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선비족 지나족과 고구려
우리 부여족이 삼국초기부터 한반도에 분포하였으나 경상좌도에 향하여 신라로 된 것과 한강 이남에 향하여 백제로 된 것은 그 위치한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이방의 강대국과 관계됨이 많지 않고 그들이 서로 다투어 싸운 것은 반도내의 작은 부락과 말갈 일본 등 작은 도적들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당시 남방 민족은 능히 우리나라 역사에 영광을 드리운 것이 없다.
오직 고구려는 열강의 사이에 있으면서 곡용(曲踊)과 거용(距踊)의 기개로 동서를 정벌하는 무력을 휘둘렀으니, 우리 고대사를 엮을 때 부여족의 주인공은 부득불 고구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장에서 특히 고구려의 대외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바이다.
고구려가 대항하던 나라 가운데 저 읍루족 말갈족 예맥족 양맥족(梁貊族)들은 불과 한두 번 공격에 곧 모여들어 우리의 지배를 받아 우리가 왼쪽으로 가면 그들도 따라서 왼쪽으로 가며,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면 그들도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며, 우리가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가기로 하면, 그들도 따라서 동쪽으로 또는 서쪽으로 가기도 하니, 즉 고구려가 신라를 치며 백제를 치며 한나라를 치는 전역에 항상 예맥군사와 말갈 군사를 이용했음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선비족 지나족은 모두 고구려의 국경 건너 가까지 있으면서 갑자기 항복하기도 하고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갑자기 멀리 달아났다가 갑자기 가까이 나타나기도 하여 수백 년 동안이나 피나는 싸움을 계속하였던 종족들이다.
우리나라 역사가 없어져서 당시의 상황을 도저히 자세히 기록하기는 어려우나, 이제 이것을 대략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그 파란의 장려함이 족히 우리나라 역사의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장에서 특히 고구려가 선비족 지나족과 관계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다.
(1) 선비족
선비는 고대의 한 오랑캐 족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력한 무력과 용감하고 사나움은 다른 종족보다 매우 뛰어났다.
그러므로 우리 동명성왕이 나라의 기초를 열던 처음에는 곧 저 선비족을 어려운 적으로 걱정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선비족 제어할 방법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의 뛰어난 명장 부분노가 기묘한 계책을 내어 그들의 소굴을 뒤엎고 그들을 정복하여 우리 속국으로 만들었는데 다시 그 남은 무리들이 일어나 우리 민족에게 큰 근심을 끼쳤다.
제1차: 그들 종족 가운데 모용이라는 자가 일어나 우선 고구려의 형제나라인 북부여를 쳐부수니 이에 그들이 강하기 시작하여 우리의 속박을 벗어났다.
제2차: 고구려 미천왕 11년(310)에 우리 군사가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취하매 그들 종족과 영토가 비로소 서로 가까이 되었다.
제3차: 낙랑(이 때에는 낙랑이 진(晉) 나라에 속함) 도독 장통(張統)이 고구려와 싸워서 패하고, 두 군의 사람들을 데리고 모용씨에게 돌아가니 이에 우리가 그 인민을 얻더니 또 얼마 가지 않아 진(晉) 나라 평주(平州) 자사 최비(崔毖)가 모용씨를 미워하여 고구려에 도망쳐 오매 그들이 또한 토지와 인민을 모조리 차지한지라 이에 그들과 우리의 틈새가 비로소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제4차: 모용황이 속임수를 부려 환도를 습격하매 대군이 패하고 나라 임금이 피난을 떠나서 비록 우리 북방 인민과 군사들이 충성과 용기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도읍이 모두 부서지고 왕릉이 파헤쳐짐을 당하여 우리 역사상에 하나의 큰 오점을 남기었다.
또 그 3년 후에 모용황이 중국 동부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연나라 황제에 즉위하고 그 국상 모용각을 보내 우리의 남소성(南蘇城)을 빼앗으니 선비족의 세력이 하늘을 범할 기세였으며 얼마 있다가 그들이 부진(苻秦) 씨족에게 멸망 당하여 기세가 침체하였다.
제5차: 모용수가 일어나 부진족을 도리어 없애고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고 불꽃 같은 기세로 요동을 넘보매 우리 부여족의 명이 한 가닥 실 끝에 매달렸더니 다행이 우리의 절세의 무력을 갖춘 고국양왕이 일어나 이들을 물리치고 요동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민족이 다시 깨어남을 알리는 소식이다.
제6차: 광개토왕이 계승하여 그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연나라 평주를 둘러 빼고 현도를 수복하여 선비족의 세력을 크게 없앴으니 이후로부터 선비족은 우환이 끊어진 지 수백 년이 되었다.
제7차: 선비족의 별종이 우문씨가 서위(西魏)의 왕위를 찬탈하여 북제(北齊)를 병합하고 양자강 이북 수만 리를 장악하여 일시에 세력이 크게 떨치었으니 저 소위 무제(武帝:宇文覺)는 또한 영명한 군주라, 모용씨의 기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우리 요동지역을 쳐들어오다가 고구려 대형(大兄)인 바보 온달의 용맹한 무력을 만나 결국 크게 위축되었다.
제8차: 수양씨(隨楊氏: 본래 성은 普六茹氏다)가 후주(後周)의 왕위를 빼앗고 양자강 남북을 모두 통합하매 그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 고구려와 자웅을 결단할 대, 저 소위 문제(文帝: 楊堅) 양제(煬帝: 陽廣)가 그의 모든 정신을 바쳐 우리나라를 도모하다가 한왕(漢王) 양(諒)의 삼십만 무리들이 칼끝에서 애곡하였으며, 우문술의 2백만 군사는 고기밥이 되었고 오리지 우리나라 위인 을지문덕의 명예만을 역사 속에 드러내었다.
살펴보건대 수나라 양씨는 중국의 땅을 점거하여 중국인을 이용하여 우리와 싸웠으므로 단순한 선비족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그러나 그 주권자가 어쨌든 선비족이고 그들 장군에 우문술 맥철장(麥鐵杖) 등 반 이상이 선비의 종족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을 우리가 선비족에 대한 전쟁으로 보는 것이 옳다.
대개 이 때에 이르러 우리 민족과 선비족과의 투쟁은 수천 년이 이미 지난지라 그 사이에 비록 이기고 진 일들이 있으나 마침내 우세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망한다는 공식을 피하지 못하여 이후로 선비족의 영광이 동양의 역사상에 보이지 않고 있다.
(2) 지나족
고대 지나족은 고대 우리민족과 대치하여 끊임없이 싸웠던 나라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나족은 본래 우리민족과 기원이 같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각각 나라를 창립한 경우에는 그들이 비록 같은 종족이라도 부득불 갈라 보려고 하거든, 하물며 그 언어가 이미 다르고 풍속과 취향이 이미 달라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이미 까마득해졌으니 어찌 교전국 사이에 이와 같은 이상이 용납되겠는가?
아 내가 우리 역사를 살펴보건대 4천년 동안에 저 지나족과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는 오직 고구려 시대였다. 우리 후인들은 춤과 노래에 기록된 고구려와 지나의 성패의 유적을 볼 것이다.
내가 먼저 지나족이 우리나라에 불어났던 역사를 말하려고 하는데 세 시기로 나누어 관찰하겠다.
단군왕조 중엽에 기자가 그의무리 5천명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의 봉토와 벼슬을 받아서 평양 일부를 다스렸는데 이것이 지나족이 동쪽으로 옮겨온 제1기다.
그 후예들이 점차 불어나서 요동을 병합하고 각 종족들을 넘겨다보니 그 기세가 우리 부여왕조를 능가하였다. 이것이 지나족이 강성했던 제2기다.
이미 위만이 기씨를 몰아내고 기씨는 남한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한 무제 유철(劉徹)이 또한 위씨를 몰아내어 북한 일대에 사군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지나족이 널리 분포했던 제3기이다.
이와 같은 세 시기 안에 우리와 중국 두 종족의 관계는 이상 각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구차하게 설명할 바는 없겠거니와 이제 다시 우리 부여족의 발흥하고 지나족이 쇠퇴한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관찰하겠다.
위만과 유철이 악함을 주고 받은 뒤 백여 년이 지나면서 우리 부여족의 성세가 점차 커져서 동명성왕이 사군을 정복하고 대무신왕이 한의 고구려현을 쳐서 빼앗으매 한나라 광무제 유수(劉秀)가 쳐들어와 싸우다가 끝내 패배를 당하여 살수 이남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이 제1기다.
이후로 우리 민족과 지나족이 수백 년을 싸워 왔으나 어떤 큰 승패가 없었다.
조위(曹魏)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장군 관구검을 보내어 우리 환도성을 습격하여 격파하더니, 이미 뉴유(紐由) 밀우(密友)가 충의를 일으켜 옛 도읍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의 무력을 떨치었다.
이것이 제2기다.
이후로 지나족의 세력이 갑자기 약화되어 중국의 대륙 전체를 흉노 말갈 저(氐) 강(羌) 선비 등의 여러 종족에 물려주고 단지 강남의 한쪽 구석에 엎드려 있었던 까닭에 우리 민족이 그들과 3백여 년 동안 대치한 때가 없더니, 그 후 당 태종 이세민이 일어나 저 오호(五胡: 흉노 말갈 저 강 선비족을 말함)을 몰아내며 중국을 통일하고 곧 그 야심이 홀연히 생겨 우리나라를 넘보게 되어 제1차는 그 자신이 쳐들어왔으며, 제2 제3차는 장수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모두 우리의 막리지 연개소문에게 패배하여 물러갔고 또 때때로 우리를 침범하여 핍박해서 놀라기도 하였다.
이것이 제3기이다.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나라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우이다.
소년시절에 중국을 유람하면서 이세민의 사람됨을 엿보며 영웅들을 결탁하였고 장애와 고단을 두루 겪으며 외국의 문물과 풍토를 관찰한 것은 피터 대제와 같다.
각 귀족들이 태자가 어린 것을 보고 부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늘 동련히 번개 같은 솜씨로 여러 귀족들의 권한을 깎아버리며 그 병권을 독차지하고 하늘을 울리고 땅을 녹이는 군사의 위세로 동서를 정벌하매 그가 가는 곳에 당할 적이 없는 것은 나폴레옹과 같다.
왕이 적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으로 한때를 구차히 지내고자 하는 자였다.
비록 연개소문이 간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끝내 신의가 없이 몇몇 간신들과 같이 모의하고 비천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써 적국과 내통한 후에 그를 오히려 해치고자 하니,
이에 국가가 중요하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라 곧 한때 위풍 있고 당당히 분한 기세를 일으켜 흰 장검을 뽑아 왕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높이 메달고 온 나라에 호령함은 크롬웰과 같다.
아아, 연개소문은 곧 우리 광개토왕을 본받은 손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고 욕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나는 이것으로써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고 어두움을 꾸짖는 바이다.
당시 이세민이 우리 영토를 침범할 때 연개소문이 그의 원수이기 대문에 그가 선전(宣戰)의 글을 쓰는데 연개소문을 어지러이 욕하는 것은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지럽게 욕하기 위해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고려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사료가 이지러져 없어짐을 인하여 거의 당사(唐史)에서 그 자료를 뽑았던 까닭에 연개소문전은 일체 이세민의 선전서(宣戰書) 중의 말을 추려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흉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예하고,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역적이라고 하면 손바닥을 비비며 그렇다고 했다.
곧 저 이세민의 원수가 되는 연개소문의 역사를 쓸 때 오직 저 이세민의 뱉어 내놓은 것을 모아놓았으니 연개소문이 흉악한 사람이 되고 역적이 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아아, 저 눈먼 역사가들이 그 홍몽(鴻濛)한 필법으로 우리의 절세 영웅을 묻어 없애버려 우리 수천 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저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번개와 같은 솜씨에 한번 크게 혼이 난 이후로 수천여 년 동안 울렁거림을 진정하지 못하여 말이나 글로써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를 서로 전하여 왔는데,
그 모습은 천인(天人)과 같이 우러러보며 그 군사 전략은 귀신과 같이 놀랍다고 했다.
이 까닭에 석자나 되는 수염을 가친 풍채는 당나라 사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그려냈으며,
비상한 영웅으로서의 공덕은 왕안석(王安石)의 경연강론(經筵講論)에서 찬미하였으며,
깃발과 보루가 40리가 뻗쳐진 기세는 유공권(柳公權)의 잡저(雜著)에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이 장안을 순식간에 쳐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갔네.
금년에 만약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명년 8월에는 병사를 일으킬 것이네
(句麗大將蓋蘇文 去屠長安一瞬息 今年若不來進攻 明年八月就興兵)”
라고 한 호쾌한 시가 여련거사(如蓮居士)의 패담(稗談)에 실려 있으니 이러한 말들이 우리 연개소문의 실제 자취인지에 관해서는 단정을 내리지 못하겠으나 이미 그 당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아주 두려워했다는 한 증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저 이세민의 눈앞에서 아첨하던 당나라 역사가들이 비록 한 손으로 만 사람의 눈을 가리어 나라의 부끄러움을 숨기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 살펴보건대 요사이 역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 가끔 당 태종이 양만춘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갔다고 하고 연개소문과 교전한 사실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단지 당사(唐史)의 거짓된 평가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10만 대군을 몰아서 야심을 넘쳐 우리나라를 넘보다가 어찌 안시성 하나가 잘 지키는 것을 보고 돌연히 물러갔겠는가?
이때 반드시 하나의 큰 패배가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이 과연 크게 패배하였다면 양만춘이 비록 잘 지키기는 하였으나 탄환이 비 오듯 쏟아지는 외로운 성에서 수백 명의 쇠약한 군사로서 그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연개소문과의 한바탕 큰 싸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조선 정조 때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북경에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갔다.
거기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계관산(鷄冠山) 위에 계명사(鷄鳴寺)가 있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서로 전하기를 이곳은 당 태종이 고구려 병에게 크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이 산 위의 풀과 바위 사이에 몰래 숨어 묵었던 유허라 하니, 이것 또한 연개소문의 잃어버린 전사를 메워주는 것이다.
이 뒤에 당나라 사람들이 그 묵은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여 다시 쳐들어 오려고 하나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중에 우리 남방의 신라가 고구려와 대대의 원수임을 정탐해 알아내고 즉시 사신을 자주 보내어 두텁게 서로 맺었으니 슬프다 저 신라가 만년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도적을 도와 형제를 쳤으니 이것 또한 우리 민족 역사상 하나의 큰 부끄러움을 남겼도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피폐하고 저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활발하고 강한 기운을 갑자기 발현하니 이것이 제4기다.
얼마 후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 형제가 불화하여 내정이 결렬하고 또한 신라 명장 김유신이 그 기회를 틈타 침략하여 오매 남쪽 근심이 바야흐로 커졌는데, 이 때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병력이 고구려에 이르러 동명왕조가 마침내 기울어 엎어지게 되고 북방 일대가 거의 저 중국민족에 빼앗긴 바 되었더니 다행이 하늘이 내려준 위인 대중상 부자가 일어나 변변치 못한 종족으로 백두산 동쪽을 점거하고 말갈의 남은 무리를 채찍질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수복하며 다시 북진하여 흑룡강 부근을 병합하며 지나의 남은 도적들을 격퇴하고 저 등주(登州) 자사 이해고를 쳐서 목을 베니, 아아 단군 부루의 남긴 혼령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을지문덕과 연개소문의 옛 업적이 다시 어어짐은 어찌 대씨 부자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제5기다.
이 5기를 경과한 후에는 저 지나족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하나의 화살도 쏜 것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민족과 지나 민족의 관계가 이 때에 이르러 일단락을 고하게 된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후 6백 년을 지나 명나라 주씨가 일어나매 조선이 그들을 대하여 거의 조공을 바치는 관계를 가졌으나 이것은 저들의 정복을 받은 것도 아니요 또한 저들의 위세 앞에 굴복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용이 복잡한 사정 때문에 이러한 괴상한 모양을 만들었으니 이것에 관해서는 후편에서 자세히 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