 이렇게 합니다마는 여러분 제 친구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 대기업의 곧 사장이 될 친구도 있고, 신경외과 원장으로 돈을 엄청나게 버는 이도 있다.
선생님도, 인쇄소 사장도, 죽은 이도 있다. 그런데 살아가는 방식들이 각각이며, 만나면 차이가 벌어진다.
지금은 같이 앉아있지만, 10년, 20년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인생의 철듬과 가치, 스스로 느끼는 행복은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겨우 인생의 행복이 좋은 직장 만나서 좋은 차사고, 돈 많이 벌어서 여행 다니고 토닥토닥 사는 것이 행복인가.
지금 그런 정도의 행복관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의 말로는 비참할 수도 있다.
참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진짜 행복에 대해서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거짓 나에 속게 되어 있고,
불행해질 행복에 속게 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열반하였다. 도저히 압박을 이길 수 없으니 얼마나 고민하였겠는가.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유서를 쓰고 자기 뒷산에 올랐다.
그 사람의 잘 된 것은 다 뒤로 제껴 버리고 못된 것만 들춰내는 공격적인 우리의 모습도 있고,
그 사람 개인으로 놓고 보면 그 육도 윤회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고 또 그 시비이해를 초월하는 자기를 뛰어넘는 세계에 가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학사를 통하여, 대통령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그런 시비이해를 뛰어넘어 판단력을 낼 수 있는 사람.
적당히 개인적으로 인연 있으니 오고, 양심에 참회 반성하면서 살자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 오신 모든 분들이 대종사님 법으로 큰 인물이 되고, 눈감을 때에도 정말로 후회가 보통 범부들의 삶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가치 있는 삶을 살다 죽고,
내생까지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일궈내기 위한 것이다.
아까 육신 정신적으로 변화된 것을 이야기했는데, 만약 현도 교우가 원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왼쪽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나고, 청소도 안하고, 시간만 나면 게임하고 좀더 놀려고 하고, 헌배 좌선 사경은 뒤로 미루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술 먹는 것이 죄입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다. 그래서 내가 "죄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담배 피는 것이 죄입니까, “죄이다”
그 시간, 그 돈, 에너지 주위에 은혜를 나퉈야지.
50대에 암이 걸린 사람이, 나는 매일 한 병씩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웠는데 이것이 죄가 된지 몰랐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 가치관이 단생관이요 사회적 시각을 가지면 내 말이 무리가 있다. 누구나 술 먹고 담배 피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기 몸이 자기 몸인가!
왜 자기 몸을 함부로 하는가! 돈을 거기에 쓰는가! 맑은 영지를 흐리고 어둡게 하는가. 죄이다.
어쩔 수 없이 사교상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즐긴다거나, 권장해서는 안된다.
권장하는 것이 크게 복도 되고, 크게 죄도 된다. 내가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안 좋을까봐 미워도 못한다.
황금주말에 무슨 법회를 보는가! 법회를 옮기자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교당에서도 누가 그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연애하고 노는 것이 황금인가! 공부하는 게 황금인가! 그것이 가치관의 차이이다.
운전도 마음공부이다. 쓰잘데없는 자존심! 자기의 능력과시!
택시를 빨리 모는 사람, 게임을 빨리 하는 사람이 목표가 없는 사람, 아니면 자기의 잔재주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자기 머리로 창의적인 생각을 해서 국가, 사회에 발전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주요 출현지 압구정동, 강남, 신사동. 지금도 대부분이 그렇다.
나도 예전에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 충장로에 괜히 나갔었다.
아직도 강남역가면 그런 사람들 많다. 누구는 좋은 부모 만나서 옷 잘 입고, 외제차 몰고, 좋은 아파트 사는구나,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원불교 공부 빨리 많이 하셔야 한다.
대화할 때 내 말만한다.
지도자가 되려면 소통을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처처불상 하려면 소통을 잘해야 한다.
술 먹고, 저녁에 삼겹살에 맥주에 돈 좀 있는 날은 쇠고기에 양주에.
그러면 얼굴은 붓고, 병원에 돈 갖다 주고, 요즘 그렇게 살자나요.
지금 이 중에서 고시공부나 취업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공부가 하기 싫다 생각하는 사람은 붙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하시기 바란다.
1. 공부가 재밌구나
2. 목표를 생각해 참자
3. 공부가 싫다
목표 때문에 굳이 참고 한다 해서는 기술고시나, 사법고시 공부하는 사람은 1단계로 올라가거나 얼른 포기하기 바란다.
현도교우에게 문자를 보내면, 근무할 때 아니면 즉답이 온다. 성격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마음을 배려한 것이다.
결혼 전 견성부터. 결혼을 하면 아기도 생기고, 집안일도 많아진다. 결혼하기 전에 견성 못한 사람이 결혼하고 할까요?
인연, 좋은 이야기 했다.
현도 교우는 모임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걸 다 조절하고.
아까 아버지가 사업이 부도나니깐 인연이 다 떨어지잖아요.
본인도 그걸 추구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다 떨어지듯이 본인도 친구들 사귈 때 그렇게 사귀었다는 것이다.
이용의 대상으로. 그런데 대부분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이용 당하려고 대기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충동구매.
좋으면, 예쁘면 사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사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다.
원불교는 근검, 저축 절약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아끼느냐. 쓸 자리에는 쓰는 것이다.
자기 옷, 개인적으로 이용할 인연들과는 놀러 다니면서 공중의 인연이나 학사마련은 모른체 하고.
여러분 학사 협력자를 업데이트에서 올리는데 왜 리플 안다는가! 안 고마운가?
여러분 그것을 못 넘으면 일생 약자로 삼는다.
나는 돈이 없으니 돈 낸 사람에 대해서 리플 달지 못할 정도의 심법이라면, 안된다.
나는 형편이 안 닿아도 그 사람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어야 한다.
누가 희사하면 교무님 절대 이름 내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왜그러냐, “잘났느냐, 돈 많으냐, 자랑하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무명씨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전할까? 한국사회가 교당이 발전할 수 있을까?
여러분, 돈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심법을 잘 써야 한다.
누가 공심으로 하면 박수 쳐주고, 희사심 내면 고맙다고 해주고 그래야지 뒤에서 씹고 말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여기에서 복 지으면 복이 더 많고, 여기서 업 지으면 업이 더 많다.
그 다음에 세상을 보는 눈 이야기 했는데, 약육강식 세계의 시각에서 감사와 희망의 세계로.
내가 사회 사람들 만나면 듣는 것이, 돈이 최고다, 하는 소리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
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많은 공부를 한다.
나는 여기에다가, 우리 대종사님은 우리 스승님은 목숨을 다 바쳤는데, 너희들은 많이 해라 하는 마음, 그리고 목숨 바친 당사자들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
성자들은 세상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로 보았는데, 이것을 전부 도둑놈이니 내가 갖춰야만 해,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천국과 지옥이 아닐까.
우리가 핵심으로 묶을 것은 인과와 영생의 문제이다.
영생의 안목이 뜨는가. 영생이 있는데 내가 이 생에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이생도 내생도 달라진다.
현도교우가 변화된 오른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과와 영생에 토가 떨어지지 않으면 거기에 불신이 있다거나 하면 왼쪽에서 변화가 없을 것이다.
계속 아침에 늦잠자고 술 담배 끊지 않으면서, 너 많이 해라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사람이 되자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 되자 생각한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목표를 잡는 사람은 막연한 생각으로 밖에 안 살 것이다.
그러나 사은에 보은하는 삶으로 살 사람은 진정한 행복의 길, 무아봉공의 삶으로 인생의 방향을 속을 폭 잡고 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소원도 그 안에서 반드시 이뤄지면서 그리하여 자기가 어릴 때 꿈꾸던 소원보다 수 백 배의 일들을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질문 있으면 하시겠습니까.
ㅇ 질문과 답변
Q. 정용환 교우님 : 한참 공부하던 중에 문자를 받으면 공부 흐름이 끊기는 것이 싫어서 2분이나 3분 정도 있다가 답장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
A. 교무님 : 맞다. 좋은 질문이다.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데 어떤 요청이 왔을 때 본인 일부터 하고 문자 답장을 하는 것이다.
다시 보면, 본인 일이 급한데 어떻게 교당에 투신할 것인가. 그 생각과 똑같은 생각이다.
일단 내 입장, 내 감정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수업시간이나 강의 시간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귀찮아서, 또는 내 입장만 생각해서 뒤로 제낀다면 앞으로의 인생도 내가 먼저 배불리 먹겠다는 생각과 같다.
다른 것에 대한 배려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 절대 자기 혼자 성장하지 못한다. 죄를 지어도 같이 짓고, 복을 지어도 같이 짓는 것이다.
내가 인과의 이치를 깨치고, 일원상 진리를 깨쳐서 어떤 상황에라도 자력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이다.
좋은 일도 박수쳐주지 않으면 힘이 안 나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다.
복도 자기 혼자 짓는 것보다 함께 있을 때 권선, 권장할 때 수 백 배 더 많은 복이 된다. 그것을 몰라서 그런다.
그래서 법문에 자력은 타력의 근본이 되고, 타력은 자력의 근본이 되고.
내 힘으로 타력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내 자력도 무시하는 것이다. 내가 클 수가 없다. 그것이 이치인 것이다.
Q. 박순명 교우님 :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역량과 교당일, 본인의 일을 병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나는 아직 그럴 정도의 역량이 안 되는데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괜히 욕심내다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기반과 역량이 갖추어진 사람은 일심으로 돌아오는 것이 빠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런 정도의 일심이 안된다. 어찌해야할지. 두 가지를 같이 하는 게 좋긴 하지만...
A. 교무님 : 많은 사람들이 일단 내 자력을 갖춘 다음에 대타적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심법이 성불하면 제중을 하게 되고, 제중을 하면 성불을 하게 된다.
성불하면 제중도 된다. 그러나 마음의 기점은 반드시 제중에 잡아야 한다.
내 자력을 기점으로 삼아서 성불만 먼저 하겠다 하는 사람은 성불도 못한다.
나는 제중의 삶의 방향을 잡겠다 한 사람은 성불도 절로 된다.
즉 문자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하겠다 하는 사람은 자신의 역량이 커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조금 늦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차이가 있다. 집을 지을 때 작은 집은 금방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큰 집은 밑을 파서 기초를 탄탄히 한다.
내가 아까 단견으로 짧게 보면, 내가 일단 잘 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터 파기를 크게 하듯이, 큰 집을 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크게 놓고 보면 자타가 하나이면서, 둘이 아니다. 제중을 기점으로 하면 성불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불을 기점으로 한 사람은 성불도 못하게 된다.
내가 원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내 것만 챙기고 살았다.
나도 원불교 만나기 전에는 당장 우리 회사에서 이름 내기 위한 보은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 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공부가 어떻게 보면 너무나 크다.
제중에 근간하다는 것은, 무아에 바탕한 제중이다.
그러나 나중에 돈벌어 제중하겠다는 생각은 철저하게 유아에 바탕한 생각이다.
첫댓글 좀 늦게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전아 고맙당^^
똑같네요ㅎ 대단하시다~ 감사드려요!!^^
토요일밤이 새록새록.. 은전교우님 감사해요 ^^
동생아 고마워~^ㅡ^
감사합니다.'ㅁ'
은전교우님 정말 대단합니다. 꾸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