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크릭-왓슨, DNA구조 발견
← DNA 이중나선 모형 앞에 서있는 크릭(왼쪽)과 왓슨
1953년 4월 25일자 발행 '네이처'지에 DNA(디옥시리보 핵산)의 이중나선 구조도가 실렸다. 본문은 1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이었지만, 20세기 최대 생물학적 성과로 아직도 남아있다. 인간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20세기 '유전자 공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연구실에서 미국 출신 생화학자 제임스 왓슨(25)과 영국인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36)의 1년 반만의 결실이었다. 생물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둘은 각종 데이터를 모아 DNA분자 모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염색체가 유전자라는 더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1915년에 발견했고, 카네기연구소는 유전 비밀의 열쇠는 DNA에 있다는 것을 1952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웟슨과 크릭의 모델에 따른 DNA 복제 가상도 →
문제는 DNA의 분자구조였다. 왓슨과 크릭 콤비는 나중에 그들과 생리의학 부문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모리스 윌킨스의 X선 결정해석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닥다리 구조'를 원용해 3차원적으로 연결시켜보자 긴 사슬 형태의 뉴클레오티드 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중나선 모형은 DNA가 단백질 합성을 지배하고 지시하는 화학적 언어인 유전 탐구의 길을 열었다. 둘은 곧바로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 에 그들의 발견을 게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잡지사측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기묘한 모형입니다. 그러나 DNA는 유별난 물질이므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싣기로 결정하는 바입니다."
[1912년] 근대 불교의 위대한 선승 경허 스님 입적
← 경허 스님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의 한 촌에서 스스로 이름을 박난주라 부르며 훈장노릇을 하던 한 노인이 조용히 일어나 붓을 잡았다.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라는 말을 남긴 노인은 붓에 듬뿍 먹을 묻혀 동그랗게 일원상을 그린 뒤 마치 모든 미련과 번뇌를 뿌리치듯 붓을 던지고 죽어갔다. 한국 근대 불교의 위대한 선승 경허 스님의 열반 순간이었다. 나이 64세 법력 56세였다. 9세의 어린 나이로 과천의 청계사에서 출가한 경허는 계룡산 동학사에서 강사로 있던 30세 때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다 마침 삼남 지방을 덮친 콜레라의 참상 속에서 교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그 즉시 발심하여 선(禪)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학사로 다시 돌아간 경허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참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그는 3개월 만에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경허는 깨달음 이후를 굳게 다지는 수행인 '보임(保任)'을 위해 천장암을 찾았다. 한평 남짓한 골방에서 1년 넘게 장좌불와를 한 경허는 한 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지냈으며 모기와 빈대, 이로 몸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생애를 통해 선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했으며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고승이었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가리켜 한국의 마조(중국 당나라의 선사)로 일컫는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 6·10만세운동 당시 서울 태평로를 메운 시위 군중들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튿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해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우, 선전부장 김참 등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3인터내셔널이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함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해방 뒤인 1945년 9월 12일 재건되었다.
[1599년] 크롬웰 Oliver Cromwell 출생
← 크롬웰, Robert Walker가 그린 초상화 1599년 4월 25일 태어남 / 1658년 9월 3일 죽음 크롬웰은 세계 열강으로서 영국의 입지를 확립시킨 정치가이다. 1642년 국왕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의 무력 항쟁인 영국내란이 시작되자 의회 진영의 유력한 장군으로 찰스 1세에 맞섰다. 1648년 국왕이 스코틀랜드와 밀약을 맺어 제2차 내전이 일어나자, 국왕군을 무찌르고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1653~58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지내며, 왕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권력을 누렸다. 죽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고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이 복고되면서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엇갈리고 있다. 크롬웰을 원칙과 자유의 옹호자이며 종교적 관용의 투사로 보는가 하면, 고집스런 독재자요 살인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독재자로서의 그의 성격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오히려 내란 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시키고 입헌주의 정부체제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에 공헌한 애국적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1921년] 장용학 [張龍鶴] 출생 1921. 4. 25 함북 부령~ 1999. 8. 31 서울. 6·25전쟁 후의 사회상을 소설화한 대표적인 소설가이다. 1940년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학병 출정으로 중퇴하고 8·15해방 후 귀국했다. 청진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7년 월남했다.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여 1948년 처녀작 〈육수 肉囚〉를 발표했다. 1960년대초에는 한때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로 있었으며 그뒤 언론계로 옮겨 경향신문사·동아일보사 등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소설을 썼다. 1949년 단편 〈희화 戱畵〉(연합신문, 1949. 11. 19)를 발표한 데 이어 1950년 〈지동설 地動說〉, 1952년 〈미련소묘 未練素描〉가 〈문예〉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단편 〈요한시집〉(현대문학, 1955. 7)과 중편 〈비인탄생 非人誕生〉(사상계, 1955. 10~1957. 1)을 발표한 후이다. 대표작 〈요한시집〉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으로, 전쟁포로가 된 주인공이 거제도포로수용소의 철조망에 목을 매어 죽기까지를 사건보다 등장인물의 의식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과다한 한자 사용과 관념에 치중한 서술로 인해 '이것도 소설이냐'라는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우화를 통한 주제 암시, 등장인물의 기괴함 등으로 당시 한국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관념소설'의 일종으로 현대를 사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중편 〈역성서설 易姓序說〉(사상계, 1958. 3~6), 희곡 〈일부변경선근처 日附變更線近處〉(현대문학, 1959. 7~9), 장편 〈원형의 전설〉(사상계, 1962. 3~11)을 발표했다. 〈원형의 전설〉은 주인공 이장이 전쟁 중에 군인 또는 간첩으로 한반도의 남북을 오가며 사생아인 자신의 출생경위를 밝혀내고 그와 똑같은 경위에 의해 사생아를 출생시키려다 좌절당한다는 내용으로 현대인간의 비극성과 우매성을 그렸다. 이외에 〈잔인의 계절〉(문학사상, 1972. 11)·〈상흔〉(현대문학, 1974. 11)·〈효자점경〉(한국문학, 1979. 1)·〈유역〉(문예중앙, 1981. 3)·〈하여가행〉(현대문학, 1987. 11)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원형의 전설〉(1962)·〈유역〉(1982) 등이 있다.
[1890년] 언론인 김동성 [金東成] 출생
1890. 4. 25 경기 개성~1969. 8. 22 서울. 호는 천리구(千里駒). 개성 한영서원에서 수학하고 1915년 미국으로 유학해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시 기자로 입사한 이후 1921~24년 동아일보 제2대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1921년 10월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22년 동아일보의 초대 미국특파원이 되었다. 1924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 1932년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듬해 〈중앙일보〉를 인수한 여운형(呂運亨)이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했을 때에도 취체역(取締役:주식회사의 이사에 해당)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다가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면서 신문사를 떠났다. 8·15해방 후 1945년 12월 합동통신을 설립하여 초대 사장에 취임했으며,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정치노선의 대외선전을 담당했다. 1948년 정부수립시 초대 공보처장을 역임했고, 1949년 한미친선사절단장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0년 5월 개성에서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51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3~64년 합동통신 회장·고문을 지냈으며,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민의원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재직중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관계 전문서적인 〈신문학〉을 저술했다.
[2005년] 만화가 고우영(高羽榮) 사망
1938.9.27 만주 본계호(本溪湖) ~ 2005. 4. 25 경기도 일산 2005년 대장암으로 죽었으며, 본인이 출석하던 천주교 마두동 성당에서 장례식이 장례미사로 치루어졌다. 향년 66세. 유족들은 고인이 2002년 수술을 받았던 대장암이 재발, 폐로 전이돼 치료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복 이후 평양에서 살다 1946년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둘째형 고상영과 셋째형 고일영이 고교생 시절부터 만화를 그렸고 나란히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1950년대 최고 인기 만화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고인도 형들의 어깨너머로 만화작법을 배웠다 중학생이던 1954년 피란지 부산에서 재미삼아 그렸던 16페이지짜리 만화 '쥐돌이'로 데뷔한 고인은 1958년 서울 동성고를 졸업한 뒤 1959년 둘째형과 셋째형이 6개월 간격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셋째형 일영의 유작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대 ‘추동성’ 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최배달 이야기를 ‘대야망’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만화로 처음 소개한 사람도 그다. 그는 특히 어린이 만화의 인기작가로 명성을 쌓아오다 1972년 일간스포츠에 한칸 혹은 네 칸으로 실리던 신문만화의 관례를 깨고 신문지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25칸 안팎의 대작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성인만화의 새 장을 열었다. ‘임꺽정’의 경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신문의 판매부수를 좌우할 정도였다. 고인은 그 후에도 ‘수호지’ ‘삼국지’ ‘초한지’ ‘열국지’ 등을 연재했으며 이후 ‘수호지’ ‘삼국지’ 등 동양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고인은 이후 중국 역사의 현장을 탐방한 학습만화 ‘십팔사략’과 ‘고우영과 함께 하는 교육부 지정 상용한자 1800’을 펴내기도 했다. 한국만화가협회 제15,16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문화예술상과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인 우정상을 수상했다. 한국만화가협회 22대 회장을 지낸 신문수 화백은 “고인은 ‘국민 만화가’로 불리며 우리 만화계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라고 추모했다. 저서로는 '삼국지(그림)'(전10권) '수호지'(전20권) '초한지'(전8권) '일지매' (전8권) '십팔사략'(전10권) '고우영과 함께하는 교육부 지정 상용한자 1800' 등이 있다.
1965년 한국-볼리비아, 국교 수립
볼리비아는 한국과 1965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97년 외무차관 에두아르도 트리고가 한국을 방문하였고, 1997년 대통령특사 서정화가 볼리비아를 방문하였다. 북한은 미수교 상대국이다. 1971년 문화협정 체결 후, 1976년 한국공관을 설치하고 이민협정을 체결하였고, 1986년 기술협정, 1996년 투자보장 협정을 체결하였다.
[1945년] 국제연합(UN) 창립회의 개최 유엔(United Nations)이라는 명칭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이 고안 하였으며, 2 차 세계대전 중 26개국 대표가 모여 추측국에 대항하여 계속 싸울 것을 서약하였던 1942년 1월 1일 '연합국 선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945년 4월 25일 부터 6월 26일간 센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기구에 관한 연합국 회의'에 참석한 50개국 대표는 1944년 8월 부터 10월간 덤버어튼 오크스에서 회합하였던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등 4개국 대표들이 합의한 초안을 기초로 유엔 헌장을 작성하였다. 50개국 대표는 1945년 6월 26일 유엔헌장에 서명하였으며,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폴란드가 추후 서명 함으로서 51번째 서명국이 되었다. 유엔은 미국, 영국, 불란서, 중국, 소련과 여타 서명국 과반수가 유엔헌장을 비준한 1945년 10월 24일 공식출범하였으며, 이후 매년 10월 24일을 유엔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945년] 미군-소련군 엘베강 토르가우의 다리위에서 해후. 2차대전 종결
미 제1군 69사단의 정찰대와 소련군 58사단 선발대가 1945년 4월 25일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의 한 다리위에서 만났다.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 서쪽으로부터 밀어붙인 미군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 동쪽으로부터 밀어붙인 소련군의 극적인 만남이었지만 독일쪽에서 볼 때 이는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군은 4월 20일에 이미 마그데부르크와 라이프치히까지 진출해 있었다. 영국군도 라우엔부르크에서 엘베강을 건너 메클렌부르크 지방의 서부를 거의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의 몽고메리 총사령관은 "소련인과의 악수는 가능한 한 동쪽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처칠의 말대로 좀 더 동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얄타회담의 뜻을 존중하려는 아이젠하워에 의해 동진을 중단했다. 엘베강에서 처음 만난 미소 병사들은 이튿날인 26일 토루가우의 엘베강가 잔디에서 독일군으로부터 몰수한 술로 건배하며 서로 끌어안고 승리를 환호했다. 5일뒤인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7일 독일은 항복했다.
[1945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체포 1940년 무솔리니는 3국 협정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히틀러에게 주도권을 탈취당하였다. 참전 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각지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상륙과 함께 실각하여 체포, 감금되었다. 그 해 9월 독일군에 의하여 구출되어 북부 이탈리아에 나치스 괴뢰정권인 북이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하여 항전하던 중,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4월 25일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의 반(反)파쇼 의용군 빨치산에게 체포되어, 28일 정부(情婦)와 함께 사살되었다.
[1943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사망
← 이상화 시비 이상화는 1920년대 한국문학 가운데 근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대구 출신으로 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에게 교육을 받았다. 1916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해 1919년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백기만과 함께 거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잠시 서울에 피신했다.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 가담했고,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고, 1927년 대구에 돌아왔으나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의열단 이종암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했다.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1874년] 이탈리아의 무선전신 발명가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1874~1937) 출생
볼로냐 출생.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리보르노 공과대학을 다녔다. 1894년 H.R.헤르츠가 사망하자 헤르츠파(波)의 응용에 착안하여 아버지 집에서 무선전신(無線電信) 실험을 시작하였으며, 1896년 무선전신에 관한 영국 특허를 취득하여 런던 체신청에서 최초의 공개실험에 성공하였다. 1897년 런던 마르코니 무선전신사(社)를 창립하고, 도버해협에서 영국~프랑스 간의 통신을 실현시켰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송수신은 1901년 12월 12일 콘월주(州) 폴듀와 캐나다 뉴펀들랜드주 세인트 존스 사이에서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무선전신은 해저(海底) 전신사업계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선박(對船舶)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 외에도 1901년 단일 안테나에 의한 동조식(同調式) 및 다중전신동조(多重電信同調) 방식, 1902년 자기검파기(磁氣檢波器), 1905년 수평지향성 안테나 등을 발명하였다. 그 후 그의 회사에 J.A.플레밍을 비롯하여 많은 과학자들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통신거리의 연장, 동조(同調)의 개선 및 공전(空電)·혼신(混信)의 제거에 주력하였다. 1909년 K.F.브라운과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의의 이탈리아 전권대표(全權代表)가 되었다.
[1792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 탄생 초기에 혁명을 위한 전쟁가이자 자유를 위한 찬가였던 마르세이예즈 (La Marseillaise)는 서서히 국가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공식행사에서 연주되고 있다. 1792년 오스트리아에 대한 왕의 전쟁선언 후 스트라스부르에서 근무 중이던 프랑스 장교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 Claude Joseph, 1760~1836)이 4월 25일 밤 스트라스부르의 시장이었던 디트리히의 자택에서 "라인강의 군대를 위한 진군가 "를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봉기에 참가한 마르세이유 연합군들에 의해 다시 불려지게 된다. 이후 1795년 7월 14일 그 대중적 성공으로 말미암아 국민의 노래로 제정되었다. 제3공화국 (1879)에서 이를 다시 국가로 제정하였고 1887년에는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전쟁부가 "공식 버전 "을 채택하였다. 1944년 9월 교육부는 회장을 통해 "우리의 해방과 순교를 경축하기 "위해 학교에서 마르세이예즈를 부르게 하였다.
[1783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 최초로 기구실험 성공
프랑스 리용 근처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아노네에서 제지업을 하고 있던 몽골피에(Mongollfier) 형제는 공중비행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구름을 주머니 속에 넣으려는 생각으로 수증기나 수소가스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뜨거운 연기가 든 종이 주머니가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1783년 4월에 열공기 기구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6월 5일에 최초의 공개 실험에 성공했다. 그 결과 , 직경 11m, 부피 680입방m의 거대한 기구는 2천 높이까지 올라가서 30분 뒤에 2km 떨어진 곳에 무사히 내려왔다. 최초의 기구에 사용한 연기는 몽골피에 가스라고 명명되었다. 기구가 상승한 것은 지표면의 공기보가 비중이 작은 뜨거운 공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 2년 후로서 . 프랑스 과학원이 몽골피에 가스를 분석한 결과 그 비중이 차거운 공기의 2분의 1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뒤, 파리로 옮겨 간 이들 형제는 같은 해 9월 19일에 베르사이유에서 기구에 동물을 싣고 8분 간을 비행한 뒤 2.4km떨어진 곳에 무사히 착륙하는데 성공했다. 동물실험비행에서 자신을 얻은 몽골피에 형제는 그 해 11월 21일에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을 실시하여 성공했다. 당초 루이 16세는 이 비행에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를 태우려고 했으나 역사적으로 기념해야 할 비행에 죄수 대신에 지망한 피라돌드 로제에와 다르란드 후작을 태우고 이 유인기구는 브로뉴 숲에서 이륙하여 약 9천m 고도에서 약 25분간 파리 상공을 비행한 후 파리 동부의 13구에 있는 뷰튜 오 카이유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류가 처음으로 신의 영역으로 여겨 왔던 하늘에 첫발을 들여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823년] 미국에서 첫 야구경기 뉴욕타임즈 1823년 4월 25일자에 '야구'라는 이름의 경기가 열린 것으로 확인됨으로 현대적 의미의 야구가 시작됐다. 뉴욕대학의 한 사서가 당시 뉴욕에서 발행되던 '내셔널 애드버킷'과 '뉴욕 가제트 앤드 제너럴 애드버타이저' 등에서 확인한 기사에 의하면 야구팀이 구성돼 미국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경기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야구'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경기방식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기사가 발견되기 전까지 현재와 가까운 형태의 야구는 1839년 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인 애브너 더블데이가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야구계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 쿠퍼스타운에 명예 전당까지 마련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물론 야구 기원을 영국에서 발원한 크리켓으로 보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야구계는 현대 야구 규칙이 등장한 시기를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뉴욕 은행원 출신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야구클럽을 조직해 엘리시언 구장에서 첫 경기를 가진 1846년 이후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926년]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승하
이름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店)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 1875년(고종 12) 2월 세자가 되었으며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융희 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즉위하였다. 같은 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8월 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하였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曾禰 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여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죽었으며,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제42회 단종문화제를 맞아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 국장(國葬) 사진전이 24일부터 6월1일까지 강원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에서 열린다. (영월군청)
그밖에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 과거 유기-무기 정학 유사류의 `출석 정지제` 부활을 담은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입법 예고 2004년 안네 탄생 75주년 맞아 안네 프랑크 희귀 사진 등 인터넷 공개 2004년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 로더`의 창업자 에스티 로더 사망 2003년 국산기(KT-1B 훈련기), 인도에 첫 수출 2001년 병역비리 주범 박노항 원사 도피 3년 만에 검거 1997년 김현철 청문회 1990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서 허블 우주망원경 전개 1989년 삼성전자 세계2번째로 16MD램 개발 1989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1심에서 사형선고 1982년 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14년 10개월 만에 완전 철수) 1980년 미국,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 1979년 한국-소련 국제전화 가설 1974년 포르투갈 군부 쿠데타, 스피놀라 정권 장악 1972년 대법원, ‘사상계’의 등록 취소소송에 승소 판결 1969년 한국감정원 발족 1965년 도미니카 군부 쿠데타 1963년 동아방송(DBS) 개국 1962년 미국, 태평양서 핵실험 재개 1961년 민의원, 공민권제한법 제정 1960년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발표 1959년 미국 5대호와 대서양을 잇는 세인트 로렌스 운하 개통 1958년 멘데레스 터키 수상 내한 1952년 제1대 지방의회의원 선거(시-읍-면의회의원 선거) 실시 1952년 서울대 국내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 1946년 민족박물관 개관 1946년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 1945년 한국 기독교 선각자 김교신 사망 1943년 러시아의 극작가 네미로비치 단첸코 사망 1923년 진주서 ‘형평사’ 발족 1921년 조선군, 군법회의 설치 1920년 소련.폴란드 개전 1919년 건축·디자인 혁신한 ‘바우하우스’ 개관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00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파울리 출생 -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해 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873년 캐나다의 프랑스계 미생물학자 데렐 출생 - 박테리오파지의 발견자 1871년 미국선박의 강화침입을 계기로 종로에 척화비 세움 1827년 멕시코의 대통령(1872-1876) 레르도 데 테하다 출생 1714년 스위스의 법학자 바텔 출생 - 국제관계에 자연법이론을 적용한 ‘국제법’(1758)의 저자 1214년 카페 왕조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 재위) 출생 1185년 일본의 제81대 천황 안토쿠 사망 570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