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 영주 팔경(新 瀛州 八景) ::: 영주(瀛州)라 함은 탐라(耽羅)와 같은 옛 제주(濟州)의 이름이다. * 瀛 : 바다 영,
본시 제주에는 영주 십경(瀛州 十景)이 있다 한다. 성산일출(城山日出)이 그 하나요, 사봉낙조(紗峰落照)가 그 둘이다. * 紗 : 깁 사, 그리고 영구춘화(瀛丘春花)가 그 셋이요, 귤림추색(橘林秋色)이 그 넷이며 여름날의 정방하폭(正房夏瀑 )이 다섯이다. 한라산 정상의 눈부신 백설 녹담만설(鹿潭晩雪)이 여섯 번째요, 불야성 이루는 밤바다 산포조어(山浦釣漁)가 일곱이며 끝 없는 초원의 고수목마(古藪牧馬)가 여덟 번째다. * 藪 : 늪 수, 그리고 석벽 병풍을 둘러친 산방굴사(山房窟寺)가 그 아홉 번째요, 한라산 서남쪽 허리에 있는 오백장군 기암 영실기암(靈室奇岩)이 그 열번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옛스러움보다는 새로운 제주의 팔경을 보았으니 이름하여 신 영주 팔경(新 瀛州 八景)이다.
1. 성산설주(成山雪柱)
그 일경一景으로 나는 성산포 앞 바다의 회오리 눈기둥을 든다. 한 마리 크나큰 용이 그 용신을 뒤틀대며 춤을 추는 듯한 회오리 눈보라,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검푸르게 일렁이는 바다와 낮게 가라 앉은 하늘 사이에 축이 되어 몰려다니는 거대한 눈기둥의 모습, 그것은 천 년의 도를 깨치고 승천하려는 수룡水龍 같기도 하기고, 하늘로 오르는 비상 계단 같기도 하다. 특히 먼 내륙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겐 어쩌면 성산일출보다 더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이다.
2. 명경일로(名景一路)
제 이경二景은 해안을 끼고 도는 일주 도로. 제주시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도는 길은 서회선 , 동쪽으로 도는 길은 동회선이라 한다. 그 도로를 달리며 유의할 것은 군데군데 나 있는 해안의 샛길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상 그 코스의 하이라이트들이 바로 그 샛길에 있기 때문이다. 애월읍을 지나 조금 내려가면 유난히 파도가 높은 곳이 있었는데 집채 만 한 파도가 부서지며 안개꽃 같은 포말이 차창을 때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이 해변 도로를 달리노라면 운해를 헤치며 갑자기 다가서는 알록 달록한 어촌의 지붕들을 만난다. 알싸한 새벽 갯내음이 폐부까지 밀려들던 표선 해수욕장 부근. 영롱한 햇빛의 반조로 내 가슴 속까지 빨갛게 물들여 버렸던 이호의 그 노을. 아마도 그것들은 내 추억의 방안에서 오래도록 귀빈으로 묵을 것이다.
3. 송악망해(松岳望海)
제 삼경三景은 송악에서 보는 새벽 바다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 제주의 바다는 지용의 노래 처럼 너무도 순결하여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소녀 같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렸 갔다가 여린 날개만 젖어 돌아오는 서글픈 나비의 오만한 연인 같았다. 동트기 전 해협은 하얀 비늘을 세우며 기지개를 켜려 하고 해초의 향기로 짠 무의舞衣를 입은 바람은 해협의 무녀가 되어 부풀어 오르는 파도의 앞가슴을 차고 푸른 비상을 한다. 한라산 자락이 바다와 만나 이루어 낸 곳, 송악산. 그 남쪽 절벽에서서 해조음을 벗 삼아 바라보는 새벽 바다는 어느 시각, 어떤 바다보다 가히 일품이다.
4. 이월복수(二月福壽)
제 사경四景은 복수초다. 봄 소식을 전하는 꽃 중에서 결코 빼놓으면 안되는 꽃이다. 미나리과인 이 복수초를 중부지방에서 보려면 본격적인 봄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이 있다. 그러나 추위에 지친 사람들, 특히나 꽃을 소재로 삼는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 있으니 바로 제주도다. 내가 2월 중순쯤 제주도를 찾았을 때였다. 제 1 횡단 도로를 타고 목석원 조금 못 미쳐. '오라골프장' 입구에서 무거운 카메라를 두어 개씩 목에 매달고 계곡을 향해 셧터를 눌러 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호기심에서 내려갔던 나는 그만 탄상을 지르고 말았다. 비탈진 계곡 한켠에서 병아리떼처럼 재재거리며 피어있는 키 작은 노오란 꽃들. 철 이른 반가움은 물론이려니와 한설도 아랑곳 없이 동토를 뚫고 그 위에 꽃까지 피어내는 그 질긴 생명력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2월화二月花이다. 그러니 복수초 또한 숨어 있는 비경중의 하나이리라.
5. 한라세우(漢拏細雨) * 拏 : 붙잡을 라,
제 오경五景은 뭐니뭐니 해도 한라산 중턱의 금빛 세우細雨가 아닌가 한다. 제주의 대명사인 한라산에는 철 따라 피고 지는 기화요초며, 필설로는 형용키 어려운 기암괴석들이 태평양을 바라보며 천만 년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그런 한라산에서 나는 이번 여름, 또 하나의 잊지 못할 한라의 산물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머문 곳은 한라산 중턱의 탐라 연수원이었다. 그날 밤, 밖으로 나서던 우리 일행 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연수원 뜨락, 수은등 불빛을 타고 마치 금가루를 흩뿌린 듯 찬란하게 내려오던 그 빗발들. 우리는 그것을 온몸에 휘감으며 아이들처럼 빙긍빙글 돌았다. 더구나 평소엔 감성보다는 이성이 늘 앞서 가곤 하던 S선생마져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말았으니, 제주가 우리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어둠이 오고 수은등만 켜지면 몇 밤이고 내릴 것 같던 한라의 세우, 변화무쌍한 한라산의 기상이 만들어 낸 걸작이란다. 나는 명주결 같이 보드라운 그것을 '한라의 주단紬緞'이라 이름 지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새벽을 맞았다.
6. 한라설화(漢拏雪花)
제 육경六景으로는 한라산의 설화雪花를 꼽는다. 누가 나에게 한라산의 천색천화千色千花중 으뜸을 들라면 나는 눈 덮힌 한라의 품에서 순결하게 피어나는 설화들을 말하리라. 내가 한라산을 오르던 날은 연일 내리던 눈보라가 하늘을 낮게 드리운 채로 잠시 숨을 고르던 날이었다. 어디쯤 올랐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눈 덮힌 산야 뿐, 세상은 모두가 그 아래 잠들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그 위를 걷고 있는듯 했다. 어느 능선을 달려 왔을까. 한 줄기 바람이 백설을 깨우더니 산 아래 세상으로 분분히 날려 보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작별을 고하는 나의 눈길에 또 다른 꽃이 들어왔다. 상고대.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한라산의 상고대는 서리가 잉태하고 눈이 키워 낸 작품이다. 몽송이라고도 불리우는 상고대는 한번도 같은 얼굴로 태어난 적이 없다는데, 어디서 왔는지 야생 노루 한 마리가 그 사이를 노닌다. 그 순간이었다. 내내 흐려있던 잿빛 하늘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달려 나오더니 전나무 위 설화에 쏜살 같이 꽂혀든다. 바르르, 그 강렬한 애무를 이기지 못한 꽃은 온몸을 떨더니 그만 낙화가 되고 만다. 봄날 꽃잎처럼 날리는 백설과 은빛가루로 흩어지는 눈꽃들과 산짐승들의 꽃동산 몽송. 산은 결코 빈 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다더니 내 가슴 속에 한폭의 동양화를 아로새겨 주었다.
7. 밀월행객(蜜月行客)
제 칠경七景은 제주 거리의 신혼부부를 빼 놓을 수 없다. 옛부터 제주엔 삼려三麗, 즉 세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심, 아름다운 열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제주에는 그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이 또 있었으니 신혼부부들의 모습이다. 유채꽃 활짝 피는 사월 초순, 제주를 찾은 사람들은 왜 제주를 신혼여행의 천국이라 부르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푸른 바다와 검은 현무암, 일렁이는 유채꽃의 황금 물결,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운 한복 차림으로 사진 촬영을 하며 사랑을 익히는 신혼부부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이른 아침이나 석양 무렵,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며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 다른 곳에선 눈총을 받고 말 행동거지도 신혼여행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어 그저 예쁘게만 보아 주는 곳이 제주도가 아니던가. 마주치는 쌍쌍이 행복으로 흠씩 젖어 머무는 곳이다.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식의 마무리를 짓는 것은 아무래도 신의 축복이 없이는 안 될 일일 것 같다. 인생살이의 큰 획을 긋고 있는 그들에게 빛나는 미래의 박수를 보내며 나는 제주 삼려에 버금 가는 아름다움이라 일컫고 싶다.
8. 탐라미인(耽羅美人) * 耽 : 즐길 탐,
제 팔경八景은 탐라의 여인이다.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그 고장 사람이 있다. 그 고장의 관광명소나 토속 음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향토색 짙은 그 고장의 토박이를 만나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제주 민속관에서 삼다三多의 하나인 제주 여인의 기상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한 여인을 보았다. 큰 심방 역을 하는 ' 강종임 씨' 그 곳 민속관에선 개관 기념으로 제주의 신명이 물씬물씬 풍겨나는 '탐라의 노래'를 공연하고 있었다. 그 공연 속에서 나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떼지 못했다. 전농로에 핀 벚꽂 같은 미모에 유채꽃 가지보다 더 가녀린 몸매의 그녀인데 어디에서 저토록 대단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가. 걸죽하지만 저속하지 않은 말 솜씨, 영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노련한 춤사위로 객석과 무대를 오가는 그녀. 비록 극중이었지만 그녀는 제주의 토박이 신神과 관광객들 사이를 오가며, 다리를 놓는 역할을 너무나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산에서 밭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남정네들 못지 않은 저력을 과시하는 제주 여인네의 끈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큰 심방. " 하영 방 강 ㄱ. 릅서." 그녀의 말대로 제주를 찾는 모든 이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공연이었다. 같은 나무 같은 꽃이라 해도 탐라에서는 달라 보인다 했던가. 하늘과 바다와 산과 꽃, 그 모든 그리움이 예서 만나 하나 되는 곳, 이곳이 어찌 팔경뿐이랴.
- 1997년 '문학 속의 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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