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가모니
그분이 오셨다.
온 세상을 비추는 분, 세상을 보호해 주시는 분
눈 먼 세상에 부패의 고통을 꿰뚫는 안목을 주시는 분.
당신은 선한 싸움의 승자가 되셨고
선업으로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셨다.
정법으로 완성을 이루셨으니
당신은 중생의 갈애를 해갈시켜 주시리라.
수렁을 건너셨어도 단 한 점의 죄도 없으시니
가우타마는 이제 굳건한 대지 위에 섰다.
대덕이여, 당신은 거룬하시니 온 세상에 당할 자 없으며,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이 세상의 법에 물들지 아니하도다.
몽매에 빠진 이 세상을 깨울 수 있는 분
지혜의 등불을 가지신 분
그 분은 당신뿐이로다.
오랫동안 고뇌를 겪고,
부패의 고통 속에서 괴로움을 받는 세상에
그 분이 오셨다.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해 주시는 치유의 왕으로서
랄리타비스타라 제23장
1. 개요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자 불교의 창시자이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를 중국에서 한자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카는 그가 속하던 부족,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카(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석존, 불, 여래 등의 10가지가 있다.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붓다라고 불린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로, 샤캬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라자' 슈도다나와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사방의 성문 밖, 즉 동문, 남문, 서문, 북문에서 각각 노인, 병자, 죽은 자, 수행자를 만나 인간의 생애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생로병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많은 수행 끝에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마지막 제자인 쑤밧다를 교화하고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쪽으론 중국, 동쪽으로 티베트와 미얀마, 태국, 베트남, 남쪽으로 남인도와 스리랑카로 전해졌으며,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다시 한국, 일본으로 퍼져서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2. 생애
일단 현존하는 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경으로 추측되는 숫타니파타 3장 대품에서 석가모니의 생애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였다. 대략을 요약해 보자면, 석가모니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출가를 어떻게 했고, 황무지에서 악마의 속삭임을 들었고, 제자에게 4가지 가르침을 베풀고 이를 가장 뛰어난 제자가 알아들었으며, 육사외도의 논리를 뛰어넘는 연설을 하고, 탐욕의 화살과 사성제, 12연기에 대해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불경에서 단편적으로 석가모니의 일생을 부분부분 엿볼 수 있고 언급되는 불경에 따라 석가모니에 대한 묘사는 조금씩 다르게 되므로, 그 중에서 더 오래된 불경에서 언급된 묘사가 실재 석가모니의 생애와 가깝고 사문유관이니 열반이니 하는 예화들은 후세의 창작이라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일본의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는 그의 저서인 <불타 석가모니>에서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여러 불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도에 앞서 항마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이 북방불교나 남방불교 모두 내용이 일치하지만, 중아함의 라마경이나 여기에 해당하는 팔리어 사본인 팔리어본 중부경전 제26경처럼 항마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깨달음에 대한 것만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경전도 있으며, 한역 중아함의 라마경이나 팔리어본에는 마을 처녀의 공양이니 강가에서의 목욕이니 길상초 보시니 보리수나무니, 마라 파피야스 이야기도 전혀 언급이 없어서 이러한 간단한 기록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마라 파피야스와의 싸움에 대한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거나 후세에 가필된 것이라 단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팔리어 성전(남전대장경)이나 한역 아함 등은 보통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석가모니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짙다"며 어느 특정한 교파의 경전에 없다고 그 예화를 후세의 첨가나 창작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에 대한 전승은 석가모니의 열반을 다룬 경전인 열반경이 한문본 다섯 종에 팔리어본과 산스크리트어본과 티베트어본까지 합치면 총 여덟 종이 달하며, 내용은 모두 비슷하다는 점에서, 불교권 전체에서 유사한 내용의 경전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를 '열반'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후대 제2차 결집(바이샬리 결집)으로 야기된 근본분열 이전의 초기 불교나 원시 불교에서도 엄연히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사상
그의 사상의 위대함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 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 경 중에서
역사학적으로 따자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브라만교의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식자에 가깝다. 브라만교의 후신인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해서 5단계로 계급을 나누고, 전생에 업(카르마)를 져서 현세에 이런 걸로 태어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장한다. 그러니 내가 현생에 그 계급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는 지금 계급이 아닌 더 높은 계급으로 환생한다든지 브라만(바라문)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의 지배층은 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해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현대에도 이러한 문화는 인도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일부 권력자들의 열성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소카 대왕 이후의 인도에서는 타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힌두교가 세를 급격히 불려 민중들을 적극 공략해 인도의 사상의 대세를 점하게 된다.
4. 호칭
흔히 부처님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데,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붓다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깨달은 성인을 일컫는다. 즉 불교에서는 원칙상 깨달은 자라면 누구든 '붓다'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으레 석가모니라는 이름을 줄여서 '석가'라고도 부르고 부처님 오신날을 2017년까지도 '석가탄신일'이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 한국 불교계에서는 오랫동안 해당 용어에 문제점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명칭을 석가탄신일에서 부처님오신날로 바꾸는 데에 성공하였다(부처님오신날 항목 참조). 흔히 석가모니를 앞부분만 줄여서 석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불교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틀린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석가는 석가모니 자신이 태어난 종족의 이름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김씨', '박씨'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성인인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불타 석가모니>를 저술한 와타나베 쇼코(渡辺照宏)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현대의 관점에서 생각한 것으로 그 시대는 '석씨' 라고 말하는 것에 개의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예로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한역본에서는 구담실달다(瞿曇悉達多), 구담(瞿曇), 고답마(喬答摩) 등으로 직접적으로 성씨를 이용해 지칭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붓다'라고도 많이 쓰는데 붓다(불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재하며 석가모니 외에 또 다른 불국토의 붓다(불타)도 있음을 들어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도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와타나베 쇼코는 주장한다.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축건태자(竺乾太子)라고 불렀는데, 축건은 천축 즉 인도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인도 왕자님'이라는 뜻이다.
불경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석가모니를 향해 질문을 할 때 석가모니를 세존(世尊)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바가반'을 번역한 단어로 인도에서는 불교 외에 다른 정신적인 위인에게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밖에 석가세존(釋迦世尊, 석가족의 큰어른) 또는 석존(釋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가족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 아내 야소다라, 아들 라훌라가 있다. 야소다라와는 16세 때 결혼했다.
후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돌아왔을 때 라훌라는 모친인 야소다라를 통해 '왕이 되려 하니 보물을(유산을)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석가모니는 즉석에서 라훌라를 출가시켜 불도를 닦게 하였다.
정반왕이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소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사촌 형제로 아난다와 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 참고로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싹쓸이 사태가 발생하자, 숫도다나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제기, 이후 승단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남은 출가할 수 없으며, 출가 시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숫도다나 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숫도다나 왕 사후 샤카 족은 석가모니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사위국)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출가한 샤카 족이 있었기에 샤카 족이 아예 멸절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증일아함경 등견품에 그 내막이 실려 있다. 석가모니가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시 코살라 국에서도 막 새로 왕위에 오른 파세나디(바사닉)가 카필라 국에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 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 족은 말리카라는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화번공주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루타카였다. 비루타카가 아직 왕자일 적에 카필라 국을 방문했는데, 석가모니가 앉을 자리에 앉았다가 "저 종년의 자식이 감히 어디를 앉아?" 라며 그를 흠씬 때려서 내쫓자 앙심을 품었고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카필라 국을 침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세 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네 번째는 카필라 국의 멸망은 결국 샤카 족이 치를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치러야 하는 과보임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이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 국 군사들이 샤카 족을 학살하자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비루다카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
비루타카 왕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증일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비루다카에게 죽은 기타 태자와 샤카 족의 여인 5백 명을 위해 설법을 베풀고 난 뒤 "비루다카는 앞으로 이레 뒤에 죽을 것이며, 나는 오늘 이후 다시는 니구류 원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곳을 떠났다. 비루다카 왕은 그 말을 듣고 이레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다가 이레가 지나서야 안심하고 병사와 시녀들을 데리고 강가에서 놀다 그곳에서 묵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비구름이 일어나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쳐서 강가에서 묵던 비루다카 왕과 그 일행은 모조리 물에 휩쓸렸고,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여래의 가르침이 의외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수행에 있어서 엄숙함이나 교조주의를 최대한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는 초기의 불교 전파에 매우 큰 강점이 되었다.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지키며 불법을 따르고 싶다"고 하니 다 허락하는가 하면,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가 출가한 제자가 발에서 피를 흘리자 모든 비구들에게 신발을 신게 하기도 했다. 또 라훌라가 탁발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숙소를 뺏겨 화장실에서 자는 걸 보고 당시 계율이던 '1인 1실'을 '2인 1실'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한 라훌라가 1일 1식을 견디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훌쩍거리자 어리거나 병든 수행자에게는 조식을 허용했다.
7. 국내에서의 인식
종교인들 다수가 종교를 믿는 이유가 기복신앙인(…) 한국에서는 가끔 존재감이 아미타불이나 미륵, 관세음보살 등에 밀리기도 한다. 기원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 독송은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이므로 대부분의 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 가장 많이 신앙하고 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도, '부처'하면 우선 석가모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불경을 독송하거나 할 때 석가모니를 '서가모니'라고 읽기도 한다. 석가여래 역시 '서가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이 영향을 끼쳐서 무당들이 무가를 부르며 서가세존이라고 하는 사례가 있고 원불교에서는 아예 '서가모니'라고만 쓰며, 불교 쪽 영향을 받은 소규모 종교에서도 서가모니/서가여래라고 씀이 관례로 정착한 사례가 있다.
어째서인지 무속에서는 현재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식된 것 같다. 이는 석가모니가 이 시대의 부처(현존불)라는 가르침이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을 더 높이 치기도 하는데, 실제 불교에서도 미륵이 이 세계에 내려오려다 석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더 완전한 세계의 부처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륵의 위치가 높긴 하다.
8. 서구 사회에서의 인식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이 선한 삶을 얻도록 돕는 것이지만, 고통의 근원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 세계 자체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에 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다양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했다.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붓다는 대담하게도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중략) 붓다는 자신의 사상이 독재적 승직을 갖는 무미건조하고 흔해빠진 종교로 저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신의 견해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이 최고 지상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 실체를 하나의 인격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 인격은 인간이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자기 부친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권력입니다.
- 버트런드 러셀(B. Russell). 1962. 5. 13. '사람은 왜 신을 만들었나?'
부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바로 복수심과 혐오감 그리고 원한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 20번 글
석가모니의 사상이 워낙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유 구조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아브라함계 종교가 모두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족에게 나왔듯이, 같은 어족에서 비슷한 사유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도 있는 것이 사실. 무려 3,372개의 언어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모니가 실제 모어로서 사용했던 언어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은 충분히 들 수 있다. 일단 현존하는 불경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염세주의의 대부인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인도철학의 기반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들었는데,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근본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사상이며 불교가 기반이 되는 부분이 많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허무의 종교로 보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다소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불교는 중도의 종교이고 애초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면서 이런 허무주의를 단견이라고 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설했고, 더불어 영혼의 실존 같은 평범한 종교관적 사고로 치우침 또한 상견이라고 하며 역시나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에서 공통분모가 있다면 집착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불교에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허무하니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현대에까지 불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남겼다. 이는 불교를 영지주의 비슷하게 잘못 해석한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도 서구권의 종단들은 신자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영지주의 비슷하게 결론을 내는 것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고 한다.
또한 헤르만 헤세는 아예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소재로 하는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썼으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보르헤스는 그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의 철학을 설명하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다만 이 책은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https://namu.wiki/w/%EC%84%9D%EA%B0%80%EB%AA%A8%EB%8B%88#fn-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