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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와 교훈들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교훈과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품으신 이상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품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품성의 미와 진리의 원칙이 확실하게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우리는 계명 속에서 그 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을 봅니다. 그 사랑의 성품의 원칙은 곧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처럼, 아니 네 몸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의 원칙을 실천하셨을 때에 나타난 것이 황금률이었습니다. 황금률의 비밀이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것에서 더 지나 놀라운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로 부요함을 누리게 하리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우리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시기 위해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났던 사랑의 원칙 황금률을 연구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 실리는 황금률의 법칙을 연구하면서 이것이 우리들의 생애의 법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보이지 않는 옷
강 영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알 수는 있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사랑과
가슴을 덥히는 친절과
눈물겨운 겸손이 메아리치듯 감돌고 있으면
그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느낄 수는 있습니다.
조심스런 배려와
잘못을 감싸는 용서와
부드러운 온유가 별이 회전하듯 주위를 돌고 있으면
그 옷을 입었다는 것을…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옷,
보이지는 않지만
입으면 달라지는 옷,
입은 줄 모르지만
입은 것이 드러나는 옷…
시험이 몰려와 불에 덴 것처럼 마음이 화끈거릴 때,
근심의 가시 돋아나 삶에 어둔 그늘 드리울 때,
얼른 달려가 얻어 입고 싶은 옷이 있습니다.
모래 늪에 빠진 듯 헛바퀴 돌아 삶이 허전할 때
진흙탕에 빠진 새처럼 깃털 무거워 날아오르지 못할 때
얼른 달려가 숨을 수 있는 휘장 같은 그 옷이 그리워집니다.
입으면 나를 숨겨주는 옷.
입으면 내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는 옷.
입으면 나를 둘러싸 막아주는 옷.
전쟁에 나갈 때 입는 갑옷처럼…
악의 불화살을 막아주는 방패처럼…
마치 요술 옷처럼
입으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그 옷…
실수로 넘어져 크게 코가 깨질 때면
어김없이 당신은 상처에 붕대를 싸매주시듯,
성령의 기름 발라진 그 옷을 입혀주십니다.
알면서도 엎어져 시커먼 숯검댕이 얼굴에 묻을 때면
의례히 당신은 생명의 물로 씻어주시듯
용서라는 언어가 수 놓인 그 옷으로 덮어주십니다.
아기가 목욕하고 나면
포근한 포대기를 벌려 감싸는 엄마처럼,
벌거벗고 떠는 아기에
배냇저고리를 입혀주는 엄마의 손길처럼,
오늘도
부드러운 당신의 손끝 느끼며
그 사랑의 옷 입고 싶어 나옵니다.
당신의 품에 안길 때
입을 수 있는 옷,
당신이 내 안에 계실 때
빛으로 입혀지는 옷,
온 마음과 영혼을 감싸는 당신의 흰 세마포.
당신의 의의 옷…
오늘도 의의 옷을 입혀주시려고
양팔 벌리고 계시는 주님,
송구스러워 쭈빗거리다
이내 당신의 사랑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당신의 의의 옷 입으며 감격의 눈물 떨굽니다.
제2부_황금률이 말하는 이웃
계명과 황금률은 이웃을 사랑하고 남에게 잘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황금률에 나타난 ‘남’과 계명이 가리키는 ‘이웃’은 누구일까?
1) 이웃에 관한 그들의 논쟁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자주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논쟁을 펼쳤다. 이방 사람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그들에게 외인이요 원수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논쟁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같은 유대인끼리도 같지 않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늘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렇게 논쟁을 벌이는 이면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이 핑계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웃이 누구이냐고 따지는 이유는 사랑이 없고 사랑을 베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 그리고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스스로 장벽을 쌓아 이웃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단하고 격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방과 주변 국가와 민족들에게 빛을 비추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진리의 빛과 하늘의 축복과 지식들을 이웃에게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는 대신, 높은 장벽을 세우고 이기심과 편견에 빠져 구원의 혜택이 이방과 이웃 나라들에 베풀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값없이 주어진 하늘의 선물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랍비들과 장로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그들은 무식하고 부주의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더러워지게 되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 “깨끗지 아니한 자”들을 이웃으로 여겨야 하는가가 늘 고민이었다. 얼마나 모순된 바리새주의인가!
2) 고통받는 자의 이웃
1. 이웃이 누구오니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던 ‘이웃’에 관한 해결도 얻고 싶었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던졌다. 되받아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계명의 두 큰 원칙에 대한 그의 바른 대답은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며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율법사는 순결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이 전혀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침을 받았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에 그것을 핑계하려고 했다. 그는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에 오히려 계명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까”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므로 양심의 소리를 피하려고 했다.
2. 자비를 베푼 자
그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얘기하셔서 ‘이웃’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하시는 반면, 진정으로 계명을 지키는 정신과 마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기 위해서는 유대 광야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광야를 통과할 때 사람들은 종종 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강도를 만나 귀중품을 빼앗기고 거의 죽게 된 채로 길가에 쓰러진 사람의 이야기는 당시에 실화로 널리 알려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지혜가 많으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계명의 원칙을 제시해 주신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이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율법사는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서 한마디도 책잡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그의 편견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깨닫는 바가 컸지만, 그러나 그는 아직도 민족적 편견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에게 명예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다만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3) 예수님을 대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이웃은 바로 고통받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웃이란 우리가 속한 교회의 교인이나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적 차별과는 관계가 없이,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웃이다. 시험과 역경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 마음이 상처를 받고 용서를 바라는 가련한 사람, 진리를 모르고 오류 속에서 방황하는 잃어버린 양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의 이웃이다.
거룩한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해 많은 감화를 끼쳐야 함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우리 속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심 없이 도와주려는 자비와 동정심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예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행하는 실천이 아니라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모든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으나,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일상 생애에 실천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올바른 모본이 신앙 고백보다 훨씬 많은 유익을 세상에 끼친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사람을 자기 형제처럼 대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에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피해 지나가지 않으셨으며 우리로 속절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온 하늘 천군의 존경을 받으시던 거룩하고 행복한 하늘 집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고쳐주시려고, 또한 당신을 배반하는 원수들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당신을 죽인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모본을 가르키시며 제자들에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 15: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신앙과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런 정신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난다. 성령의 역사는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본성을 사람 속에 심어준다.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하시는 것이며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원칙이다. 어떻게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닮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매일 주님 안에 거하고, 그분의 생애를 본받기 위해 매일 주님 안에 거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달라고 매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룩한 사랑이 계속 거하시게 하자! 그럴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황금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제3부_비판이 맺는 열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그리스도인이 첫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성향이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하는 일을 그치게 될 때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율법주의가 나타난다. 머릿속에서 이론이나 지식적으로는 잘 알지만, 그 지식이 성령의 터치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덧입혀져 진리로 영혼이 성화되는 진정한 신앙으로 승화하지 못했을 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율법주의는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인간적인 부당한 요구 조건들과 많은 규칙과 규정들을 만들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사라짐과 아울러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소멸된다. 그리하여 많은 부당한 요구 조건을 내걸고 인간이 고안한 그 제도나 표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을 비판하게 된다.
1) 비판과 판단이 부르는 결과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겸손과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했지만,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차서 그저 생각하는 것이 “내 자신, 내 기분, 내 지식, 내 방법” 뿐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한 것들을 기준 삼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했다. 내가 이룬 것, 내가 행한 것, 내가 만든 결과 등 자신의 행위와 성취를 다른 사람과의 것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율법주의에는 반드시 비판과 비교가 따른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화려한 관복을 입고, 비판하고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 그런데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 백성들도 거의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양심의 영역에까지 끼어들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를 놓고 서로 심판하였다. 그런 현상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고 하셨다. 이 말씀은 황금률이 거두는 당연한 결과를 언급하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에 그 비판은 반드시 비판을 되부른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비판과 판단은 똑같은 결과를 부른다. 다른 사람에게 향한 비판의 눈은 곧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이 말은 아무도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의 의견, 어떤 의무에 대한 나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나 표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못마땅하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며, 그들의 동기에 관해 추측하지 말고,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또 스스로 결점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 모든 행동의 숨은 동기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만이 각 사람의 사정을 결정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는 그 사람 자신이 똑같은 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금률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면 그 똑같은 헤아림과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내 눈의 들보와 형제 눈의 티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예수님의 이 말씀은 타인의 결점을 잘 찾는 사람에 대한 교훈이다. 어떤 사람의 품성이나 생활에서 결점을 발견할 때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결점을 고쳐주기 위해 재빠르게 날카로운 지적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런 행동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그 사람의 결점과 비교할 때 마치 티에 대한 들보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곧 비판적인 정신에 빠진 사람은 그가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거기에 자만과 비평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요 5:22)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특권을 찬탈하는 것이다. 비판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하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주의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을 여는 감화를 잘 끼치지 못한다.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며 그리스도께서 위해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냉랭하고 비판적이고 용서를 모르는 정신은 율법주의의 특성이다. 신앙 경험에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도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의 임재가 없는 신앙은 빈 껍데기 신앙이며, 아무리 부지런히 활동하고 열성을 내어도 주님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타인의 결함을 찾아내는 데 남다른 지각과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빠져 있는 각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라”고 말씀하신다. 죄를 지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쓴다. 최초의 부부는 죄를 범하자마자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 본성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다.
3) 남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사람들이 한번 비난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면 형제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된다. 자기 마음대로 그것이 교정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힘이 미치는 한 사람들을 강요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한 일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실했을 때 언제나 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분께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강제 수단은 사랑의 강권이다.
예수께서는 비난하는 자들에게,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의 변화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해주는 위치에 서기 전에 먼저 이 경험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의 생애에 위기가 닥치거나 문제가 생겨서 조언이나 권면을 주어야 할 때, 우리의 말은 평소에 어떤 모본과 감화를 끼쳤는가에 따라서만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 겸허하고 순수하고 부드러워지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잘못을 범한 형제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줄 준비를 하게 된다. 그제야 형제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를 감동시킬 수 있고 도울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신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살피며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 여러 번 실수하고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한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구주께서 달리셨음을 생각하고 그의 죄악의 정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헤아려 보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지 않을 것인데, 갈보리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이나 자만의 정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할 때 늘 자신을 상대방의 처지에 두도록 하자! 상대방의 아픔과 곤란과 실망과 기쁨과 슬픔에 함께 들어가자! 우리가 자신을 다른 형제와 동일시하고, 우리가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그대로 행하자! 황금률은 진정한 친절의 원칙이며 진정한 예의의 원칙이다.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지키기 원하는가? 비판은 비판을 부르고 동정은 동정을 부를 것이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와 사랑은 메아리처럼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제4부_황금률에 들어있는 용서의 법칙
황금률에 기본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은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말해주신 것인데, 바로 용서의 법칙이다. 그 법칙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줄 때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법칙이다.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문을 가르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부언하셨다.
1)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벌을 준다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벌주게 된다. 세상의 심리학자들도 조언하기를, 용서하지 못할 때에 마음과 몸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므로 용서하는 것은 잘못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남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으로 자신이 먼저 치유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심리학 박사 프레드 러스킨은 “용서란 평온한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자신의 상처를 덜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 사건에서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었을 때 생겨난다”고 말했다. 마음속에 나에게 상처 입힌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가 없다. 진정한 용서를 통해 마음의 평화로움을 느끼고, 상대방을 향한 미움에서 자신을 놓아주어야 내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는 남을 위해 베푸는 이타적인 마음인 동시에 자신에게 베푸는 사랑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끊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잘못을 고백하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물론, 회개와 고백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도리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이 그 실수를 고백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긍휼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누가 우리에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를 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용서받으려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정말 용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용서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거듭 잘못을 하고 죄를 고백할 때에 너무 진저리가 나서 너무 많이 용서하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 4)고 하셨다. 만일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거든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 형제가 와서 죄를 자복할 때에 그의 겸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진정으로 자복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곱 번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곧 하나님께서 그대를 사하여 주신 숫자만큼 용서해 주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 비결은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여러 번 용서해주셨는가를 깨달으면 된다.
예수께서는 그 교훈을 주시기 위해 “용서하지 않는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한 왕이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빚을 진 종을 불러들여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는 떨면서 왕의 발 앞에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탄원하였다.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3~35절 참조).
비유에서 왕이 베푼 용서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하심을 나타낸다. 종을 불쌍히 여기고 빚을 탕감해 준 왕은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죄를 범한 인간은 죄의 선고 아래 있게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가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생명을 버리셨다. 그리하여 각 사람에게 피로 사신 용서를 값없이 제공해 주셨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3)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비유에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 동료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는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너무나도 형편없이 적은 금액인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옥에 가두는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에게는 자기를 용서해 준 주인의 모본을 따를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자기가 받은 자비를 베풀 기회를 져버렸다. 그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동관의 호소에 유의하지 않고 악하게 대접하였다. 이 은혜를 저버린 종은 마음속에 오직 동료가 자기에게 빚진 적은 금액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가! 자신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다른 형제가 자기에게 지은 죄와 비교한다면 일만 달란트 대 백 데나리온, 거의 백만 대 일이나 되는데도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 그가 비록 한때 죄의 용서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할지라도, 현재 그가 나타내는 각박한 정신은 그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했고 죄 사함을 받기 전과 똑같은 형편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회개를 부인했고 그의 죄는 마치 그가 회개하지 아니했던 것처럼 그에게 머물러 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비유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몰인정을 대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 아닌지를 증거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다. 용서하기를 거절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 결국 자기의 용서의 희망을 내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 어떤 것으로도 용서하지 않는 정신을 변명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간구하면 우리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가까이 끌리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와 사랑의 물결이 그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것은 마치 서로 주고받게 되는 황금률의 법칙이 서로의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것과 같이 되어 진정한 용서라는 기적을 낳게 만드는 것이다.
** 마치면서
예수님의 생애는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황금률의 진수를 보여준 생애였습니다. 친절하고 예의 있고 사려 깊으신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과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황금률이 고스란히 드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취급받고 싶은 대로 남을 취급하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한다면, 그곳이야말로 예수님이 거하시기 기뻐하시는 천국이 아닐까요?
황금률을 실천하려면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신다면 우리 마음에는 사랑의 결핍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우리는 동료 인간들과도 사랑의 금고리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긍휼과 동정심이 우리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궁핍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던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궁핍한 자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있는 곳에 빛이 넘치게 비칠 것이며, 우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사랑의 황금률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체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황금률 속에 들어있는 거짓말 하지 않는 황금의 법칙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이 있는 곳에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황금률을 실천하는 여러분이 있는 곳은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간증_ 영원한 복음, 참된 진리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장로교 모태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결혼 7년 차, 올해 6살과 4살 된 두 딸아이를 양육하는 30대 중반의 주부입니다. SOSTV를 통해 참된 진리를 깨닫고 작년 여름에 귀농하기 전까지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여러 학교와 교육 기관들을 다니면서 아이들 수업, 학교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의,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을 위한 강연과 연극공연, 자원봉사 등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의 아빠는 방송에 출연하실 만큼 꽤 유명한 "쉐프"이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엄마는 헌금도 많이 하고 담임목사님의 가정, 심지어 담임목사님의 시골 부모님에게까지 때마다 쌀이며 옷이며 용돈 등을 챙길 만큼 교회에 충성을 다하셨고 늘 기도와 찬송, 성경 말씀으로 사셨습니다. 그 영향으로 저는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가정에 큰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함께 일하던 친척이 인감도장을 훔쳐 아빠 명의로 대출을 많이 받았고, 그 때문에 여의도에 있던 아빠의 음식점과 마당이 넓었던 커다란 집까지도 은행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졸지에 무일푼으로 단칸방으로 쫓겨나게 되었고 어려움을 심하게 겪게 되자, 부모님은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우울증, 급기야는 당뇨병을 앓게 되시면서 매우 난폭하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하여 늘 다투셨습니다. 아빠는 연이은 사업실패로 늘 만취한 상태로 집에 오셔서 큰 소리와 욕설로, 때론 물건 부수는 소리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10년 넘게 지속되어 평안한 가정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속상한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던 엄마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불평, 불만의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럴수록 더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오빠 역시 집보다는 거의 밖으로만 돌았고, 성격이 괴팍해진 엄마는 급기야 저에게 큰 소리로 윽박지르고 간섭하고 심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엄마가 심하게 폭언을 할 때는 화가 폭발해서 엄마에게 대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하나님...' 하고 마음으로 후회했지만 그 일은 계속하여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예수님께서 원죄를 해결해주셨지만 자범죄는 계속 지을 수밖에 없으니 죄를 지어도 계속해서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받고 구원받는다, 한번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아라 등 거짓 가르침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었기 때문에 같은 잘못을 계속한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같은 죄를 잘라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죄짓고 회개하고 다음 날 죄짓고 또 회개하고 이런 반복이 계속되었습니다.
아빠의 사업은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어 빚은 더 늘어나 결국 저는 고2 때부터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냈고, 급식비가 없어 점심은 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리라 믿고 고등학교 생활을 버텨 나갔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친 후 부모님의 빚을 갚아드리기 위하여 대학은 포기하고 3년을 더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저는 하나님을 위한 교회 일은 언제나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다 점점 건강과 체력이 약해져 영양실조와 폐결핵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2년 정도 약을 꾸준히 먹어야 결핵이 좋아지는데 한 달 반가량 후 놀랍게도 증상이 좋아져 건강을 회복하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가 세속적으로 변하고 헌신하는 일 중에 억울한 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성경 말씀의 참 진리대로 세워진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그러한 교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간절히 기도하며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적그리스도"가 로마 카톨릭 교황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놀라웠고 그 뒤로 남편과 함께 더욱 성경 말씀과 기독교역사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교회를 찾는 중, 2년 반 전에 SOSTV 말씀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왔던 30여 년의 시간을 통틀어서 이러한 설교 말씀은 처음 듣는 아주 놀라운 해석들이었고 정말 진리이신 성령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의 해석들이라고 생각됐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가 가득한지를 깨닫게 해 주셨으며 주님의 뜻에 늘 갈급한 심령을 갖게 되도록 이끄셨고, 교만하고 반복되는 죄악으로 가득했던 저를, 하나님 앞에 겸손케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케 하셨습니다.
비록 고난과 시련은 많았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런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더욱 바라보는 계기가 되도록 마음을 주장해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친구이셨습니다. 가정의 어려움과 불화를 겪으며 하나님께서는 저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낮은 데에도 처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의 뜻을 더욱 간절히 구하고 사모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주시기를 기도드리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많이 경험했다'고 자만할 수도 있었을 그때, 가장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가장 학식이 높아졌고, 가장 명예가 높아지던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그것들로부터 분리하시기 위해 불러내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제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희 가정이 진리에 바로 서게 하시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옵소서.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매 순간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게 하시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진리탐구_ “첫 열매”의 의미와 사명
그리스도인에게 “추수”는 참으로 가슴 떨리고 벅찬 말씀의 단어인데 모든 알곡이 추수되는 그 날은 누구에게는 영원한 삶이 시작되는 날인 반면, 또 다른 누구에게는 기록된 형벌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농사와 관련된 절기가 많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데, 이 절기의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 끝 추수의 시기와 방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농사는 봄에 심고 가을에 추수하지만 이스라엘은 우리와 반대로 가을에 심고 봄에 추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추수와 관련된 절기를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사람들은 추수에 앞서 가장 좋은 곡식과 열매를 먼저 거두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를 지내야 하는데 이것을 “맥추절(麥秋節), 초실절(初實節) 또는 요제절(搖祭節)” 이라고 합니다.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우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레 23:10)
성경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있는 모든 남자라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삼대 절기에는 꼭 첫 열매를 드리는 의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무교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은 보리와 밀과 나무 열매들을 추수하는 계절의 시기에 들어 있는데, 그 각각의 절기들에서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이 반드시 먼저 있지 않고서는 추수가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교훈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첫 열매가 먼저 준비되지 않고서는 추수를 시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또한 첫 열매는 밭에서 제일 먼저 익고 가장 좋은 최상의 상품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추수하시기 위하여 항상 그 세대마다 첫 열매들을 먼저 준비시키시고, 세대마다 첫 열매들이 준비된 이후에,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추수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❶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추수를 대표하는 하나님을 향한 첫 열매였습니다.
“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
❷ 초대 교회는 온 세상의 추수를 위해 드려진 첫 열매였고,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이었습니다.
“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❸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부활의 아침에 일어날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의인들의 부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온 세상 복음을 위한 첫 열매인데 그들이 먼저 성령을 받고 준비되는 일이 없었더라면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주시는데 이와같이 144000인은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 번 영원한 복음을 널리 증거하고 세상의 알곡들을 추수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첫 열매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회사_왈덴시안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박해
모든 교회사 연대기에서 왈덴시안들이 가장 잔인한 박해 중 하나를 겪었던 것은 알렉산더 7세(1655-1667, Malta의 종교재판소 출신)의 통치 기간이었다. 다음은 J. A. Wylie가 기록한 것이다.
라 토레의 전경
1655년 1월 25일에, 유명한 가스탈도의 명령이 나왔다. 이 칙령은 루세르나, 페닐레, 부비아나, 브리체라시오, 산 지오반니, 그리고 라 토레(간단히 말하면, 피에몽 평지와 그 수도의 경계선이 되는, 부유한 구역 전체)의 집단공동체에 거주하던 모든 왈덴시안 가정에 내려진 명령으로서, 삼일 이내에 그들의 거처들을 버리고, 봅비오, 앵그로그나, 그리고 로라 계곡들 속으로 은둔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 토지들을 20일 이내에 로마주의자들에게 팔아야 했다. 하지만 기꺼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리기로 맹세한 자들은 그 칙령에서 면제되었다.
그 상황에서, 이 칙령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것을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한겨울이었고, 알프스의 겨울은 더 북쪽 지방의 겨울에 버금가는 테러였다. 그 칙령이 발표된 그와 같은 날에,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병자들과 누워만 있는 자들, 맹인들과 불구자들까지 포함된 전 주민들이 물이 불어있는 강을 건너고, 눈 덮인 계곡들을 통과하고,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오르는 그 여행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필연적으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그리로 내몬 그 칙령은 추위와 기아로 그들을 사형시키라는 유죄판결에 다름없었다. ... 이제 그 급류들을 건너고, 그 산길들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이 불쌍한 행렬을 내려다보는 얼음으로 덮인 산정상은 차가웠다. 그러나 박해자들의 심장은 그보다 더 차가웠다. 그들에게 한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은 미사에 갈 수 있었다. 그들이 그것에 편승했는가? 역사가 레제르의 정보에 의하면, 거의 2000명의 회중들이 있었으나,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그 대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계곡들의 왈덴시안들은 이 가난한 유배자들을 환영하였고, 기쁘게 자기들의 초라하고 부족한 양식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그 전체 공동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일어서서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대적들은 몹시 놀랐다.
이 처음 불행에 이어 더 큰 재앙이 재빠르게 닥쳐왔다. 왈덴시안들의 일부만이 가스탈도의 그 잔인한 칙령으로 고통 받았다. 그러나 카톨릭 포교성성(카톨릭 포교담당기관)의 고착된 목표는 왈덴시안 전체를 박멸하는 것이었기에, 완전한 배반과 고의적인 잔인함을 아우르며 그 일이 전개되었다.
1655년 4월 17일, 드 피아네자 후작은 한밤중에 비밀리에 툴린을 출발하였고,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 계곡들 전면에 나타났다. 마침내 한 광풍이 갑작스러운 천둥의 굉음과 함께 들이쳤다. 1655년 4월 24일 새벽 4시에, 라 토레의 성채-언덕에서 한 신호가 떨어졌다. 즉시 일천 명의 암살자들이 학살 작업을 시작했다. 혼돈, 공포, 고통, 재앙이 한순간에 루세르나와 앙그로그나 계곡들 전체에 퍼져나갔다. 비록 그 아수라장에서 광적인 자들이 범죄에 절고, 피에 취했다 해도, 그들이 포교성성의 군사들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 희생자들이 전력을 다해서 그 언덕들을 올라간다 해도, 그 살인자들이 그들을 추적하였다. 그들이 그 고지에서 굴러 떨어지자, 그 급류들이 곧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계곡들을 따라 피어오르는 그 어둔 연기 속으로 분출되었다. 한 명의 사제이자 수도사가 각각의 부대들을 동행하면서, 그 거주자들이 처형되자마자 집집마다 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아! 반복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그 소리들은 무엇인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신음이 메아리쳤고, 주변의 바위로부터 다시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그 산이 자기 자녀들의 학살로 인해 통곡하는 것 같았다. ‘마을들, 촌락들, 교회들, 대저택들, 농장들 그리고 건물들의 연기로 인해 그 땅은 용광로 같았다. 바티칸의 화염 속에서 모든 것이 타고 있었다.’
그 병사들은 검으로 재빨리 처형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롭고 게다가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고문과 죽음의 형식들을 개발했다. 이날에 누구도 감히 분명한 어조로 이 사람들의 그 모든 역겹고 두려운 행위들을 기록해낼 수 없었다. 그들의 사악함의 전모는 결코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결코 그 모든 것을 다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제르의 무시무시한 기록에서 우리는 다만 몇 가지 경우만 선별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 극소수 사례들도 그것들이 다소 온화하게 기록되었음에도, 우리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작은 어린아이들이 어머니들의 팔에서 강제로 떼어졌다. 그 아이들의 작은 발은 깍지 끼워졌고, 아이들의 머리는 바위 위로 힘껏 던져 졌다. 혹은 두 병사 사이에 붙들린 채, 아이들의 떨고 있는 팔다리는 우악스럽게 찢어졌다. 그들의 토막 난 시신들은 그 후 길가나 들에 버려져서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병자들과 노인들은 거처에서 산채로 화형 당했다. 어떤 이들은 손과 팔과 다리가 절단되었고, 그 절단 부위에 불이 붙여져서 그들의 유혈을 지혈시키고, 그 고통을 연장했다. 어떤 이들은 산채로 가죽이 벗겨졌고, 어떤 이들은 산채로 구워졌으며, 어떤 이들은 내장이 도려내졌다. 혹은 자기 소유의 과수원에서 그 나무에 묶인 후 심장이 도려졌다. 어떤 이들은 두렵게 사지가 절단되었고, 다른 이들의 뇌는 끓여져서 인육을 먹는 사람들에게 먹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밭고랑에 못질하여 묶인 후, 마치 사람들이 토양에 비료를 주듯이 쟁기질되어 그 땅에 비료가 되었다. 다른 이들은 산채로 매장 당했다. 아버지들은 목둘레에 자기 아들의 머리를 두른 채 형장으로 끌려갔다. 부모들은 죽기 전에, 먼저 아이들이 폭행당하고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레제르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가 없다. 거기에는 치가 떨리고, 혐오스럽고, 괴기스런 행위들이 나오고, 전적으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역겹고, 두렵고, 악마 같아서, 우리는 감히 그것을 옮길 수 없다. 속에서 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어둠의 자식들(어둠의 왕보다 더 검은)의 행위들을 기록하는 동안,’ 레제르는 말한다, ‘손이 떨려, 간신히 펜을 들 수 있었고, 눈물이 억수같이 흘러 잉크와 범벅이 되었다.’
Healing Story_레몬의 신비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레몬! 새콤한 레몬은 놀랍게도 알칼리 식품으로 우리 몸에 주는 유익을 말하자면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유익한 점이 많다는 의미겠지요?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찬송 가사가 떠오릅니다. 그 창조주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노랗고 새콤한 레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항암작용
레몬에는 플라보노이드와 비타민C 등 각종 항산화제가 풍부합니다. 이런 항산화제는 신체에서 활성산소를 제거함으로써 암 발병 위험을 낮추어 줍니다.
레몬에 들어있는 4가지 중요 성분
*비타민 C : 항산화제, 항독 작용을 하며 면역기능을 증진시켜 줍니다. 특히 위암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또한 상처치유를 촉진시켜주며 골격, 조직과 연골의 건강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영양소 중 하나입니다.
*플라보노이드(신 과일에 많이 들어 있는 것): 피토케미컬로써 항산화제이고 항암, 항염 작용을 하며 특히 암 전이를 막아줍니다.
*레모노이드 : 레몬 껍질에 있는 성분으로 위암과 유방암을 유발하는 물질을 중화시켜서 비활성화시키므로 암을 예방해 줍니다.
*섬유질(펙틴) : 레몬을 잘랐을 때 쿠션같이 하얀 부분에 있는 성분으로 전립선 암이 전이되는 것을 예방해 줍니다.
2. 항산화 역할
콩팥은 우리 몸을 pH7.4 정도로 유지하기 위해 혈액을 조절합니다. 레몬은 신체를 알칼리화하여 이러한 콩팥의 부담을 줄여줍니다.
레몬에는 각종 항산화제가 풍부해 활성산소와 햇빛, 오염물질, 독소 등으로 인한 피부 손상을 막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레몬의 비타민 C는 피부의 콜라겐 합성을 증강시켜 피부 노화를 막는 효과가 있습니다.
3. 면역력 강화
*비염, 천식 : 레몬은 소화액 분비를 증가시키고 소화기관을 깨끗이 청소해 주는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천식은 소화기가 깨끗하고 소화력이 완벽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신선한 레몬 한 개를 짜면 티스푼으로 두 수저 정도 나옵니다. 그것을 그냥 또는 물에 타서 식사하기 15분 전과 자기 전에 하루 네 번 마셔주면 천식이 잘 조절됩니다. 또한 레몬의 비타민 C는 알러지로 인해 분비되는 히스타민하고 경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타민 C가 많이 들어가면 히스타민이 분비가 적어지고 비활성화됩니다.
4. 소화액을 분비시켜 소화력을 증진시킴
밀가루 음식이나 기름기 많은 음식, 떡을 먹고 체했을 때에 레몬 하나를 짜서 나온 즙과 같은 양의 끓는 물을 섞어서 마시면 도움이 됩니다.
레몬차는 창자와 소화기관에 남아있는 독소를 씻어냄으로써 장을 깨끗하게 해줍니다.
5. 해독 작용레몬은 담즙의 생성을 촉진하여 간을 정화해주므로 간의 해독기능을 강화시켜 주고, 담결석을 용해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레몬물은 이뇨작용이 있어서 자주 마시면 몸의 염분과 독소의 배출을 촉진해주므로 체내를 정화하고 건강을 유지시켜 줍니다.
6. 항염 작용
레몬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대한 치료제로써 민간요법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항염 작용을 위하여 레몬을 즙을 내어 마실 뿐 아니라 코 안에, 목에, 눈 안쪽 결막에 발라주어도 좋습니다. 비타민 C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서 면역 계통이 감기 바이러스를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나 여러 명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비타민 C가 가득한 따뜻한 레몬차를 마시면 감기나 독감 등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감기 : 레몬 쥬스와 파인애플 주스를 반반씩 섞어서 마시면 목에 있는 가래가 다 녹습니다. 끈적한 타액을 다 뱉어낸 뒤에 레몬 1-2개를 짜서 나온 즙과 물 4컵을 섞어서 꾸준히 마시면 감기에 좋습니다. 아이들의 경우, 레몬즙을 마실 때에 인후통이나 열만 없다면 꿀을 조금 타서 함께 마시도록 하면 좋습니다.
7. 심장혈관 질환
레몬은 모세혈관의 벽을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함으로 혈액 순환에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동맥 안에 콜레스테롤하고 죽은 광물질(특히 칼슘)이 합쳐져 사마귀같이 되는데 그것이 결국 동맥경화증을 일으키어 혈액순환을 막는 일을 합니다. 레몬은 죽은 광물질, 특히 칼슘을 용해하는 작용을 하므로 지방이 엉겨 붙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피가 엉겨 붙어서 핏덩어리가 되어 혈액 가운데 떠다니다가 혈관을 막으면 뇌경색을 일으키는데, 레몬의 레모노이드는 혈액이 응고되지 않도록 하여 혈액순환이 잘되도록 도와줍니다.
8. 고혈압과 통풍
레몬에는 칼륨이 풍부해 뇌 기능을 돕고 혈압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통풍은 관절에 요산이 축적되어서 오는 것인데, 레몬은 이 요산을 녹여서 배설시키는 일을 하므로 통풍관절염과 신석을 치료하는 작용을 합니다.
9. 악취 제거
레몬에는 항균성 물질이 있어서 구강 내 유해 세균을 살균하는데 탁월합니다. 레몬즙을 물에 타서 칫솔에 묻혀 이와 잇몸을 닦아 주시면 됩니다. 입과 위장에서 올라오는 악취까지 제거해 줄 뿐 아니라 잇몸병을 막는 효과도 있습니다.
10. 금연
금연을 결심하신 분이 계십니까?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에 신선한 레몬 쥬스를 한 모금 물고 있다가 삼키기를 반복하면 담배를 끊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때 주부는 맵고 짜지 않게 순한 양념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11. 빈혈 개선
잠을 충분히 자고 난 뒤에도 피곤한 적이 자주 있다면 빈혈 증상을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레몬에는 비타민 중에 하나이며 빨간 피를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엽산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또한 레몬에 풍부한 비타민 C는 신체가 철분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줘 빈혈을 예방하는 데 꼭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채소를 먹을 때에 레몬을 섞어서 먹거나 레몬즙을 뿌려주면 채소에 있는 광물질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