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중에 몇사람이 과거,학창시절 모교의 교(학)법사 이신 고,김윤주 선생님에 대한
질문이 있었음에 본인이 그동안 가족분들께 들은 얘기와 그리고, 선생님의 상좌 겸,
수제자로써 경남,양산시 웅상면 평산리 356번지소재 (도운정사) 의 주지스님 으로
태고종 종단의 감찰부장및 총무원장, 종정,등을 역임하시다 입적하신 “동호”큰스님께서
생전에 들려준 일화를 대충, 더듬어 소개하고자 한다.
김윤주 선생님은 일찌기 큰스님이셨던 만해,한용운 선생님의 수제자로 조계종단에 계셨는데
일찍이 산중의 스님의 길 로는 중생계도에 한계가 있음을 아시고 대중속에서 생활불교를
전파 하시고자 결혼하여 대처승으로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경남, 진주소재 연화사를 창건하셨고 부산,소재 대각사를 비롯 전국의 이름난
대형사찰 등 에서 생활불교의 전파를 위해 마이크 없이 장시간 설법강의를 하시기로
유명한 분 이셨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 반목이 많아 스님께서 설법 하신후 수차례 테러를
당하시기도 하여 당시에 스님의 수제자인 “동호”스님(태권도및 무술의달인)께서 경호를 맡아
선생님의 신변을 지켰다고 한다. 원래 선생님의 법명은 “영봉”이었다.
일제치하 시 “청담” 큰스님과 함께 우리나라 스님 최초로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가서
그곳에서 우리불교를 알리는데 기여하셨고 귀국후에는 “청담”큰스님께서 "함께 산중 절에가서
불교공부를 하자"는 제의에 생각을 달리하시어 "청담"스님은 종단에 남아 산중 절로 가셨고
"영봉"스님은 끝내 일상으로 돌아와 속세의 대중들에게 생활대중 불교를 전파 하셨다고 한다.
현재,연제구,소재 연제구청옆 대형마트 자리가 과거엔 부산여대
(현,신라대학교 현,북구,덕천동소재) 자리였다. 6,25전쟁시 인 1953년경, 그 자리는
포로수용소 였다고 한다. 휴전협정후, 선생님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는 “이화여자대학” 이라는
명문 여성대학이 있는데 제2의 도시인 부산에 여성인재를 양성하는 여자대학이 없으매
정부의 인가를받아 현,신라대학의 전신인(당시) “국화여자 전문대학교” 을 설립하는데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 하셨기 때문에 지금의 신라대학이 현존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님은 평소 “부처님이 따로없고 꼭, 절에가야 부처가 있는것이 아니라
처처곳곳이 부처라고 하셨고, 무엇보다도 인본을 가장 중시 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중(스님)은 설은밥, 식은밥, 이라도 먹을수 있으면 행복으로 알고 만족하면서
항상, 쉬지않고 공부를 해야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과거 모교의 교학선생님을 할 당시만해도 생활이 너무 어려워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 세는데
가족들이 그 소리에 잠들지 못할까봐 큰동이(그릇)에 수건을 띄워 빗물을 받아 생활용수로
이용했고, 혹여, 식구중 누구던 일반음식물, 밥알 한 개라도 하수구에 버리면 씻어 먹였다고한다.
선생님의 수제자이신 동호스님 께선 상시로”큰스님께서 날, 볼때마다 "니 밥 먹었느냐?
밥 먹어라." 라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몰랐었는데 큰스님께서 열반 하신뒤 에야
알수있었다“ 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그 말씀이 뭠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건 다름아니고 " 공부! 하고 있느냐?"
란 말씀이라고 해 주셨다. 당시 모교에 재직하고 계실때만 해도 ”통도사“의 방장으로 계시던
”경봉“ 큰스님 께서도 평소 선생님을 알아보시고 크게 존경 하셨다고 한다.
금정구,부곡동 자택에서 새벽에 열반하시기 전에 온천장에서 목욕하시고 평소처럼, 매일 밤
좌선하여 묵,염불하시는 모습그대로 앉아 좌선한채로 열반하셨다.
당시, 조계종단에서 다비장을 거부하여 당감동 화장터에서 유골을 수습하다
”사리“ 1,000여개 가 나와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상을 놀라게할 소식 이었으나,
이 역시 불교계(조계종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언론으로 부터도 통제가 되어 보도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어언~ 십수년간, 시장을 비롯한 유명인사와
많은 불제자들이 ""사리친견"" 차 다녀갔다. 사후, 선생님은 태고종단 으로부터
” 영봉 대종사“ 라는 칭호를 받았다.
선생님의 자제중, 둘째아들(성철)은 해고32회 인데 불심이 깊어 이 후배 역시,
훌륭한 ” 법사 “ 자격을 갖추고 있으나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못해 보관하고 있는
고인의 유골과 사리를 안치할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체 부산, 부곡동 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경북,포항시,장성동 소재 그의(후배)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생님, 사후 여러사찰, 여러 스님들이 형편을 알고 거액을 줄테니 사리 몇개만 팔아달라는
제의도 수차, 있었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 유족들이 어려운 형편 임에도 고인의 참뜻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아침에 생전 선생님의 전기를 듣고자 선생님의 차남이며 고교후배,32회(성철)에게
연락해 봤더니 작년(2007년)1월말경 친분이 있는 두분의 교수들로 부터 일대기, 원고집필은
끝냈으나 책,인쇄비 1,500~2,000만원 정도를 마련하지 못해 출판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동기여러분! 금년, 음력,사월초파일 (5월12일) 에 영봉 대종사님의 사리를 친견하실 의향이
있는분은 본인에게 사전 연락하여 함께 경북,포항으로 갔으면 ~ 바란다.
선생님의 과거에 대해 본인이 아는것은 너무 미약하여 송구하나 행여나 자금이 마련되어
과거 위대하신 선생님의 "전기" 가 책으로 나오는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이 선생님이 과연,
어떠한분 이셨는지 세세히 알게되리라 본다.
그리고 ” 영봉 대종사 “님의 1,000개의 사리 중에는 ”부처님상“ 도 있다.
특이한 점은 앞서 밝힌 선생님의 수제자 이신"동호"큰스님 께서도 생전에 허리가 조금 불편해
정형외과에 갔는데 X,RAY 촬영결과 척추 등뼈에 사리가 여러개 박혀있어
병원측 에서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히 영봉스님(선생님) 의 진신사리, 바로 그 사리를 친견한 사람은 어떠한 어려운 난관도
지혜로써 해결해 준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한가지 특이한 사건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선생님의 사후 약 10 여년이 지난 뒤인데 언젠가 본인이 친견차 오전에
선생님(연봉 대종사)댁을 찾아 갔었더니 어떤 비구니(여승)스님이 와서 자기가 댁에서
"큰스님의 유골을 지키면서 신도를 증모하여 사찰과 사리탑을 세울 계획으로 왔다고 하면서
유족들에게 청하여 사모님과 함께 그 집에서 기도하면서 기거 하던중, 이틀도 채 되지않아
홀연히 떠나 가버렸는데 그 연유는 "밤마다 큰스님께서 나타나
"불순하고 되먹지도 않은것이 어디 감히 여기 있느냐? 빨리 여기서 나가지 못하겠느냐?
" 라고 호통을 치시기에 무섭고 겁이나 도저히 여기에 기거할수 없다 면서 인사후
홀연히 떠났다고 했다.
그것은 비구니 스님이 내심, 사심이 있고 수양이 바로 되지않은 상태 였으니까
아마, 그렇게 하신게 아닌가? 싶다. 우리 동기중에 선생님의 진신사리를 친견한 사람은
(신기현,양보상,차명수,장택상) 인데, 누구든지 한번이라도 친견한 사람에게는
아마~ 흔히들, 일컷는 말로 한가지 소망은 이루어 진다고 본다.
아뭏던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면 선생님 사후, 여지껏 유골과 사리를 안치할 장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고인의 차남인 32회 후배(김성철)가 아직, 능력이 모자라
원고 작업완료 상태에서 선생님의 일대기를 책으로 발간 하지못해 자세한 내용을
우리가 지금 볼수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다닐때 선생님께서 하시던 말씀! 우리 동기들은 기억나는지~ ~?
"통도사의 바위속 금개구리 이야기인데~ 그 금개구리는 마음이 착한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말씀. 말이다. 동기 여러분! 예전에 들은 사실을 기억하여 갑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걸
올리려 하다보니 들은얘기는 많은데 이젠 기억력이 쇄퇴하여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 ~
아뭏던 우리 동기 여러분들의 넓은 해량 구할 뿐이다.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학창시절을 가만히 되돌려놓고 선생님을 그려보니 다른 일반 선생님과는 많이 달랐다는 생각이 듭니다.어째튼 훌륭한 은사님밑에서 배운 우리가 자랑스럽네............^^)
훌륭한 은사님을 몰라보고 교법시간때면 명상하자고 건의해서 잠남 잣던 학창시절이 그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